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들어야 안다 (1)
퍼어어엉!
화려한 폭음과 함께 당상아가 뒤로 물러났다.
그게 전부였다. 뒤로 물러났을 뿐, 상처를 입진 않았다. 그저 한쪽 소매가 갈가리 찢겨 나간 정도랄까.
“후우.”
당상아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굉장하네요. 몇 번이나 받아 냈지만, 정말 아버지의 천독수(千毒手)는…….”
“이제야 좀 봐 줄 만하구나.”
“네?”
당관이 자세를 풀었다.
“독기(毒氣)를 거의 완벽하게 제어했다. 제왕독경에 성취가 있었느냐?”
당상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약간의 깨달음이 있긴 했죠.”
“그 약간의 깨달음이 모여 너를 종사(宗師)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본가의 장로들도 나의 천독수를 그리 깔끔하게 막아 내진 못해.”
당상아는 아버지의 칭찬에 당황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듯한데…….”
“기대 이상이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삼 년 안에 본가의 장로들과도 붙을 만하겠어.”
“저, 정말요?”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라고 그리 말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식에게 더 엄한 그였다. 딸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지만, 특유의 엄격함이 무뎌지진 않았다.
당관이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아니, 이런 부분에서 신중한 그의 성격을 볼 때, 삼 년이 아니라 일 년 안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겠지만.
“비술(匕術)의 성취는 따로 보지 않겠다. 하지만 독기는 계속 보겠다. 제대로 된 독정(毒精)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해독 수련이 필요한 법이야.”
해독 수련이란 다른 게 아니었다. 극독을 흡입하고 미량의 해독약을 복용하여 내공만으로 독기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가의 내공심법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지, 천하제일의 내공심법으로도 당가처럼 극단적인 해독 수련을 하다가는 몸이 성치 못한다.
당상아의 얼굴에 결심이 깃들었다.
“네!”
“새겨들어라. 우리는 독을 다루는 자다. 독은 곧 죽음이야. 우리는 무림에서 가장 죽음과 가까운 공부를 연성하고 있다.”
“…….”
“그래서 빠르고, 그래서 위험하다. 본가에서 해독 수련을 하다가 죽어 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잘 알 것이다.”
“알고 있어요.”
“개중에는 나보다, 혹은 너보다 재능이 출중한 사람도 많았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냉철하기 그지없는 정신력이다. 쉽다고, 괜찮다고 타성에 젖어서 한 번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
“꼭 명심하거라.”
“네!”
결의에 찬 대답. 그러면서도 당상아의 표정은 밝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디 아버지는 엄격하기는 해도, 이렇게 세심한 구석은 없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섬세해지고 계신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
당상아는 아버지의 그 변화가, 자신의 무공 발전보다도 백 배는 더 기뻤다.
“오늘 수련은 이걸로 마치겠다.”
“고생하셨어요.”
“그래.”
“혹시 따로 일 없으시면, 저랑 저녁 식사라도 하실래요?”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당상아가 활짝 웃었다.
아버지의 또 다른 변화였다. 예전에는 함께 식사는 해도, 이리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 주진 않으셨다.
이제야 정말 남들 부럽지 않은 부녀지간이 된 것 같았다.
당상아가 당관의 팔짱을 꼈다.
“가요. 오늘은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팔 놔라. 무겁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당관은 피식 웃을 뿐 더 이상 당상아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녀가 거처로 돌아왔을 때였다.
“당가주님.”
거처의 입구에 개방도가 서 있었다.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볼일이 있나, 거지?”
당상아가 당관에게 눈을 흘겼다. 아무리 그가 달라졌다곤 해도, 특유의 이 말투는 절대 안 바뀔 것이다.
개방도가 고개를 숙였다.
“당가주님께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
“그렇습니다.”
“본가인가?”
“아닙니다. 호남 묵룡부에서 온 서신입니다.”
순간 당관의 안광이 번뜩였다.
“싸가지로군.”
개방도가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후우우웅.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개방도의 손에 들린 서신이 날아와 당관의 손에 잡혔다.
개방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공섭물의 기예를 처음 보는 것이다.
당관이 시원하게 서신을 펼쳤다.
잠시 후.
“거기 가서도 싸가지는 여전하군.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부탁을 빙자한 일거리를 던져 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관의 얼굴에는 어떠한 불쾌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당상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연 대수님에게 문제라도 생겼나요?”
“그놈 자체가 문제지. 천하에 싸가지 없는 놈.”
당관이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식사는 내일 하도록 하자.”
“아, 네.”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춘 당관이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정오쯤 양선이 도착할 것이다.”
“그렇군요.”
“회의 시간이니, 네가 알아서 잘 안내해 주거라.”
“네!”
당관이 개방도를 바라보았다.
“거지.”
“예? 아, 예!”
“따라와라.”
“예?”
“서역신녀가 출발하기 전에 그쪽한테도 따로 연락을 보내야 할 것 아니냐? 얼른 따라와, 확 중독시켜 버리기 전에.”
“쿨럭! 예!”
* * *
우우우우웅.
강량이 눈을 떴다.
‘음?’
그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가부좌를 튼 다리, 양 무릎 위에 한 자루 검이 놓여 있었다.
