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강자존(强者存) (7)
다음날, 연호정은 곧장 막원의 맥을 짚었다.
“음.”
“알겠는가? 무슨 독인지?”
연호정이 막원의 맥을 놓으며 답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무슨 독인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어떠한 부류라는 것은 알 수 있지요.”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자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막원이 놀랄 만도 했다.
삼교는 새외에 거주하는 미지의 집단이었다.
땅이 다르면 기후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환경이 다르면 당연히 들풀도, 동물도 다른 법이다. 즉, 중원의 독을 제아무리 잘 알아도 새외의 독까지 잘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호정은 그 새외의, 그것도 삼군의 일인인 자신조차 자체 해독이 불가능한 극독의 부류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연호정은 막원의 몸 상태에 놀랐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긴 한데…….’
막원을 보는 연호정의 동공이 은근히 확장되었다.
‘정말 굉장한 무공이야.’
무극지경을 돌파한 절대고수의 맥을 짚을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연호정은 막원의 기맥이 얼마나 탄탄하고 광활한 지도를 그리고 있는지 하나하나 전부 볼 수 있었다.
‘엄청나. 양 부주와는 또 다른 경지다. 무공의 우열은 명백히 갈리지만, 스스로가 이룬 자신만의 무도(武道)만큼은 투왕에 비교해 손색이 없어.’
과거 그는 양천의 맥도 짚어 보았다.
그때도 무척 놀랐다. 기실, 이 경지는 자신도 올라가 봤으나 그곳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사람마다 전혀 다른 법이었다.
즉, 연호정은 벌써 성천급 강자 둘의 기맥을 확인하며 어떻게 무극지경에 올랐는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걸 따라 한다고 순식간에 무극지경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연호정은 막원의 기맥이 그린 지도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말했다.
“신경독의 일종입니다. 그나마 선배님께는 다행이지요.”
“다행?”
“혈액독이었다면 선배님이라도 이리 멀쩡하실 순 없었을 겁니다. 독기(毒氣)의 농도 때문이 아니라 독의 종류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가?”
“중원의 혈액독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혈액을 극단적으로 응고시키거나, 반대로 자연스러운 혈액 응고를 방해하거나.”
“허어.”
“선배님께서는 큰 내상을 입었지요. 내장 출혈도 심했습니다. 그 와중에 이 정도로 지독한 혈액독이 한 번이라도 발작했다면, 내부 장기가 하나씩 곯았을 것입니다.”
장기가 하나씩 곯는다.
천하제일고수도 장기가 곯는 건 치명상이다. 특히나 신장(腎臟)이나 폐장 등, 회복이 안 되는 장기가 곯아 버리면 후에 독을 제거해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
“물론 혈액독은 특성상 농도 짙은 독기로 뭉치기는 힘들죠. 중원에선 당가를 제외하면 극단적인 혈액독을 만들 수 있는 집단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만.”
“예. 하지만 신경독이라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선배님이었으니 버텼지, 당장 저만한 고수라도 지금쯤 기식이 엄엄했을 겁니다.”
“통상의 경우, 내공은 인체의 신경을 타고 각 부위로 전달된다네. 아마 천하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내공심법이 그러하리라 보네만.”
“그렇지요. 하여 선배님이 무사하신 겁니다. 그 신경 한 올, 한 올을 절대적인 내공이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알겠네. 다만 이 신경에는 내 내공만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기도 뻗어 있어. 그리고 그 독기의 근원은 내 단전이지. 단전에 자리 잡은 독정(毒精)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내 몸은 점점 죽어 가겠군.”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막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떤가? 뽑아낼 수 있겠나?”
놀랍게도 연호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뽑아낼 수 있습니다.”
“허어, 다행이구만.”
“뽑아내는 것 자체는 가능한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선배님께서도 다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친다?”
“내공의 일부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꽤 충격적인 얘기였다.
“물론 제 짐작일 뿐입니다. 애초에 약독학에 대한 지식도 그리 깊지 않죠. 그나마 삼교의 독을 연구한 적이 있어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삼교의 독을 연구한 사람이 중원 천지에 몇이나 되겠나?”
“……거의 없겠지요.”
“거의가 아니라 자네가 유일하겠지.”
“어쩌면요.”
“삼교의 독에 정통한 사람이 그리 말한다면, 어떤 의원이 와도 비슷하겠지.”
생각보다 막원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뭐 어떤가? 내공의 일부를 상실한다 하여 내 깨달음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닌걸. 오히려 그 정도 대가로 이리 위험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정신력이 남다르다?
그렇다. 막원은 무인에게 충격적일 수 있는 얘기를 들어도 여유를 잃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신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무극지경을 돌파한 고수에게, 내공의 일부를 잃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지닌 내공의 삼분지 일을 잃는다 해도, 수년 안에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는 이들이 무극의 고수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막원처럼 담담하진 못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내공은 힘의 근원이다. 예전에는 십의 힘을 쓸 수 있었거늘, 지금은 칠의 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내공의 상실 없이 독정만 빼내는 방법도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시간이 걸리겠지.”
“아마도요.”
“시간이 지날수록 독기는 확장될 것이고, 그럼 결국 내가 잃게 될 내공의 양도 많아지겠지?”
“그럴 겁니다. 추측이지만요.”
막원이 피식 웃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군. 방법만 알아내 주게. 바로 뽑아내겠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독이 그 지경으로 깊어진 것을 좌시한 저의 책임도 있습니다.”
“지난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네. 중요한 건 지금이지.”
“맞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전쟁에서 소중한 병력이 될 분인데, 최대한 시도는 해 봐야지요.”
