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강자존(强者存) (4)
“부주님.”
“음?”
막원과 술잔을 나누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가?”
별일이 아니면 오늘은 더 이상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특히 오랜 세월 자신을 모신 백서라면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도 왔다.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처리하기 난감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백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을 보낸 것이다.
잠시 후,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그랬구먼.”
“어떻게 할까요?”
“놔두게.”
백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네. 오히려 자네가 왜 그리 걱정하는지가 더 의문인데?”
“우리 측이 아닌 사람이 연관되어 있어서…….”
우리 측이 아닌 사람. 즉 연호정을 뜻하는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선을 기가 막히게 타는 놈이야. 만에 하나 선을 넘어도 그만한 이유가 있지.”
“그런…….”
양천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뭐, 솔직히 놈이 실수로 선을 넘었으면 좋기도 하겠어. 그걸 빌미로 머리통이나 몇 대 때려 주면, 그것도 꽤 통쾌한 일이 아니겠나?”
장난스러운 말이지만 백서는 양천의 진심을 느꼈다.
달리 말하자면, 연호정이 절대 선을 넘지 않을 거라 믿는 것이다. 굉장한 신뢰였다.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아무런 대응 없이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나서면 쓰나.”
백서가 나가자 막원이 물었다.
“연 부관이 사고라도 쳤소?”
“자네 눈치가 정말 괜찮군. 연호정 그 녀석이 얽힌 일이란 걸 바로 알아챘구만.”
“우리 측이 아닌 사람이라 하지 않았소. 하면 연 부관뿐이지.”
“그놈이 데리고 온 놈들일 수도 있잖나?”
“부주께서 그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이 연 부관 말고 또 있을 것 같진 않소.”
양천이 피식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가만히 양천을 보던 막원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뭐가 되었든 묵룡부의 일이었다. 사사건건 캐묻고 싶진 않았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양천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자네는 제자가 있나?”
막원이 쓰게 웃었다.
“몇 수 가르쳐 본 녀석들이 있기야 한데, 제자라고 할 건 아니오. 내공이나 무도가의 정신을 가르쳐 준 건 아니니까.”
“그렇구먼.”
이번에는 양천이 막원의 잔을 채워 주었다.
“요새 들어서 말이야, 내 방식을 돌아보고 있다네.”
“……?”
“나는 제자를 애정으로 키우지 않거든. 쓸 만한 재능을 가진 놈들을 추려서 받았지만, 그중 칠 할 이상이 엇나가 버렸네. 심지어 무공 욕심에 주화입마에 빠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지.”
막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제자를 애정으로 키우지 않소?”
“그게 내 방식이었네. 지금도 바꾸고 싶진 않지만, 문제가 있긴 있어 보여.”
무공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지켜본다.
나아가 일을 시키고, 세상에 보내 본다. 그로써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결과를 지켜본다.
방목형이라고 해야 할까. 될 놈은 거두지만 엇나가는 놈은 내친다.
그렇게 가르치고 지켜봤던 제자 중 멀쩡한 놈은 셋이 남았다. 그것이 엽성, 부선 그리고 전홍이었다.
“그러다가 셋째는 강량이라는 놈과 싸우다가 팔 하나를 잃었지. 검사든 권법가든, 무인이 팔 하나를 잃은 건 치명적이지.”
“…….”
“하지만 생각했네. 오히려 잘됐다고. 셋째는 다 좋은데 너무 오만하거든. 사실상 내 눈 밖에 난 지 오래지만, 그 재능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봐도 좋네.”
“아무리 오만한 제자라도, 팔 하나를 잃었다면 응당 위로해 줘야 맞지 않소?”
“위로? 그게 뭔가? 먹는 건가?”
“…….”
“무림사(武林史)에 독안(獨眼), 독비(獨臂)의 고수는 많았네. 심지어 한쪽 다리에 의족을 매어 활동하던 절대고수도 있었지. 독각신마(獨脚神魔)라고 알지?”
“백 년 전의 절대고수 아니오?”
“그렇다네. 독각신마는 나이 서른에 다리 하나를 잃었어. 살아남은 게 천운이지만, 무림인에게 진짜 무서운 건 그다음일세. 그에게 원한을 가진 온갖 놈들이 승냥이 떼처럼 덤벼들었다고 했네.”
“참으로 비겁한 일이오.”
“비겁? 그게 왜 비겁한가? 약하면 잡아먹히는 거야. 그건 당연한 이치지.”
“우리는 짐승이 아니잖소?”
“짐승이라는 걸 인정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일세. 세상을 아는 이들은 다들 자신이 못났다는 걸 인정하지.”
“…….”
“팔을 잃은 것보다 더 치명적인 건 눈을 잃은 거야. 눈을 잃은 것보다 더 치명적인 건 다리를 잃은 걸세. 적어도 무림인에게는 그래.”
양천이 잔을 비웠다.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팔 하나를 잃어서 나 자신의 오만과 잘못된 과거를 짚어 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천 마디의 가르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네.”
“무서운 스승이구려.”
“하지만 셋째는 그러지 않았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네. 자신이 왜 졌는지도 돌아보지 않았어. 그저 제 팔을 자른 놈을 증오하고 또 증오하기에만 바쁘지.”
“누구라도 그럴 만하오.”
“그래서 셋째를 무관심하게 대하고 있는 걸세. 투왕의 제자는 아무나 될 수 없거든.”
“그럴듯하오.”
