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27화 (526/963)

527화. 백병의 신안(神眼) (2)

번쩍!

막원의 눈이 뜨였다.

“일어나셨소?”

가장 처음 그를 맞아 준 건 패율이었다. 옆에서 호법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이전의 인적 없는 숲이 아니었다. 같은 숲이었지만, 공기가 타들어 가는 듯한 특유의 냄새와 살기가 없었다.

저 멀리 고풍스러운 건물도 있었다. 이 층의 높지 않은 건물이지만, 주변이 워낙 고요하고 풍경도 좋았다.

“정신을 완전히 잃으셨소. 깨우려 했는데, 진기가 계속 움직이고 있길래 부득불 눕힌 채로 옮겼소이다.”

“……그랬구려.”

막원은 놀라지 않았다.

체내에 자리 잡은 독기는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 독기를 제거하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천무신병기는 천고의 신공답게 홀로 움직여 독기를 제어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으로 모실까 했지만, 한 번씩 독기가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소. 정체 모를 독인지라 따로 야외에 자리를 만들었소이다.”

“명민하신 판단이었소.”

“내가 아니라 단주의 판단이었소이다. 뭐가 되었든, 정신이 깨었으니 됐소.”

패율의 말투는 다소 딱딱했다.

하지만 막원은 알고 있었다. 패율이 나쁜 사람이 아님을.

점창의 무사라서가 아니었다. 패율은 인간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건 말 몇 마디만 섞어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름의 원칙과 신념을 갖고 있다. 막원은 그리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청년은?”

“연호정 말이오?”

“그렇소. 연호정.”

천하제일 후기지수.

막원은 속으로 그 칭호를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후기지수의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연호정은 후기지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진짜배기 강자였더랬다.

패율이 턱으로 숲 입구 방향을 가리켰다.

“조만간 올 거요. 일 처리 좀 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일 처리?”

“오면 그놈에게 들으시오. 그나저나, 뭣 좀 드셔야 하지 않겠소?”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오.”

패율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솔직해서 좋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잠시 후, 패율이 큼직한 보따리와 수통을 들고 다가왔다.

혼자 오지는 않았다. 그의 옆에는 붉은색 장창을 든 황석태가 따라붙어 있었다. 갑주는 찼지만, 투구는 벗었다.

막원이 포권을 취했다.

“인사가 늦었소. 생명의 빚을 졌소이다. 감사하다는 말만으론 갚기 힘든 빚이오.”

황석태는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상부의 명령을 받아서 온 길입니다. 인사는 제가 아니라 제 주군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철기단은 그를 데리고 도주만 했지,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어 도움을 준 사람은 연호정과 패율이었다.

황석태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에는 막원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사정도 길었다.

“편안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우선 허기를 달래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건물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소. 이 독은 나조차 어찌할 수 없는 맹독이오. 혹시라도 새어 나가면,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줄 수도 있소.”

“그렇다고 계속 야외에 계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물렁한 침상보다는 딱딱한 땅바닥이 좋소이다. 거의 평생을 그리 살았소. 내 걱정은 안 하셔도 되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적어도 당장은 괜찮은 게 분명했다.

패율이 보따리를 풀며 말했다.

“일단 자시오. 흡수가 빠른 약식이외다.”

“고맙소.”

막원은 앉은 자리에서 게 눈 감추듯 음식을 해치웠다. 옆에서 사람이 보고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것이리라.

일각 후, 막원은 모든 음식을 먹어 치웠다.

패율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식성도 좋으시오.”

혹시나 해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가져왔더랬다. 장정 서너 명이 배부르게 먹을 양이었다.

그걸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고수는 확실히 위장도 다르다.

“배가 무척 고팠소. 민망하구려.”

“잘 드시는 걸 보니 금방 낫겠소. 다행이오.”

황석태가 은근히 패율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래도 무림의 대선배이자 최강자라는 삼군의 일인인데, 너무 예의가 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런 부분에서 묘하게 무신경한 패율은 황석태의 눈짓이 뜻하는 바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도 무시했겠지만.

“이건 내가 가져갈 테니 쉬고 계시오.”

패율이 빈 그릇을 가져가자 황석태가 말했다.

“성격이 워낙 별난 인간입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황석태의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막원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기분이 상할 게 뭐가 있겠소? 오히려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거늘.”

“말씀드렸듯, 저희는 임무를 받은 몸입니다. 게다가 삼군의 일인을 호위하는 일입니다. 영광이지요.”

창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성천의 강자 중 누굴 가장 만나고 싶냐 묻는다면 단연 창왕 소현립일 것이다.

하지만 백병신군 막원도 그에 못지않게 만나고 싶은 고수였다. 온갖 병기를 다루는 병기술의 제왕이기도 했고, 와중에 곤봉술과 창술을 주력으로 사용한다는 사람이 막원이었다.

황석태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이룬 무력과 명성만으로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특히 창술을 배운 무인으로서 막원은 이상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너무 그렇게 치켜세워 줄 것 없소. 그나저나, 돌아가는 상황을 좀 듣고 싶소만.”

