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강자존(强者存) (6)
“크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그게 그렇게 재밌소?”
“이 사람아, 나는 이렇다 할 사문이라는 게 없어. 동문도 없이 혼자서 세상과 드잡이질을 해 왔단 말이지.”
“알 것 같소. 당신 성격이 왜 그리 칙칙한지.”
“칙칙하다니? 나만큼 호탕한 사람 또 없어!”
사람이 왔는데도 두 사람은 껄껄껄 웃으며 연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연호정의 표정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성천의 강자니 뭐니 해도 술 취하면 똑같은 노친네들이군.’
둘 모두 이룬 경지가 워낙 높아서 중년의 나이로 보일 뿐이다. 양천은 진즉 환갑이 넘었고 막원 역시 오십이 훌쩍 넘었다.
그만치 나이 먹은 사람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낄낄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어! 연 부관 왔나?”
양천이 손을 까딱거렸다.
“와서 자네도 한잔하게. 아, 한데 안주가 없구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주는 없어도 됩니다.”
“역시 젊음이 좋아.”
새 잔에 술을 채운 양천이 물었다.
“어땠나? 첫째는?”
연호정이 잔을 비우며 피식 웃었다.
“소문이 정말 빠르군요.”
“이 사람아,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러나? 민감한 사항들은 전부 내 귀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해서, 녀석이 자네한테 뭐라던가? 대충 짐작은 가네만.”
“자기편에 서 달라던데요?”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로 그랬단 말이지?”
“예.”
“한심한 놈. 그 시간에 이 악물고 단련해도 모자랄 판에 정치질이나 하고 있다니. 그것도 무림맹의 파견인한테? 집안 꼴 잘 돌아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내가 왜?”
“제자들을 그렇게 관리한 사람이 부주님 아닙니까?”
“난 관리를 한 적이 없는데?”
“무관심도 관리를 못 한 거죠. 뭐가 되었든, 제자들이 그 모양 그 꼴인 건 전부 부주님 잘못입니다.”
양천이 씨익 웃었다.
“하긴, 그도 그렇군.”
막원은 내심 놀랐다.
‘꽤 민감한 얘기일 텐데.’
자신의 제자가 무능하다 욕하고, 그들이 무능한 까닭이 당신에게 있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한다.
더 놀라운 건 양천의 반응이었다. 표정이나 목소리를 보아하니, 연호정의 말에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이라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확실히 보통 그릇이 아니야.’
성격이 독특한 것이든 그릇이 큰 것이든, 양천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뭐, 재미없는 얘기는 그쯤 하시고.”
연호정이 막원에게 물었다.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막원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헛기침을 하곤 두 사람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 부관.”
“말씀하십시오, 부주님.”
“자네도 이 사람 몸뚱이가 독에 절여졌다는 거 알지?”
“압니다. 아무리 봐도 절여진 건 아닌 듯하지만.”
“제대로 수습하고 있더군. 하지만 아직도 제거 방법을 찾지는 못한 것 같네.”
“그렇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 백병 후배의 몸에 깃든 독이 어떤 독인지 아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런가?”
양천을 바라보던 막원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양천은 막원의 시선을 무시했다.
“모르지만, 해독은 가능하겠지?”
“어떤 독이라도 방법만 찾으면 해독은 가능하지요. 묵룡부의 의원들이 달라붙어도 해독은 될 텐데요?”
“안 그래도 진찰은 받았네. 당연하게도 보통 독이 아니라더군. 백병 후배라서 잘 다스리고 있는 거지, 초절정고수라도 닷새를 버티기 힘든 맹독 중의 맹독이라 하였네.”
“그 정도 독은 되어야 천하의 백병신군을 중독시킬 수 있겠지요.”
“그렇겠지.”
연호정이 재차 잔을 비우고 말했다.
“어떤 독인지는 모르지만, 삼교 측이 뿌린 독이라면 부류(部類)는 알 수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
연호정이 막원을 바라보았다.
“섭섭하십니까?”
아닌 말로 작정하고 그 독을 해독하려 했다면, 지금쯤 해독 방법을 알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러지 않았다. 막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굳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줄 필요가 없다. 사소하고 쩨쩨할 수도 있지만, 이 관계의 중심에는 전쟁이 있다. 당연히 쩨쩨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막원이 그 독을 버틸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만약 막원의 상태가 위중했다면, 연호정 역시 앞뒤 안 가리고 해독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막원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기다릴 생각이었는가?”
“그렇습니다.”
“그랬구먼.”
“물론 저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면, 그때 넌지시 제시할 생각이었습니다.”
“별로 좋지 못한 그림이로군.”
“그걸 아니까 부주님께서 나서 주신 것 아닙니까?”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또 그런 눈치는 잘 보거든.”
“어련하시려고요.”
연호정이 편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결심이 섰습니까?”
막원이 미소를 지었다.
“내 사문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나의 사형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에 대해서 말인가?”
“그렇습니다.”
“결심은 섰네.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네.”
