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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28화 (527/963)

528화. 백병의 신안(神眼) (3)

막원은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이 당황했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정말 당돌한 청년이다.’

그의 인생은 수행의 나날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홀로 무공을 연마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나이쯤 되면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 법이었다. 특히 막원은 무공 수련에 주로 힘을 쏟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도 많이 했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을 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본 어떤 청년도, 아니 어떤 사람도 연호정만큼 독특하고 파격적이지 않았다.

“그 말은, 여기 점창 장로분의 무공 연성에 도움을 달라는 것이오?”

“안 됩니까?”

그렇게 툭 던지듯 되물으니 막원도 입이 탁 막히는 걸 느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듣기로, 막원 대협 역시 세상을 위할 줄 아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과찬이오.”

“여기 패율 선배는 전투광입니다. 강자와의 싸움에 인생을 건 사람이지요. 그러나 눈앞에 즐거운 싸움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사람부터 돕는 의인입니다.”

패율이 토악질하는 시늉을 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점창 모두가 그런 사람들 소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선배의 무공을 봐줘서 나쁠 건 없다는 겁니다.”

막원은 잠자코 연호정의 말을 들었다.

사실, 패율에 대해서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안 본 사람이지만, 그간 본 언행만으로도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막원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자야말로 대협이라 할 만하지. 그런 사람의 무공 성장에 한 손 거들 수 있다면, 나 또한 영광일 것이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반면 패율은 당황했다.

자신에 대한 고평가도 그렇지만, 너무 쉽게 무공을 봐준다고 한다. 정말이지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

“다만.”

막원이 눈을 빛냈다.

“한바탕 땀을 흘리기에 앞서, 의문을 좀 풀고 싶소.”

“의문이요?”

“우리는 낮에 많은 대화를 나누었소. 내가 왜 신화교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당신들이 어찌 그리 빨리 나를 도우러 올 수 있었는지.”

“그랬지요.”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소이다. 그 의문부터 풀고 싶소.”

까놓고 말해서 아직 당신들을 완전히 믿긴 힘들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리라.

연호정과 패율은 막원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나 물읍시다.”

막원이 눈을 빛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이자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 무림 육대세가의 일원인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 어찌 묵룡부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오?”

연호정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확실하게 얘기해 줘야 할 거요. 굳이 여기, 패율 장로의 무공을 봐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정파와 사파는 오랜 세월 서로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지내 왔소. 몇 번은 상대를 완전히 무너트리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

“…….”

“정사의 골은 엄청나게 깊소. 한데 정파 연합의 높으신 분께서, 흑도 연합의 수뇌부 비슷한 직책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막원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무림맹을 배신한 것이오? 아니면 묵룡부에 세작으로 파견된 것이오?”

묘한 질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무림맹을 배신한 것이냐는 물음으로 끝나야 옳다. 적어도 막원의 상황에서는 그러했고, 그의 성격을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묵룡부에 세작으로 파견된 것이냐고까지 물었다. 목소리의 미묘한 떨림을 보면, 오히려 후자일 경우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무림맹을 배신한 것도, 묵룡부에 세작으로 온 것도 아닙니다.”

“하면?”

“무림맹과 묵룡부가 일시적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림맹을 대표하여 묵룡부에 파견을 온 것입니다.”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말했듯, 정사의 골은 깊소. 그건 오히려 당신네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두 집단이 손을 잡았느냐, 이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미 알고 계시는 듯한데.”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소. 또한, 무림맹은 몰라도 묵룡부의 경우 제아무리 공동의 적이 있다 한들 본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쉽게 손을 잡을 세력이 아니잖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대협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저희는 삼교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쉽지 않소. 그건 정말 쉽지 않아.”

“과정을 아셔야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럼 대협께서도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지금 제 말을 들으면, 막원 대협은 무림맹이나 묵룡부 소속으로 삼교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

“대협을 설득할 방법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만에 하나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재 보고 싶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당신네들에게 있어 기밀을 말해 주겠다는 뜻이구려.”

“그렇습니다.”

우우우웅.

마음이 일자 저절로 신단이 반응했다.

연가신단이 가볍게 회전하며 사신기를 자극했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사색의 진기가 하나로 합쳐지며 연호정을 위엄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막원은 새삼 감탄했다.

‘대체 어떤 무공을 연성한 것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정말 강해. 무공도 대단하지만, 사람 자체가 강하다. 사람과 무공, 서로 잘 어울리는 대상을 만난 것 같다.’

연호정이 말했다.

“제 말의 무게를, 충분히 느끼시길 바랍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막원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정보를 듣고 내빼면 날 죽이려 들겠구려.”

“그렇습니다.”

서슴없이 나오는 발언이었다.

그것이 가능한지를 떠나 당연히 그러지 않겠냐는 패기가 더 돋보였다.

