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백병의 신안(神眼) (6)
“헛! 형님?”
“연 대수님.”
강량과 정안이 웃으며 연호정을 맞았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 잘 다녀오긴 했는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전쟁 났냐? 너희 꼬락서니가 왜 그래?”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강량의 몰골은 거의 개방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들만큼 때가 탄 건 아니었지만, 옷이 거의 걸레가 되었고 몸 여기저기에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정안의 꼴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대체 얼마나 사나운 검격을 주고받았는지, 강량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량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정안 소저랑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거든요.”
“잠은 안 잤냐? 쉬지도 않고?”
“시간 아깝잖습니까. 여기서 자고, 여기서 먹고, 여기서 싸웠습니다.”
연호정이 정안을 바라보았다.
정안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정안에게선 이전에 풍기던 불문 특유의 깊고 담담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 자루의 날 선 검이 된 것 같다. 보타의 검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저도…….”
“그러다 너희 사귀겠다.”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아닙니다!”
“아니거든요!”
기다렸다는 듯 외치고 나니 묘한 침묵이 어렸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사귀든 죽이든 너희 맘대로 하고, 일단…….”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알았다고, 인마. 그런데 너 왜 아직 그 상태야?”
“예?”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요? 제가 뭘요?”
“너…….”
말을 하려던 연호정은 문득 정안을 바라보았다.
정안이 입맛을 다셨다. 연호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 역시 알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를 읽은 건지, 강량의 얼굴이 다소 심각해졌다.
“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없다.”
연호정이 강량의 어깨를 두들겼다.
“싸움박질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까, 이만 들어가서 씻고 쉬어라.”
“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말 들어, 인마. 조만간 다시 나가야 해. 그때는 널 데리고 갈 테니까 몸조리 제대로 해라.”
강량의 눈이 빛났다.
“벌써 임무가 떨어졌습니까?”
“내가 준비되는 대로 나가는 임무다. 시간 길게 끌 수는 없으니까, 하루빨리 만전의 상태로 만들어라.”
“예, 알겠습니다.”
강량이 정안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소저. 많이 배웠어요.”
정안 역시 고개를 숙였다. 기질은 바뀌었지만, 합장으로 인사하는 걸 보니 평생 몸에 밴 습관은 여전한 것 같았다.
“저야말로 큰 공부가 되었어요.”
“그럼.”
강량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연호정이 정안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야?”
“네?”
“저놈한테 칼질 허용한 게 언제부터냐고.”
정안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열흘 전부터요.”
굉장한 일이었다.
비록 아직 미숙하다고는 하나 정안은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였다. 구파의 장문인급에 비하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서른에 근접한 나이로 쟁취할 만한 경지는 아닌 것이다.
반면 강량은 어떤가.
강량은 무종지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 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 하나의 벽을 넘기 전과 후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었다.
말하자면 살아가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벽을 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벽을 넘는 순간 훤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지는 순간.
그것은 무공의 성취 이전에 인간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지간히 큰 변수가 따르지 않는 이상, 벽을 넘지 못한 고수는 초절정고수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다.
그런데도 정안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일부러 맞아 준 상처가 아니었다. 개중에는 조금만 더 깊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만한 상처도 있었다.
제아무리 봐주면서 겨룬다 한들 저런 상처를 용인하진 않는다. 그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였다.
“열흘 전이라…….”
즉, 강량은 무종의 벽을 넘지 못했음에도 초절정고수인 정안의 육신에 이 정도 타격을 준 것이다.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초절정고수를 상대로 이 정도로 분전했다? 벽을 넘지도 못했으면서?”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놈, 무종지벽을 넘어서는 순간 완전히 괴물로 탈바꿈하겠군.”
사방이 막힌 곳에서 벽 너머의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호정도 전생의 감각과 경험, 깨달음이 있었기에 몇 수 위의 고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강량처럼 전생을 겪지도 않은 청년 고수가 이런 결과를 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거의 다 얻은 것이다.’
연호정이 정안을 바라보았다.
‘정안처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벽을 통과하는 게 아니야. 절정고수의 수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무리(武理)를 거의 다 얻은 것이야.’
똑같이 무종지벽 직전이라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누구는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더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않고 벽을 넘기도 하며, 누군가는 수십 년을 그 자리에 맴돌다가 벽을 넘기도 한다.
강량은 그리 오랜 시간 그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음에도, 절정고수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깨달음을 얻었다.
반면 정안은 얻을 수 있되,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배제하고 빠르게 무종의 벽을 뚫었다.
그 차이가, 벽을 넘은 자와 넘지 않은 자의 간극을 극단적으로 좁혀 버렸다. 그래서 강량의 검에 정안이 당한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더라고요. 하루가 지나면 보는 눈이 바뀌고, 또 하루가 지나면 듣지 못했던 걸 들었어요.”
“그랬냐.”
정안이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사람이에요. 싸우면 싸울수록, 피를 보면 볼수록 강해져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저 녀석도 흑도니까. 그것도 흑도 명문 귀족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패왕의 씨앗이거든.”
