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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42화 (541/963)

542화. 들어야 안다 (2)

“다 숙지하였나?”

“물론입니다.”

“역시 빠르군.”

“가르치는 사람의 능력이 좋았습니다.”

“답지 않게 아부는.”

양천이 손을 털었다.

지극히 멀쩡한 그와는 달리, 연호정의 모습은 제법 험했다. 머리는 산발하고 의복 여기저기가 헤져 있었는데, 때만 안 탔을 뿐이지,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그러진 않겠지만, 절대 방심은 말게. 내가 가르쳐 준 방법은 ‘최소한’이야. 음제라면 내가 상상도 못 할 공격으로 자네를 전투 불능 상태로 빠트릴 수도 있어.”

“그리고, 음제와 싸우지 않을 수도 있지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언제나 최악의 상황은 가정해야지.”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대량 학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성천의 강자 중 음제가 최고일 것이야. 음공, 음파의 힘이지.”

“알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뿐만이 아니라 함께 가는 사람들 모두가. 아차 하는 순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다 죽어 나갈 수도 있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정 걱정이 되시면 부주님께서도 함께 가시지 그러십니까?”

“함께라…….”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뜻밖에도 양천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래,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

“진심입니까?”

“자네는 무림에 나와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업적들을 세웠네. 무공만 강하다고 성공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어. 오히려 무공보다 다른 능력이 더 빛을 발했지.”

“인정합니다.”

“그건 분명히 대단한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네. 자네에게 한계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거야.”

“…….”

“상대는 성천의 강자일세. 이번 같은 경우, 무력의 열세는 치명적이야.”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에 아쉬움이 일었다.

양천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흑암제로서의 경험과 실력, 예민하게 단련된 안목으로 그간 별의별 임무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무력이었다.

적당한 임무에 투입될 거라면 이는 약점이라 볼 수 없었다. 약점일 수가 없었다. 연호정의 무력은 후기지수 수준을 넘어, 성천급 강자를 제외하면 능히 천하를 다투는 초고수였다.

문제는 그가 항상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투입된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스스로도 그것을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강력한 무공조차 약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지.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을 자네에게 맡겨도 될까 싶었어. 솔직히, 자네에게 잠시 묵룡부를 맡기고 내가 직접 달릴 생각도 했었네.”

연호정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왜? 의외인가?”

“의외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묵룡부의 수장이 할 생각은 아닌데요.”

“맞아. 묵룡부의 수장이 할 생각은 아니지.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은 중원의 무림인이라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일이지.”

“……!”

“하지만 관뒀네. 관뒀다기보다는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지. 성천의 강자를 포섭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면, 제아무리 자네가 중심을 잡아 줘도 본부가 엉망이 될 거거든.”

“맞는 말씀입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 의미 없는 생각이었네. 중요한 건 현실이지. 특히 이번 일 같은 경우, 믿고 맡길 사람이 자네 외엔 없어.”

“…….”

“기실, 애초에 자네를 이런 용도로 쓸 생각이긴 했지만…… 참 답답하군.”

연호정은 생각했다. 확실히 양천도 많이 달라졌다고.

전생의 양천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대화가 많지도 않았지만, 그때의 그는 흑도 통일에 눈이 멀어 온갖 잔학한 짓을 서슴지 않는 광기 어린 야심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네 덕분이야. 자네는 내 목숨을 살렸어. 그리고 내게 함께하자고 했지. 전쟁에서 이기고자 나라는 장기 말을 살린 것에 불과하다 해도 상관없네. 중요한 건, 내가 사음교주의 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지.”

“…….”

“자네에게는 언제고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네. 고맙고, 미안하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음? 그건 갑자기 왜?”

“투왕 양천이 제게 진심다운 진심을 보여 준 역사적인 날이 아닙니까? 기억해 두려고요.”

“실없긴.”

양천이 뒷짐을 졌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그리고 거기서 끝이지. 앞으로의 관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네.”

“압니다.”

“막원은 어떤가?”

“요양 중입니다. 무림맹에 서신을 보냈으니, 조만간 답변이 올 겁니다. 특히 막원 선배님의 몸에 깃든 독이 정말 신화교의 맹독이라면, 그걸 치료해 줄 수 있는 확실한 사람이 있거든요.”

“서역신녀로군.”

“그렇습니다.”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무림맹의 의선각주가 묵룡부로 온다…… 새삼 우리가 동맹을 맺었다는 게 실감이 나는군.”

그가 연호정을 직시했다.

“이번 일만 제대로 성공해서 돌아오게. 막원이 치료되는 즉시, 그다음 임무는 그와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서 나 아니면 누가 자네를 걱정해 주나? 자네 없으면 전쟁도 힘들어. 정 포섭 못 할 것 같으면 목숨 걸고 도망치게.”

“그거야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겁니다.”

“어련하시겠어.”

양천이 몸을 돌렸다.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좋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오늘 술을 마실 운명이 아니었다.