“그러다가 태반의 내공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부주님이나 무림맹에 영약 조달을 청해서 최대한 복구해 보도록 하죠.”
“이 사람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내 내공의 절반이라면 소림의 대환단 열 알을 복용해도 다 채우기 힘들 걸세.”
단순한 기(氣)의 양만 따지면 대환단 열 알의 약력이 막원의 절반 내공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고수일수록, 정제된 내력을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영약의 효과는 미비해지기 마련이다.
하수일 때는 대환단 한 알의 약력을 몽땅 빨아들일 수 있지만, 내공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흡수할 수 있는 양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단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최악의 상황을 말했을 뿐, 실제로 독의 전문가가 보는 시선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정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네.”
“다시 찾아뵐 때까지 운공에 힘을 써 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독기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하지.”
막원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은 곧장 백서를 찾았다.
“무림맹에 서신을 보내야겠소.”
“어떤 서신을 보내면 되겠소?”
“의선각주 기우희를 호남으로 파견해 달라고 해 주시오. 정 뭐하면 내가 적겠소.”
“그 정도 간단한 서신이라면 이쪽에서 적어 바로 전달하겠소.”
“고맙소. 그리고 이것도 전해 주시오.”
연호정이 품에서 꺼낸 서신은 녹색 봉투에 들어 있었다.
백서의 눈이 빛났다.
“당가주?”
“무림맹에 계실 거요. 막원 선배의 독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오.”
“알겠소.”
“그럼.”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백서가 말했다.
“연 부관.”
“하실 말씀이라도?”
“굳이 전할 필요가 있을까 싶소만, 아까 이공녀가 연 부관을 찾는 듯했소.”
“오호, 그렇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고맙소.”
“그리고 연 부관.”
백서의 눈이 깊어졌다.
“어지간하면 사고는 치지 마시오.”
“내가 무슨 사고뭉치인 줄 아시오? 걱정 마시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다만, 부주님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오?”
“그냥 하는 말이오. 이만 가 보겠소.”
그렇게 연호정이 백서의 거처를 나섰다.
백서는 멀어지는 연호정의 등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 위험한 남자야.”
그르르르릉.
동굴 벽이 열리고, 서늘한 바깥 공기가 폐부를 적셨다.
묵룡부를 나온 연호정은 하녀가 말해 준 곳으로 향했다. 묵룡부 입구에서 동남쪽으로 오 리가 떨어진 숲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부선이 있었다.
“날 찾으셨다고?”
“연 부관님.”
“공사가 다망하실 이공녀께서 어인 일로 불초 소생을 찾고 계셨나?”
부선의 눈이 깊어졌다.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연호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놓쳤군.”
“어떻게 알았죠?”
“표정만 봐도 알지, 그런 건.”
“…….”
“당신 사제와 연수했나?”
“그러지 않았어요.”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직접 대사형을 꺾고 능력을 증명한다……라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유는 아니로군.”
“셋째는 오만하죠. 자존심도 지나치게 강해요. 그래서 단순하고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본인이 약세라고 판단될 경우엔 온갖 잔머리를 굴릴 녀석이죠.”
“그 정도 잔머리 굴리는 놈 하나 요리하지 못하는 능력으로는 후계자 자리를 버티기 쉽지 않을 거야.”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녀석 때문에 고민하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어설픈 놈과 연수하는 것보다는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게 나아요.”
“어련하시려고.”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왜 불렀어? 놓쳤으면 기어이 쫓아가서 모가지를 꺾어 버리지 않고.”
살벌한 말을 잘도 하는 그였다.
부선은 지그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요?”
“뭘?”
“이럴 때 보면, 당신은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흑도 같아요.”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르겠군.”
“칭찬이에요. 부럽기도 하고요.”
“그래서 할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다음 임무는 언제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걸 댁이 알아서 뭐 하시게?”
“가능하면 저도 다음 임무에 한 다리 걸치고 싶어서요.”
“…….”
“안 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사부에게 직접 가서 허락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나?”
“사부님께서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에요.”
“뭐, 그도 그렇지.”
연호정이 팔짱을 꼈다.
“왜 이번 임무에 함께 가겠다는 거지?”
“위험하겠죠?”
“임무? 당연하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
“새삼스럽진 않군요.”
“그렇지. 다만, 진짜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야. 성천급 강자를 설득하러 가는 길이다. 만에 하나 그만한 고수가 수틀려서 우릴 죽이려 하면, 우리 중 살아서 돌아올 사람은 아마 없을걸?”
“그런 길을, 의형제 삼은 동생과 보타암의 검수를 데리고 갈 생각이군요.”
“…….”
“이유가 있겠지요?”
“그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고 세상을 배우기 위함이 주된 이유 아닌가요?”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 이유가 가장 크지.”
“저도 그러고 싶어요.”
“…….”
“부디 저를 이끌어 주세요.”
가만히 부선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역시 넌 아직 부족해.”
“네?”
“그렇게 속내가 빤히 보이는 부탁을 하면 네 사부 체면이 뭐가 되겠어?”
부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죠?”
“사부가 날 감시하라고 하던가?”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빛을 살피던 연호정이 이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세상을 배우기 전에 스스로부터 잘 다스리는 게 좋겠어. 아직 수양이 부족해.”
“연 부관님. 나는…….”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사형이나 잡아 와라. 그럼 고려해 보겠다.”
스륵.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고 부선을 돌아보았다.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빛에 부선이 움찔했다.
“명심해라. 내가 왜 너에게 기회를 주었는지를.”
“…….”
“강자존은 너희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야. 이곳에 온 이상, 나 역시 강자존의 규칙대로 살고 있음을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