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백병의 신안(神眼) (1)
“보고입니다.”
“음?”
“귀주성, 철기단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직접 읽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백서가 건넨 정보 문서를 읽은 양천이 피식 웃었다.
“또 화려하게 터트렸군.”
신화교의 일호무장, 번작을 사로잡고 거래를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철기단주의 직인과 연호정의 지장까지 찍혀 있었다. 확실한 정보라는 뜻이었다.
백서가 침음을 흘렸다.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괜찮으니까 또 그 난리를 피웠겠지.”
사실, 아주 괜찮지는 않다.
이번 건으로 인해 신화교는 성천십삼좌의 회유 혹은 사살에 더더욱 열을 올릴 것이다. 연호정이 그들의 계획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호정이 창술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실전 무예가 어디 가진 않았을 테니, 제법 많은 살수가 주먹질이나 발길질에도 목숨을 잃었겠지만.
‘주무공이 무엇이냐에 따라 의외로 흔적을 읽기 힘들다.’
게다가 그 일대가 신화교의 열양공으로 죄다 불타 버렸단다.
연호정이 지닌 여러 무공 중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이 화기를 기반으로 한 무공이었다. 한데 상대의 무공도 화기를 기반으로 하니, 오히려 연호정이 개입했다는 것을 모를 확률이 높아졌다.
‘정보가 닿지 않는다면 말이지.’
연호정은 똑똑한 놈이다. 정보를 전하라 할 때, 이쪽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검수했을 것이다.
‘잘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하게 알 도리가 없다.
보고서는 잘 작성되었다. 무슨 일을 했고,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가 확실하게 적혀 있었다.
다만, 작전이라는 것 역시 싸움처럼 온갖 변수로 점철되어 있는 법.
적측이 연호정의 개입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역시 움직이고 있었군.”
양천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움직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 게다가 화포까지 동원하다니.”
양천은 삼교가 당분간 내정에 더 신경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신화교는 황궁과 관부를 장악하느라 바쁜 와중에 무장 여럿을 잃었고, 사음교는 음신이라는 패를 잃었으며 묵룡부주인 자신이 버젓이 버티고 있기까지 하다.
남은 건 광혈교인데, 연호정과의 대화로 무림맹의 세작이 광혈교 출신일 확률이 아주 높음을 알았다.
양천도 삼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모르는 단체가 광혈교였다. 광혈교 소속의 교인과 부딪친 적이 없으니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어디로 튈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삼교가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해도 성천의 강자를 건드릴 시기는 아니라고 보았다.
성천십삼좌를 회유하거나 사살한다?
길고 넓게 봐야 하는 싸움이라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성천을 건드린다면 최소한 전쟁 준비가 반은 끝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연히 삼교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신화교는 선봉장 여럿을 잃었고, 사음교는 지원군이자 퇴로 상정지인 광동성의 지배자를 잃었다.
이러면 전쟁을 벌여도 피해가 막심하다. 황궁까지 건드리려는 놈들이, 완벽한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놈들은 성천을 건드리고 있어. 그 뜻은…….’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설마, 정말 전쟁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다는 뜻인가?’
꼭 그렇다고 생각할 순 없다. 대국적으로 봤을 때 일리가 있는 추측이지만, 아직 적들에 대해서는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상황이니까.
‘뭐가 되었든, 놈들이 함부로 날뛸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무림맹의 세작이 뽑혀 나간 이상, 이제 놈들도 중원을 대표하는 두 연맹체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지극히 힘들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천이 백서에게 물었다.
“첫째는 지금 뭐 하나?”
“아, 대공자 말씀이십니까.”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며칠간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의 수뇌부 몇몇이 대공자의 거처를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양천이 혀를 찼다.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 본디 세상은 그러하지. 하나, 제 무공이 지극하지 않거늘 벌써 정치질에 손을 댄단 말인가.”
“그래도 대공자 정도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충분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 연배에 그 정도 무공이라면,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대공자는 그 천재적인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실전에 뛰어들어 무공 수위를 늘렸다.
재능에 안주하지 않는 노력, 아차 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실전에 스스로 뛰어드는 야성까지.
가히 흑도의 차기 군주로서 손색이 없다.
“아직 부족한 면이 있어. 녀석이 그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대공자 정도면…… 이공녀처럼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아닐는지요?”
“가르침이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양천이 일순 툭 던지듯 물었다.
“나와 연호정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나?”
“예?”
“나, 그리고 연호정. 크게 보면 그때 봤던 모용군도 마찬가지지. 우리 셋의 공통점이 있다네.”
백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정치적 능력을……?”
“틀렸네. 자네도 봤듯이, 나는 그간 못난 모습을 많이 보인 사람이라네.”
“그, 그렇지 않습니다.”
“허허.”
백서는 잠시 생각했다.
‘부주님과 연 부관, 그리고 모용가주의 공통점이라?’
인상이 워낙에 다른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무공? 그거야 그렇지만, 대공자 역시 무공이라면 능히 일가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야심? 그거야말로 대공자 또한 누구 못지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백서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무공, 야심, 뭐 이런 걸 떠올린 건 아니지?”
