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강자존(强者存) (5)
엽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그는 당황했다. 설마하니 이곳에 부선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년이 어떻게 알고 여기를?!
“내상이 심하시군요.”
부선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나 기도가 불안정한 오라버니는 처음 뵈어요. 눈도 풀리셨네요? 피를 많이 흘리신 모양이에요.”
엽성은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글쎄요. 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넓고, 습기도 적당히 유지되고, 공기도 잘 통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어요.”
부선이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 속에 흉포한 짐승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라버니만큼 자주 밖을 오가지는 않지만요.”
가만히 부선을 노려보던 엽성이 차갑게 웃었다.
“개소리는 그쯤 해 두거라.”
“어머,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연호정이 알려 주더냐?”
부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그나저나 갑자기 연 부관님 운운하는 걸 보니, 오라버니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연 부관님인가 보죠?”
“연 부관님? 지랄맞은 네년 성격에 그 어인 존대지?”
“제 성격이 지랄맞은 건 맞지만, 적어도 존중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한답니다.”
“그렇겠지. 연호정, 그 씹어 먹을 놈이 달콤한 말로 네년을 꾀었구나. 존중이나 존경은 몰라도, 최소한 고맙기는 하겠군.”
“그건 좀 섭섭한 말씀인데요?”
“그게 아니면? 설마 그놈과 배꼽이라도 맞췄나? 하긴, 네년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부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적은 없지만, 나쁘지는 않죠. 정과 사의 구분을 떼고 보자면, 확실히 연 부관님만 한 남자는 흔치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추잡한 년. 그런 식으로 네 편을 만들곤 했군. 너 같은 년에게 딱 어울리는 방식이다.”
“내 힘이 되어 준다면야 거지의 가랑이 사이도 기어갈 수 있죠.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그게 우리 아닌가요?”
미소 짓던 부선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
“그나저나 자꾸만 눈알이 움직이네요. 왜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세요?”
순간 엽성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설마하니 네년 따위가 무섭겠느냐?”
“목소리가 떨리네요. 불안하신 모양이에요.”
“너처럼 추잡스러운 년이 혼자 왔을 리는 없지. 누구냐? 누구와 함께 왔지?”
부선이 피식 웃었다.
대놓고 비웃는다. 그녀는 엽성의 자존심을 제대로 자극하고 있었다.
“발톱도 송곳니도 죄 빠져 버린 맹수 하나 처리하자고 방수까지 데려올 사람으로 보셨나요? 이거 좀 실망인데요?”
“미친년! 그 자신감이 널 지옥으로 보낼…….”
“오른손은 왜 자꾸 감추시죠?”
우우우웅.
부선의 동공이 적색과 흑색을 오가며 명멸했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군요. 심하게 다치셨나 봐요?”
엽성은 내심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숨기고 있던 걸 곧장 알아차린 것이다.
적어도 안목 날카로운 것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화아아악!
엽성의 몸에서 붉은 진기가 뿜어져 나왔다.
불안정한 기도 위, 사나운 위엄이 요동쳤다. 혈사자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런 승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구나. 덤벼라. 산 채로 가랑이를 찢어 주지.”
“말이 많으시네요. 예전의 오라버니라면 쓸데없는 대화 따위는 건너뛰고 공격부터 감행하셨을 텐데요.”
“……!”
“고작 그 정도냐, 엽성?”
목소리와 호칭이 변했다.
부선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 넘치는 재능으로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면 언제가 되었든 차기 부주로 임명되었을 것을……. 하긴, 너의 그 오만과 어설픈 정치질 덕분에 내게도 이런 기회가 왔구나.”
“너 이년……!”
“너는 항상 강했지. 강해서 이겼어. 하지만 나는 달라.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강해진 것이야.”
치이이이익!
그녀가 밟은 수풀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흑사자기를 제대로 운용하지도 않았는데 퍼져 나오는 열기가 풀을 태우고 있었다. 농도가 굉장한 진기였다.
“재능만 있으면 다 성공할 만큼 만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 그게 너의 한계다.”
“닥쳐라!”
파아아악!
엽성이 부선을 향해 뛰어들었다.
빠른 속도였다. 내상으로 허리를 펴기도 힘들 텐데 이런 속도로 움직인다. 확실히 대단한 기량이었다.
엽성의 왼손이 부선의 목을 노렸다.
그때, 부선의 상체가 전방 사선으로 휘어져 움직였다.
콰드드득!
“크아악!”
엽성의 입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의 우측 팔꿈치 아래가 통째로 뽑혀 나갔기 때문이다.
촤아아악!
재빨리 내력을 운용해 지혈했지만, 그 한순간에 뿜어져 나온 피가 너무 많았다. 엽성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것을 느꼈다.
“영광으로 알도록 해.”
부선이 손을 들었다.
꿈틀거리는 오른팔을 쥔 그녀의 손에는 시커먼 철조(鐵爪)가 장착되어 있었다.
“너 따위 놈에게 선보이기 아까운 무기지만, 역시 생각대로의 위력이구나.”
억지로 진기를 끌어 올려 어지럼증을 가라앉힌 엽성의 눈에도 부선의 철조가 보였다.
은은한 먹빛이 도는 철조였다.
오철(烏鐵)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단단한 철인 듯했다.
“현철(玄鐵)?!”
“정확히는, 현철과 오금을 섞어서 무게를 줄이고 탄력을 살린 물건이지.”
부선이 철조를 움직였다.
키키킹!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짐승의 발톱처럼 날이 선 철조들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오른손에는 철조를 장착하고, 왼손은 주먹을 쥐었다.
그것이 바로 부선의 무(武)였다. 부족한 재능을 알고, 그 이상의 강자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한 그녀만의 무공이었다.
그 형태는 앞으로도 또 바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완성형이었다.