“귀를 열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내 사형이 자네가 생각하기에 엇나가는 길을 걷고 있다면, 그때는 그를 죽일 생각이신가?”
“엇나가는 길이라는 게 어떤 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호정이 양천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그분이 이번 전쟁에서 중원 측에 해를 끼치는 쪽에 선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겠지요.”
“…….”
“아마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암살할 겁니다. 그래야 뒤가 편할 테니까요.”
솔직한 답변이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양천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 정도로 솔직한 답을 내놓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연호정은 양천의 표정을 읽었다.
“막원 선배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진심을 얘기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저 역시 목숨 걸고 진심을 꺼내야지요.”
“……누가 뭐랬나? 하여튼 잘났어.”
“칭찬 감사합니다.”
몇 마디로 양천을 침묵게 한 연호정이 다시 막원에게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저희가 그분을 죽여야 할 상황이 오면, 선배님은 저희를 막을 것입니까?”
“그런 상황이 온다라…….”
막원이 잠시 눈을 감았다.
분위기가 갑자기 축 가라앉는 듯했다. 하기야 대화의 주제를 생각하면 무거워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막원이 눈을 떴다.
“내 사문은 요동에 있네. 거기서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위치해 있지. 그때는 그랬네.”
“지금은 다르다는 말씀이로군요.”
“문주가 바뀔 때마다 문파의 거주지도 달라지네. 애초에 강호 무림의 문파처럼 주춧돌을 세우지는 않거든.”
“대체 무슨 문파입니까?”
“무종문.”
순간 양천과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원이 쓰게 웃었다.
“두 분 다 들어 본 적이 있긴 한 모양이오.”
“……들어 보기만 했다 뿐인가?”
양천이 뚱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이 사기꾼 녀석이 무종문의 대표 직책으로 날 속여 먹기까지 했는데?”
“예?”
막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
“예전에 제가 묵룡부를 털어먹으려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내세운 신분이 무종문의 대사형이었습니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대사형이었나?”
“그랬을걸요? 솔직히 저도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럴 만도 하지. 투왕의 이름이 생각보다 대단치 않잖아? 사소한 건 잊어버릴 만도 해.”
“삐지셨습니까?”
“시끄럽다, 이놈아!”
투덜거리고 있지만, 양천이나 연호정이나 내심 무척 놀랐다.
무종문. 그야말로 전설상의 문파다.
백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말도 있고, 일각에서는 수백 년 전에 세워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무종문이 각 방면의 최고수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다. 오죽하면 정보로는 백도 이상이라는 흑도에서도 무종문의 거처나 구성원, 쓰는 무공이나 문규 등을 하나도 몰랐다.
그랬기에 연호정이 묵룡부에 세작으로 왔을 때, 무종문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
당시 연호정 일행은 하나같이 연성한 무공이 달랐다. 애써 무공을 숨겨도, 드러나는 기질과 보행만으로도 각자 전혀 다른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은 사문인데도 그렇게나 기질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무종문이라는 이름이 제대로 먹힐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데 여기, 진짜 무종문의 후예가 있다.
“그랬군. 뭐,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나와 나의 사형, 무림이 창왕이라 부르는 사람 모두 무종문의 후예일세.”
양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무종문이라.’
정말 대단한 문파가 아닌가.
백도 정파의 구파일방, 육대세가도 성천의 강자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성천의 강자를 보유한 정파 집단은 소림과 무당, 남궁과 당가 정도였다.
한데 무종문은 대외 활동도 없이 성천십삼좌에 두 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문파란 말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갖추고 있기에 중원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를 둘이나 배출했는가?
“자세히 들려주게. 무종문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네 사형에 대해서도.”
얘기는 한 시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간만에 과거 얘기를 해서 그런지, 막원은 피곤하다며 자리를 떴다. 스스로도 생각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결국 대전, 묵룡원에는 양천과 연호정 두 사람만이 남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입니까?”
“소현립 말이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만나는 봐야지요.”
“그래?”
연호정 역시 생각이 많았다. 양천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오늘은 푹 쉬시지요. 생각도 정리할 겸.”
“그래. 그렇게 하세.”
“먼저 갑니다.”
연호정이 등을 돌렸다.
그때, 양천이 잔을 들며 말했다.
“선을 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확실하지.”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고 양천을 돌아보았다.
양천이 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선을 잘 타는 사람이야. 이곳에 지내면서, 자네가 선을 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둘째라면 전후(戰後)에 백도를 도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첫째가 먼저 바보짓을 하기는 했지만, 굳이 둘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지.”
양천이 웃으며 연호정을 보았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둘째가 마음에 드네. 지금 상황에서 내 후계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둘째일세.”
“…….”
“하지만 내 후계자가 되면, 지금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질 걸세.”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지요.”
“물론 그렇지.”
“갑니다. 내일 뵙지요.”
“편히 쉬도록 하게.”
그렇게 연호정이 대전을 떠났다.
잔을 든 양천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서늘했다.
“야망과 신념의 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