‘검?’
명상을 하다가 기묘한 울림을 들었다. 그리고 그 울림의 출처는 검이었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검을 쥐었다.
“…….”
검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떠한 울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헛것을 들었나?”
하긴, 명상한답시고 벌써 세 끼를 굶었다.
어쩌면 검이 아니라 배에서 난 소리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배가 무진장 고팠다.
강량은 귀왕진기를 끌어 올렸다.
후우웅.
온몸에서 은은한 흑회색 기운이 넘실거리다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몸에 이상은 없군. 제길, 배나 채우자.”
자리에서 일어난 강량이 처소를 나섰다.
그때였다.
“어디 가는 거지?”
강량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전홍이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강량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밥 먹으러 간다.”
전홍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당당하게 축내는군.”
“적어도 너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강량은 휘적휘적 잘도 걸었다. 전홍에게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전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뒤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여기는 묵룡부야. 멸문한 네 문파에서 배운 아기자기한 논리 따위는 통용되지 않아.”
강량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전홍의 눈에 살기가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오래 못 살 거다, 너.”
스륵.
강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전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력이 없어서 패배했으면 이럴 시간에 이 악물고 단련해서 날 뛰어넘을 생각을 하는 게 어떠냐?”
“뭐?”
“흑도든 백도든 칼 한 자루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세계야. 생사결에서 목숨을 건졌으면, 다시는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단련을 해야지.”
강량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
“나를 보며 분노를 불태우는 것까지는 좋아.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그저 떽떽거리려고 온 거라면, 무인으로서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닥쳐라!”
우우우우우웅.
전홍의 몸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멸문한 문파의 후예 따위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그 멸문한 문파의 후예도 복수한답시고 하루하루 지랄맞게 수련 중이다. 그리고 넌, 그런 문파의 후예에게 팔 하나가 잘렸지.”
“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럴 시간 있냐? 내가 아니라 네 사형제들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독하게 수련해야 하지 않나?”
강량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라. 건설적인 대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잖냐? 차라리 말솜씨라도 키우는 게 어때?”
순간 전홍의 살기가 그의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개새끼!”
파악!
전홍이 땅을 박찼다.
그 순간, 강량의 몸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움직였다.
퍼어어억!
“커허억!”
전홍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컥! 커어어억!”
배를 움켜쥐고 꿈틀거리는 전홍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검집으로 복부를 제대로 맞았다. 호흡이 안 되고 입 안에서는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한 방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전홍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빠르다니?!’
객잔에서 싸웠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속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속도를 그대로 실은 힘, 그리고 그 힘이 복부를 꿰뚫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죽인 섬세한 내력 조절도 굉장했다.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전홍을 내려다보는 강량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스르르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슥.
전홍의 몸이 움찔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예기에 일순 고통도 잊었다.
“세상이 만만하지?”
“……!”
“투왕 양천의 제자인데 설마 죽이겠나 따위의 말랑말랑한 생각으로 살아오니까 편했지?”
우웅!
강량의 검에 귀왕진기가 실렸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예기가 두 배, 세 배 증폭되었다. 그 예기만으로도 강철의 정신력을 베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속 편한 정신머리가 너의 인생을 끝장내는 광경을 잘 보도록 해라. 내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거든.”
퍼억!
전홍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강량이 발로 그의 목덜미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차가웠던 강량의 눈빛이 무심하게 변했다.
검사의 눈빛이었다. 검사는 검을 휘두를 때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이놈?!’
전홍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놈, 진짜로?!’
강량이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그의 검첨이 땅을 찔렀다. 전홍의 좌측 귓불에서 반 치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주르르륵.
검날에 베이진 않았지만, 검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가 전홍의 귓불을 반쯤 베었다.
무심하게 빛나던 강량의 눈빛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쫄았냐?”
그의 목에서 발을 뗀 강량이 단숨에 납검했다.
“사실 그렇긴 해. 아무리 그래도 투왕의 제자인데 죽여서야 쓰겠냐? 심지어 묵룡부에서? 안 되지. 나는 아직 투왕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
“……?!”
“대신,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죽이진 않아도 사람 병신 만드는 방법은 꽤 알고 있거든. 그 정도면 양 부주도 뭐라 하진 못할 거 아냐? 네가 먼저 덤볐는데.”
강량이 다시 휘적휘적 걸어갔다.
“네가 다쳐서 득 볼 사람은 따로 있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나 따위가 아니라 후계 자리나 신경 써. 그 두 사람 눈빛 보니 당장이라도 널 삶아 먹을 것 같더만.”
그렇게 강량은 전홍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쿨럭! 쿨럭!”
몇 번이나 기침을 토한 전홍이 잔뜩 충혈된 눈으로 강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
콰아앙!
내리친 주먹에 땅이 푹 꺼졌다.
정말이지 분노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화가 났냐면, 이곳에 온 본인 스스로에게도 살기를 느낄 정도였다.
“개 같은!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때였다.
“정말이지 못 봐 주겠군.”
깜짝 놀란 전홍이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우우우웅.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그림자가 살랑거렸다.
“나? 글쎄다…… 적어도 네가 환영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