우우우우웅!
철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검붉은 진기가 철조 끝에 일렁이며 더 날카로운 형태를 이루었다.
검으로 치자면 검기(劍氣)와 비슷한 형태였다.
“끝이다, 엽성.”
파아아아앙!
이번에는 부선이 먼저 달려 나갔다.
‘빠르다!’
엽성의 단련된 눈은 부선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놀랐다. 묵룡부 안에서 마주했을 때는 부선이 이 정도로 빠를 줄 몰랐다. 심지어 악력만으로 손목에 금이 가도록 만들지 않았었나.
모든 면에서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약하다. 그것이 엽성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부선이 선보이는 실제 움직임은 달랐다.
파파파파팡!
거리를 좁힘과 동시에 무서운 연환각이 몰아쳤다.
쩌저저정! 퍼억!
엽성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이……!’
엽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통 이전에 자존심이 상했고,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도 놀라움이 컸다.
‘이런 각법이?!’
일타, 일타의 위력은 자신에 비할 수 없다.
하지만 환영처럼 휘어지는 각법이 끊이질 않고 몰아친다.
더 놀라운 건 휘어지는 각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방위에서 올려 치고 내리찍는데, 마치 관절이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엄청난 유연함이었다. 부선은 남성보다 유연한 여성의 신체적 이점을 살려, 일타의 위력에 집착하는 걸 포기하고 유연한 연환격을 살린 것이다.
‘굉장해.’
지독한 분노 이전에, 엽성은 이 각법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로 완성도 높은 각법이라니. 설마 사부가 가르쳐 줬나?’
부선이 스스로 창안했을 리는 없다. 이 각법은, 적어도 초식의 술(術)만 따졌을 때 사자철조(獅子鐵爪)를 상회하고 있었다.
부우우웅!
순간 엽성의 귀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를 불태우며 쏘아지는 무공, 권풍(拳風)이었다.
정면으로 돌진하는 사자의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위력적인 권풍.
‘선풍사자권(旋風獅子拳)!!’
맞받아칠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법이나 보법을 펼칠 수 있는 자세도 아니었다.
결국 엽성은 또다시 옆으로 굴러 굴욕적인 회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선풍사자권의 권풍에 맞은 나무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유연함을 살렸다지만, 무공 자체의 강점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게다가 부선은 흑사자기를 연마한 유일한 제자였다. 엽성과의 내공 격차가 커서 그렇지, 흑사자기는 분명히 혈사자기보다 상위의 신공이었다.
엽성이 예상한 위력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권법. 멀쩡한 상태였다면 힘으로 압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당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엽성.”
푸스스스스.
검붉은 흑사자기가 올올이 풀려 나오며 수풀 곳곳을 불태웠다.
그 불길을 두른 부선이 엽성을 내려다보았다. 형형한 눈빛이 가히 투신(鬪神)의 가호를 받는 여전사 그 자체였다.
“불쌍한 몸놀림이구나.”
“닥쳐!!”
엽성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네년의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화아아아아악!
혈사자기가 폭주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 진기보다도 인간 본연의 살기가 더 지독했다. 찢어진 자존심과 극단적인 분노가 용광로 같은 살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콰앙!
엽성이 돌진했다.
내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전보다 훨씬 느리고 탄력도 없는 몸놀림이지만, 기백만큼은 상처 입은 맹수 그대로였다.
부선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촤아아악! 퍼억!
철조에 베인 엽성의 몸 곳곳에서 피가 튀었다. 그도 모자라 등 부위 근육이 뭉텅 베어져 날아갔다.
쾅!
몸부림치듯 내친 엽성의 각법은 부선의 왼손 방어를 뚫지 못했다.
‘역시 강해.’
방어에 성공했지만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전해진다.
본래 전력의 절반도 내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이만한 위력의 무공을 구현한다. 부선은 새삼 엽성이 이룬 경지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빠각!
“컥!”
각법에는 각법이다. 좌수 방어로 각력을 털어 낸 부선이 몸을 회전하며 엽성의 어깨를 오른발로 내리찍어 버렸다.
엽성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좌측 어깨가 움푹 꺼져 내려왔다. 탈골되어 버린 것이다.
오른팔은 상완 아래쪽이 통째로 날아갔고, 왼팔 어깨는 탈골되어 쑥 빠져 버렸다.
내상은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며, 과다 출혈로 제정신이 아니다.
승부가 끝났다.
부선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마지막 일격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쾅!
대지에서 받은 힘을 하반신 전체로 끌어 올려 두 배의 속도를 뽑아냈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부선이 엽성의 가슴을 향해 철조를 뻗었다. 그대로 흉골을 부숴 심장을 뚫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번쩍!
엽성의 몸이 불가사의한 움직임을 보이며 후방으로 물러났다.
부선은 깜짝 놀랐다.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몸놀림으로 도주해 버린 것이다.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었구나.’
그 속도도 빨랐다.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을 정도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었군.’
도주를 위해서 더 큰 피해를 감수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수였다. 어차피 이대로 싸워 봤자 죽을 게 뻔하니, 치욕을 감수하고 도주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역시 짐승이군.”
부선이 웃으며 말했다.
“쫓아들 가세요. 잡아 와서 나에게 충성을 증명하세요.”
파바바바박!
부선의 뒤쪽 수풀에서 네다섯 명의 고수들이 튀어나와 엽성을 쫓았다. 그들 모두 엽성에게 회유당했던 묵룡부의 간부들이었다.
고작 말 몇 마디와 뇌물 정도에 흔들렸던 사람들은 언제든 주인을 배신할 수 있다. 결국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오직 강해지는 것만이 투왕에게 인정받는 방법이다. 엽성은 연호정의 말을 흘려들어선 안 되었다.
물론, 그래도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