“부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사, 삼공자가……!”

“음?”

“삼공자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몇몇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주변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양천이 등장하자, 그들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부주님을 뵙습니다!”

양천은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쓰러진 전홍에게로 다가갔다.

“……?!”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천과 함께 온 연호정 역시 전홍의 시신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목내이(木乃伊)?!’

전홍의 시신은 바짝 마른 장작처럼 변해 있었다.

온몸의 피와 수분이 몽땅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쑥 들어간 눈과 움푹 팬 볼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연호정이 전홍의 맥을 짚었다.

그가 양천을 돌아보았다.

“생기(生氣)가 전부 빨려 나갔습니다. 내공까지도.”

“…….”

양천은 말없이 전홍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격동하는 모양새였다.

백서가 다가와 말했다.

“삼공자가 거처에서 나온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

“발견 시각은 반 시진 전이었습니다. 즉 삼공자의 사망 시각은 한 시진 전에서 반 시진 전, 그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천이 물었다.

“그사이에 만난 사람은?”

“……한 사람 있습니다.”

“누구지?”

“강량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게.”

잠시 후, 강량이 무사들의 수행을 받으며 현장에 도착했다. 그 역시 오면서 상황을 들었는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강량이 오자 양천을 제외한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양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자네, 오늘 이 녀석을 보았지?”

“그렇습니다.”

애초에 이곳이 강량의 거처 바로 앞이었다.

양천이 짧게 말했다.

“설명하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강량이 침중한 음색으로 말했다.

“명상을 하다가 배가 고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이미 저자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뜸 시비를 걸길래 무시했지만, 도가 지나친 욕설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싸움.”

“그렇습니다. 물론 일격에 끝난 싸움이었지만.”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때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을 뽑아 위압을 가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제아무리 화가 난대도 묵룡부 안에서 부주의 제자를 죽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스르륵.

양천이 일어났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나만 묻지.”

여전히 양천은 등을 돌린 채였다.

“자네는 귀철검문의 무공 외에 다른 무공을 익힌 게 있나?”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떤 무공이지?”

“벽산연가, 연가주님이 가르쳐 주신 철검대연이란 무공입니다. 후반부는 전수하지 않았지만요.”

“검법, 그게 끝인가?”

“그렇습니다.”

그제야 양천이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양천의 눈빛은 위압적이지 않았다. 다만, 표정은 심각했다.

“맥문을.”

타인에게 맥문을 쉽게 건네는 무림인은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맥문을 통해 들어오는 암경으로 내부가 박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량은 순순히 팔을 뻗었다.

양천은 강량의 맥문을 통해 그의 내부를 점검했다.

잠시 후.

“그게 귀왕진기인가?”

“그렇습니다.”

“대단한 신공이군. 과연 흑도 최고의 명문이라 불릴 만해.”

양천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현장을 보존해라. 그 누구도 이곳에 들이지 마라.”

“명을 받듭니다!”

“백서, 그리고 연 부관은 나랑 얘기 좀 하지. 강량 자네도.”

대전에 들어온 양천은 태사의에 앉지 않았다.

그가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어 섰다.

“백서. 자네는 셋째가 왜 그 지경이 되었는지 짐작 가는 게 있는가?”

“송구하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른 무공은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흡성대법(吸性大法)의 일종입니다. 추측건대, 아마도 사흡공(死吸功)과 같은 부류일 겁니다.”

백서가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사흡공에 대해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놀랍구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야. 저건 흡성대법 중에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한 대신 내공을 거의 완전하게 상실한 상태에서만 쓸 수 있는 사흡공의 일종일세.”

흡성대법 자체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무공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얼룩진 무공이기 때문이다.

흡성대법은 상대의 내공을 빨아들여 자신의 내력을 증강시키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빨아들인 내공이 시전자의 내공과 상충을 일으켜 높은 확률로 주화입마에 들게 하거나 목숨을 앗아 갔다.

위력이 강하다면 희대의 마공(魔功)이라도 익히는 게 무림인이었다. 그러나 강함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들도 흡성대법을 익히진 않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익혀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내공을 빨아들인다고 해도 죽거나 폐인이 될 확률이 높으며, 설령 성공해도 무림공적(武林公敵)이 된다.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 한들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때는 흡성대법이 유행한 적도 있긴 했지만, 그것도 몇 년 지나지 않아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지금에 와서는 흡성대법을 익히는 자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젊은 세대는 흡성대법이라는 무공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흡공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흡성대법에 당한 시신이라도 최소한의 기(氣)는 남기 마련이야. 하물며 죽은 지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은 시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흡공은 달라. 사흡공은, 어떤 의미로는 치유의 무학이네. 내공은 물론 생명력이 극단적으로 깎여 나갔을 때, 타인의 내공과 생기를 빨아들여 일시적으로 폭발적인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묵룡부 소속의 누군가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렇지.”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가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합니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백서.”

“예, 부주님.”

“부의 병력을 풀어 첫째를 잡아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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