백서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남들에겐 지독하게 냉정한 백서가 자신에게는 솔직했다. 그는 백서의 그러한 구분을 좋게 보았다.
“답은 간단하네. 우리는 치고 빠질 때를 알아.”
“예?”
“물론 나는 보타를 건드리는 실수를 했지. 뭐, 삼 년 전부터 진행했던 일이지만 말이야. 지금도 욕심을 내고 있어. 하나, 정말 전쟁이 벌어졌다 한들 무림맹은 보타 하나로 동맹을 깨는 바보짓은 못 할 것이야.”
그건 당연하다.
희대의 적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자파의 위기를 없애기 위해 타 문파를 무너트렸다고 주장하면, 제아무리 소림이라도 묵룡을 건드릴 수 없다.
속내는 빤히 알아도 이쪽이 그런 명분을 내세운다면 건드리기 힘들다는 얘기다. 세상이 본디 그러한 것이었다.
“즉, 다소 무리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선은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선, 넘어 버리면 내가 아니라 내 새끼들까지 다 무너질 수 있는 선. 나는 그 선을 넘지는 않아.”
“…….”
“연호정도 마찬가지지. 모용군? 그놈은 사실 상대를 제대로 못 봤지. 뛰어난 놈이지만, 야심과 능력의 균형을 잃었어. 그래도 그 녀석 역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어느 정도 구분할 줄 알아. 그래서 대단하고 위험한 것이야.”
“하면, 대공자는 아니란 말씀이신지요?”
“아니지.”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야. 나는 묵룡부주로서 연호정, 그놈을 총애하고 있네. 하물며 둘째는 내 인정을 받아 직접 무공을 배우고 있어.”
“…….”
“치고 들어가야 할 때일까, 물러나야 할 때일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백서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신의 우매한 대답이 부주님의 귀를 더럽힐까 걱정입니다.”
완곡한 대답 회피였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차라리 첫째가 둘째와 셋째를 무너트리고자 대놓고 달려들었다면,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에 들어갔을 것이네.”
“……!”
“한데 보게. 치고 들어와야 할 때, 정작 줄이나 서려는 수뇌부 몇몇과 별 쓸데도 없는 정치질이나 하고 있잖은가?”
“그, 그렇군요.”
“무인의 능력은 정치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야. 무력과 사상으로 증명하는 것이지.”
양천이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물론 본부 역시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집단일세. 하지만 무림맹보다도 간단하고 확실한 점은 바로 강자존의 원칙이 확고하다는 것이지.”
묵룡부는 흑도 무림 자체를 축소해 놓은 세상과 같다.
결국 최강의 무인이 우두머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정치가 난무하는 묵룡부 내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원칙이었다.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편안히 앉아서 희망찬 미래나 그려 볼 때는 아닐세.”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임무를 받았든, 단순한 원한이 얽힌 사태의 중심에 서 있든, 지금처럼 경쟁자들이 그득한 상황에 있든.”
“…….”
“상황을 읽고, 분위기를 보고, 자신이 달려도 될지 말지를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네. 첫째는 그게 부족해. 오히려 둘째보다도 더.”
“하면…… 연 부관은 후계들보다 낫다는 것입니까?”
“연호정?”
양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이야말로 치고 빠질 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질의 귀신이지.”
* * *
스르륵.
번작을 업은 복면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번작이 연호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 따라올 거냐?”
“그래.”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대로군. 여기까지였어.”
“뭐라는 것이냐?”
“내가 직접 전투에 개입한 곳 말이다.”
번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복면인의 등에서 내렸다. 체력을 위해 자존심이 상하는 걸 감수하고 업혔다. 한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충 다섯 곳만 손보면 되겠구만. 꽤 많을 줄 알았는데, 네 덕분이다. 그 열양공 덕에 내 무공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 않은가.”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돌아갈 생각.”
“……뭐?!”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 네놈 말을 믿고 따라온 줄 알았느냐?”
“……?!”
“절반도 안 되는 정보…… 좀 아쉽긴 하지만 공짜 정보라고 생각하면 이걸로도 충분해.”
“네놈……!”
“애초에 남은 정보를 줄 생각이 없었잖나? 아니, 오히려 날 죽일 생각 아니었나?”
번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순진한 척하지 말자고. 우리, 그 정도에 속을 정도로 만만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아.”
“…….”
“그래도 뭐라도 얻었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넌 어떨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인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번작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감히 나를 농락했단 말이지?”
“농락?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던가?”
“뭐?”
“난 약속을 어긴 놈을 살려 두지 않아.”
“……?!”
“즐거웠다, 번작. 불에서 태어났으니, 다시 불로 돌아가도록.”
순간 번작은 자신의 심장에서 강렬한 고동을 느꼈다.
쿠웅! 쿠우웅!
심장이 무섭게 박동했다.
번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너, 이 개 같은 새……!”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번작의 몸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 옆에 있던 복면인까지 단숨에 휩쓸어 버린,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었다.
폭발을 일으킨 붉은 화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솟구친 그 화염은, 태양신(太陽神) 주작과 닮아 있었다.
연호정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미 그에게 둘은, 진즉 죽어 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