막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대답을 듣긴 들어야겠소만, 연 부관의 말씀은 참으로 감당키 힘들구려.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지금, 당신들 힘으로는 나를 감당할 수 없소.”

“압니다.”

“알고도 그런 말을 하시오?”

“압니다만, 적어도 우리 모두의 목숨을 갈아 넣는다면 대협의 목숨도 날릴 수 있을 겁니다.”

“확신하시오?”

“물론입니다.”

연호정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대협의 약점을 파고들 생각이거든요. 적어도 제 눈에, 대협의 약점이 일곱 개는 보였습니다.”

그냥 넘기기 힘든 말이었다. 무인으로서 그러했다.

“약점이라…… 내, 자만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사람보다 하수인 연 부관께서 내 약점을 알고 있다는 말은 선뜻 믿기 힘드오.”

“믿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알면 되지요.”

“…….”

“아닌 말로, 그 약점 중 하나만 제대로 먹혀도 그만입니다. 우리 모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단 하나의 약점으로 삼군의 일인을 잡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죽음이겠지요.”

진심이군.

막원은 연호정의 목소리에서 거짓의 향기를 느낄 수 없었다.

‘정말일까?’

이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면 정말로 싸워 봐야 한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대협이 하등 쓸모도 없는 자존심으로 편을 바꾸거나, 기분이 나쁘다 하여 조직을 이탈할 만큼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더 이상 저희를 자극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이거든요. 자극은 도리어 대협 스스로에게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막원은 이내 피식 웃고야 말았다.

“연 부관의 심장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따름이오.”

“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장작만 준비되면 활활 타오르지요.”

쿵.

연호정이 장창을 땅에 찍었다.

“확실하게 답을 주십시오. 우리 말을 들어도, 배신하지 않으실 겁니까?”

“내 말에 의미가 있소? 말로만 하는 거래, 믿음이 없을 텐데?”

“믿고 안 믿고는 저희 안목이고, 선택입니다. 그 부분은 대협께서 걱정하실 게 아닙니다.”

막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오. 하물며 생명의 은인이거늘.”

“그렇습니까?”

“다른 걸 떠나서, 항상 생각하고 있었소. 또 다른 성천의 강자를 만나고 싶다고.”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묵룡부주를 만나러 갈 것이오. 내 믿음을 증명할 말은 그것뿐이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충분합니다.”

“이제 말해 주시오. 무림맹과 묵룡부가 어찌 손을 잡게 되었는지, 대체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도.”

물끄러미 막원을 보던 연호정은 비로소 입을 뗐다.

“시작은 대별산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연호정은 그간 자신이 겪었던, 무림맹이 겪었던, 그리고 묵룡부주 양천을 상대로 도박을 감행했던 모든 일을 알려 주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말엔 핵심이 잘 담겨 있었다.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았고, 한 길로 새지도 않았다. 상대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잘 전달되는 언변이었다.

연호정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막원의 눈은 점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로 인하여, 무림맹과 묵룡부는 일시적 동맹을 맺게 된 것입니다.”

“…….”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막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었구나.’

대륙은 넓다. 대륙인 중엔 평생 다른 지역의 공기를 맡아 보지 못하고 한 지역에서 나고 죽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말하자면 지역 하나가 소국(小國)과도 같다. 바로 옆 지방에서 무슨 일이 터졌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막원은 자신이 그런 흔한 범부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무림맹이 그간 그런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지, 묵룡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계속 터지고 있었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그랬구려. 그랬어.”

막원이 탄식했다.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해 무공을 연마한다…… 나는 정말 속 편한 인생을 살고 있었소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만한 힘을 가진 분이 지금이라도 함께 싸워 주신다니 다행이지요.”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제 대협은 어디 못 가십니다. 우리 거라고요.”

막원이 입맛을 다셨다.

“틀린 말은 아닌데, 표현이 참 그렇소.”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저런 놈이오. 이해하시구려.”

“허허.”

“그리고, 굳이 선배께서 이 사람을 도우실 필요는 없소. 도와준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선배는 선배의 몸부터 챙기시오. 아직 독도 빼내지 못했잖소?”

분명하게 선배라고 칭하는 순간이었다. 패율 역시 마음속으로는 백병신군이라는 고수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원이 헛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산다라…….”

가만히 달빛을 보던 막원이 일순 어깨를 빙빙 돌렸다.

“타점에서의 폭발력이 너무 강하오.”

“음?”

“나를 선배라고 불렀으니, 나 역시 자네를 후배라고 생각하겠네.”

“좋을 대로 하시오.”

“자, 보게.”

막원은 연호정의 창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본디 창술에서의 타점 공략은 반 전사와 무게 이동만으로도…….”

달빛 좋은 밤, 막원의 강의가 시작됐다.

그 강의는 날이 새도 끝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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