“연호정, 그놈이 동생 삼은 녀석이 강량이란 놈일세. 그리고 그놈의 사문을 무너트린 건 나야. 나는 그걸 알고도 녀석을 묵룡부에 들였고, 녀석 역시 나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얌전히 수련에 매진하고 있네.”
막원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원수의 집단에 태연히 들어와 수련하고 있는 강량도 그렇고, 그걸 다 알고 있음에도 건드리지 않는 양천도 그렇고.
정말이지 흑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이걸 배포들이 크다고 해야 할지, 둘 다 미쳤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셋째는 내쳤다고 치고, 그럼 첫째와 둘째가 남지. 둘째는 독하게 노력해 내 인정을 받았네. 하지만 첫째는 아직 아니야.”
“연 부관과 관련된 제자분이 첫째요?”
“글쎄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쩌면 모두와 얽혔을지도 모르지.”
“음?”
“뭐가 되었든, 연호정 그놈 때문에 온갖 일이 터질 줄은 알고 있었네.”
“위험한 것 아니오? 훌륭한 인재라고는 하나 연 부관은 무림맹 사람이오. 맹부 간의 동맹 증인이라 한들, 그가 묵룡부에서 사고를 친다면 부주께서도 그냥 있기는 힘들지 않소?”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지.”
양천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녀석 덕분에 본부가 한결 깔끔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야.”
“……뭔가 있구려?”
“본부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연합체일세.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문제가 산재해 있네.”
“연 부관이 그걸 정리해 줄 수 있다?”
“적어도 뭐가 문제인지 본부의 수뇌부들에게 자각시켜 줄 수는 있겠지.”
막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하지 않소?”
“뭐가?”
“부주의 존재감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소만…… 연 부관이 날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아래에서 불만이 올라오지 않겠소?”
양천은 선뜻 인정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감수하겠다는 것이오?”
“감수? 미안하지만 난 그런 걸 감수할 만큼 자비 넘치는 사람이 아닐세.”
“하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다 잡아 족칠 뿐이지.”
“……!!”
“나는 야망이 큰 사람이야. 하지만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전쟁에서 이겨야 해.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려면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수하들이 필요하지. 몸뚱이만 큰 조직은 허점도 많을 뿐이야.”
양천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거칠지만, 그만한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있지.”
막원은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묵룡부는 부주의 절대 권력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괴물이다.
하지만 신생이었고, 문제가 많았다.
양천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연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가 연호정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양천의 일 처리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나와 따지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때, 양천은 불만 세력을 하나로 모아 모조리 묻어 버릴 것이다.
세(勢)는 조금 줄어들지 몰라도, 더 강력하고 더 뾰족하고 더 충성도 높은 조직을 만드는 흑도만의 방법.
지독하게 위험하면서도, 참으로 흑도다운 운영 방법이었다.
“그나저나,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
양천이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퍽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첫째가 둘째와 셋째의 자존심을 어지간히 긁었던 모양인데…… 첫째가 그 지경이 되었다는 걸 알면, 그 두 녀석은 과연 힘을 합칠까?”
* * *
“허억! 허억!”
엽성은 묵룡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묵룡부에는 실력 좋은 의원들이 많았다. 엽성이 입은 내외상은 열흘 안에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이 묵룡부 안에 퍼지는 것, 그 자체가 문제였다. 자존심을 떠나서, 명성에 흠집이 나면 그간 자신에게 줄을 댄 사람들에게 믿음을 잃는다.
결국 그런 것이다. 뒷골목 삼류 파락호들도 제 아픈 모습을 수하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엽성 역시 다친 제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크기만 다를 뿐, 흑도의 세상은 그렇게나 비슷한 것이다.
“쿨럭!”
묵룡부 본부의 입구를 빙 돌아 또 다른 숲으로 들어온 엽성은 연신 피를 토했다.
“이런……!”
오면서도 몇 번씩 피를 토했다. 그때 토한 피는 전부 시뻘건 선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닥에 고인 검붉은 핏물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내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심한 내상이었는데, 무리해서 몸을 움직이니 엄청난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으윽!”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나무에 등을 기댄 엽성은 혈사자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난폭한 진기가 오장육부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혈사자기는 천고의 신공이며, 요상에도 좋았다. 하지만 진기 자체가 워낙 거칠어서 자체 요상을 할 때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고통. 얼마 만에 이런 아픔을 겪는 것일까.
‘빌어먹을.’
우두둑! 우두두둑!
부러진 오른손의 뼈를 진기로 하나하나 맞췄다.
고통이 말도 못 했다. 상승의 경지에 올라 진기로 근골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범부가 이런 상처를 입었다면 오른손이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고통이 극심했지만 심해지던 내상이 더 악화되지 않게 잡았고, 으스러진 오른손의 뼈를 본래대로 맞춰 경화시켰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개자식!”
엽성은 살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감히 나를 건드려? 너는 실수한 거야, 연호정.”
연호정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도 내려놓을 때였다.
지금껏 자신에게 피해를 준 놈을 그냥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보다 강한 놈들도 모두 복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일단 몸부터 수습해야겠군.”
이 꼴로 부에 들어갈 순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티가 안 날 정도의 치료는 해야 했다.
‘분명 동남쪽으로 삼십 리를 더 가면…….’
그때였다.
‘……?!’
엽성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사박사박.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한 사람.
부선이 거기에 있었다.
“어머, 오라버니.”
부선이 싱긋 웃었다.
“많이 다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