그때, 숲의 입구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우리가 막 대협께 먼저 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원은 놀라지 않았다. 황석태와는 달리.

“오셨소?”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무림맹 의정군 대수이자 묵룡부의 특임 부관,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 연호정입니다.”

막원의 얼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굳이 정파와 사파로 나누자면, 막원은 명백히 정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따로 문파를 창설한 적은 없지만, 그의 행보 자체가 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그 역시 흑도 사파를 어느 정도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본 흑도 무리는 죄다 약자를 괴롭히는 악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원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무림맹과 묵룡부, 양측의 직책을 모두 갖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막원은 깊은 담소를 나눠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럽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얘기를 나눠 봅시다.”

* * *

그날 밤.

“후우우.”

시원하게 땀을 흘린 패율이 숨을 골랐다.

한옆에 서서 패율의 수련을 지켜보던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엉?”

“몸 괜찮으시냐고요. 내외상도 있고, 내력도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워낙 호쾌하게 물리치긴 했지만, 이번 싸움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암살자들의 실력은 능히 일류라 할 만했고, 신화교의 무공을 연성한 관부 측의 대인진법은 끈끈하고 촘촘했다. 익숙한 무림의 싸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수도 워낙 많았다. 연호정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이 정도 피해만으로 생환한 패율의 실력도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패율이 단창을 젓가락처럼 휘휘 돌리며 말했다.

“또 한 번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련한 거다. 무림에서의 싸움은 언제나 손해를 보고 하는 싸움이지. 완벽한 몸 상태로 실전에 돌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냐.”

“맞는 말씀입니다.”

“이번 싸움에서 깨달았다.”

패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고왔다.

“나는 할 만큼 했어. 관일공은 이 자체로 완전해졌다. 말하자면 원본의 완성이다. 이제는 연성하는 사람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렇습니까?”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초식 연성하는 것만 보고 그 무공의 진의를 깨달을 만큼 괴물이 아닙니다, 저는.”

“웃기는 소리 하는군.”

“다만, 관일공은 점창 역사에 길이 남을 무공이 분명해요. 그건 확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냐.”

“더하여 선배가 창안한 그 무공이, 정작 선배의 몸에 완벽히 녹아들지 않았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선배 말마따나 선배만의 관일공을 연성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음?”

“관일공은 지금 자체로도 완벽에 가깝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아직 발전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도 같습니다.”

패율의 눈이 빛났다.

“빈틈을 찾았느냐?”

“빈틈이라기보다, 더 나아갈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지요. 천하 어떤 무공이든 완벽에 가까울 순 있어도 진짜 완벽한 건 없으니까요.”

가장 완벽에 가까운 무공이라면, 아무래도 사신공을 들 수 있겠다.

사신공 자체가 불세출의 신공이기도 하거니와, 사신공은 공방, 회피, 반격 등 모든 특성을 철저하게 나눈 무공이었다.

구분을 나눠 특성을 살리니, 한 분야에 있어서 극단적인 완성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 완성도 넘치는 네 분야를 다시 하나로 합치는 과정을 부드럽게 섞었다.

구분과 합일의 반복이다. 사신무는 오랜 세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어느새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완전무결한 신공절학으로 탈바꿈하였다.

반면 관일공은 뛰어난 절학이지만, 역사를 생각하면 이제 걸음마 수준이었다.

역사가 짧은 젊은 무공.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장점이긴 하나, 오랜 세월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없앤 신공절학에 비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어쩌면 나는 관일공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나만의 무공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일공이 더 나아갈 길을 생각지 않고 포기한 것일 수도 있어.”

“그리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배라서가 아니라, 세상 누구도 이만한 무공을 창안하긴 힘듭니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

한 세대에, 역사에 길이 남을 무공을 창안하는 고수는 그 많은 무림인 중에서도 한 줌이 채 되지 않는다.

패율은 그렇게나 어렵고도 위대한 작업을 해낸 사람이었다.

가만히 패율을 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장포를 벗어 던졌다.

“달빛이 고와서 이대로 자기에는 너무 아쉬운 밤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관일공을 뜯어고쳐 볼까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었다. 패율이 툴툴거렸다.

“구결과 법문은 알려 주지 않는다.”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함께 공부하고 싶을 뿐이에요.”

“좋아.”

“자, 그럼 어디 보자…….”

흑백쌍룡부와 교룡쇄까지 풀어 내려놓은 연호정이 장창을 들었다.

“일단 창을…… 음.”

연호정이 우측으로 고개를 틀었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꼭 뭔가 하려고 할 때 손님이 오시더군.”

“귀한 손님입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잠시 후, 막원이 등장했다.

“내가 방해했소?”

패율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연호정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방해하셨습니다.”

“…….”

한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막원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미안하오.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소. 그럼…….”

“이미 방해는 했으니까, 대협도 이쪽 판에 끼어 드시지요.”

“엥?”

연호정이 패율을 보며 씨익 웃었다.

“방해받은 만큼, 도움을 주라는 겁니다.”

패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은 혓바닥으로 장강 물도 팔아먹을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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