정안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부럽네요. 저런 재능이 있다는 게.”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네 재능도 보통 재능이 아니야. 그 연배에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몇 안 돼.”
“그럼 이번 세대에 유독 괴물들이 많은가 봐요. 당장 연 대수님도…….”
“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무재(武才)에 있어선 지극히 평범한 놈이지.”
“위로예요?”
“진짜다. 나는 무재가 없어.”
정안은 당황했다.
“무재가 없는데 어찌 그 나이에 그런…….”
“무림인들의 고질적인 문제지. 무재 없이도 강해지는 방법이 많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
물론 연호정은 극한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훨씬 이른 나이에 무극의 경지를 돌파하고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로 명성을 날렸다.
본능적으로 약점을 찾는 능력? 그것은 싸움의 재능은 될 수 있어도, 무공 그 자체를 빠르게 연성할 수 있는 재능은 아니다.
“그나저나 넌 어쩔 거야? 너도 같이 갈래?”
“네? 저, 저요?!”
“그래.”
정안은 당황했다.
“저 같은 초짜를 데려갈 이유가 없잖아요?”
“당연하지.”
“…….”
“하지만 나도, 강량도, 그리고 묵룡부주도 초짜였던 시절은 있었어. 한 번의 경험으로 그 탈을 벗어 버렸을 뿐이지.”
“……!”
정안은 충격을 받았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함께 갈 마음이 있다면 너도 몸을 좀 추슬러야 할 거야. 네가 어떤 길을 선택했든, 너 역시 우리와 함께한다면 무조건 삼교와 싸울 수밖에 없어.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너 자신의 능력을 가꾸도록 해.”
* * *
“경치 좋지?”
양천과 막원은 지하 동굴에서 벗어나 드높은 협곡에 올랐다.
“좋구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막원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이곳의 경치는 좋았다.
양천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단체를 운영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군.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어. 어울리지 않게 갑갑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이곳에 와서 바람을 맞곤 했지. 한두 시진 맞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싹 사라지더라고.”
“그럴 만한 경관이오.”
“사람 보는 눈이 다 비슷비슷해. 자네도 좋아할 줄 알았네.”
껄껄껄 웃던 양천이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건넸다.
“한잔하겠는가?”
“좋소.”
막원은 기다렸다는 듯 술병을 받아 마개를 땄다. 그러곤 꿀꺽꿀꺽 마셨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호쾌하게도 마시는군.”
“좋은 술이구려.”
“좋은 술이기는 한데, 자네는 의심도 안 하나? 내가 거기에 독을 탔으면 어쩌려고?”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분이 아니잖소.”
“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말게. 필요하다면 독도 타고 암기도 날리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잘 마셨소. 받으시오.”
양천이 웃으며 병을 받아 마셨다.
술을 시원하게 넘긴 양천이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누구한테 당했나? 그 독.”
막원의 눈이 빛났다.
“알고 계셨소?”
양천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네. 독특하고 날카로우며 풍성했지. 하지만 뭐랄까…… 조금 부족하더군.”
“부족?”
“삼군의 일인, 백병신군이라 불리는 사람의 기도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면이 있었어. 충분히 대단한 실력이지만,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신경 써서 들여다보니, 진기로 무언가를 단단히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네.”
양천이 술병을 허리춤에 찼다.
“독이겠지. 자네의 능력으로도 처리할 수 없는 극독.”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와 신선제왕 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생각했소.”
“크지 않네. 과장 조금 보태면 종이 한 장 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아름드리나무만큼이나 두꺼운 종이인가 보오.”
“누군가에게는 태산만큼의 두께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종이 한 장의 두께일 수도 있지. 자네도 알잖은가?”
막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어디서 당했나?”
“어디서 당했냐는 질문에는 답을 드릴 수 없소. 솔직히 나도 언제, 어디서 당했는지 잘 모르니까.”
“……그런가.”
“다만, 이 독을 다루는 집단은 알고 있소.”
“…….”
“신화교요.”
“신화교…… 역시 삼교로군.”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한순간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그 역시 사음교주의 독에 당해 몸이 축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연호정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오면서 연 부관이 뭐라 안 하던가?”
“무슨?”
“연 부관은 삼교에 관해 잘 알고 있거든. 자네가 당한 그 독이 삼교에서 나온 거라면, 어쩌면 연 부관이 치료법을 알 수도 있을 거야.”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따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소.”
“그래? 그렇다면 둘 중 하나로 해석을 할 수 있겠군.”
“……?”
“연 부관도 그 독의 정체와 해독법을 모르든지, 아니면…….”
차갑던 양천의 얼굴이 이제는 무심하게 변했다.
그 표정 변화를 보며, 막원은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양천은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을.
“지금의 자네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
“……!”
“자네의 과거에 관한 얘기, 연 부관에게 한 적 있나?”
“없소.”
“그럼 후자로군.”
“연 부관이 나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자네가 암묵적인 거래의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지.”
“그게 무슨……?”
“창왕 소현립.”
“……!!”
막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양천이 다시 광활한 협곡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장사치가 장부를 꺼냈는데, 자네는 끝까지 무인으로서 남았군. 그 장부를 봤으면, 자네 장부도 까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