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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25화 (524/963)

525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9)

“음?”

황석태가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인가.’

저 멀리서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기파가 있었다.

연호정과 패율이었다.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왔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격렬한 기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살아 돌아왔군.’

내심 고개를 끄덕이던 황석태는 순간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누굴 데리고 왔나?’

기분 나쁜 화기(火氣)의 잔재가 느껴졌다. 그 화기 안에는 다소 위태로운 생기가 잠자고 있었다.

열양공을 연성한 고수다. 기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치리링! 치리리링!

“다들 잘 쉬고 있나?”

연호정의 인사에도 황석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기일대 전원이 입을 쩍 벌린 채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서 쉴 거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럼 일단 나 먼저 쉬련다.”

“그러십시오.”

패율은 터덜거리며 걸어가더니, 큼직한 나무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관일공(貫日功)의 약점을 꽤 많이 발견했겠지.’

패율의 관일공은 지금 당장 문파의 대표 절기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수준의 절기였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무공도 실전 효용성에 있어서는 여러 문제를 안게 된다. 패율 역시 그것을 알았고, 이제는 진짜 완성을 위해 그것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때, 황석태가 입을 열었다.

“인질인가?”

“음?”

“그…… 쇠사슬인지 뭔지로 칭칭 묶어서 온 사람 말이다.”

“아, 이놈?”

연호정이 교룡쇄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교룡쇄로 칭칭 감긴 번작의 몸이 훌쩍 들렸다.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역인?”

“신화교의 무장일세.”

“무장이라면……?”

“십팔무장. 신화교의 선봉장들이지. 이놈은 그 십팔무장의 수좌야. 이놈이 병력을 동원해서 백병신군을 쫓고 있었던 거지.”

“……!”

그제야 황석태는 저 서역인이 백병신군 막원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였던 적의 수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군.’

황석태는 연호정을 훑어보았다.

다소 험한 모습이지만, 크게 다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바탕 시원하게 놀았다는 듯 만면에 후련함이 가득한 것이, 생사결을 벌이고 온 무사의 얼굴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분명 굉장한 강자였을 텐데.’

막연한 추측 이전에, 정신을 잃은 지금만 해도 잔존하는 기도가 상당했다.

‘무극지경을 코앞에 둔 초절정고수를 이렇게 만들었다…….’

물론 막원을 쫓는 과정에서 상처를 안 입었을 리는 없다.

고수 간의 승부는 한 끗 차이로 결정된다. 그렇게 보면, 결투의 시작부터 연호정이 이점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 한 끗 차이가 진리라 부르짖는 사람들은 싸움의 변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장수 하나가 부대 하나를 휘젓고 탈출한 사례는 은근히 많다. 고급의 싸움은 한 끗 차이지만, 그 고급의 싸움은 비무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연호정이 저자를 꺾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며, 묵룡부의 특임 부관이 엄청난 강자라는 사실도 변치 않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이왕이면 생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멀쩡히 돌아올 줄은 몰랐다. 황석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한데 왜 데리고 왔지? 인질인가?”

바로 죽여 버리지 뭣 하러 살려 뒀냐는 뜻에 가깝다. 섬멸 부대인 철기단의 수장다운 발언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거래를 했어.”

순간 황석태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거래라니?”

적과 거래를 한다? 절대 좋게 들리지 않는다.

반면 연호정은 황석태의 날 선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성천십삼좌의 정보를 얻기 위함일세.”

“다른 성천십삼좌라니?”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설마하니 이놈들이 백병신군 하나 족치겠다고 이 난리를 쳤다고 생각하나?”

“…….”

“전쟁은 절대 쉽게 일어나지 않아. 서로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 먹은 연후에, 더 이상 무너트릴 것이 없을 때 전면전이 터지는 거야. 그게 기본이지.”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즉, 삼교 놈들은 성천십삼좌를 모두 제거한 후에 전쟁을 일으킬 거란 뜻이냐?”

“가능한 한 그렇겠지. 성천의 고수들은 하나하나가 군단급 전력을 가진 천외천의 강자들이다. 하물며 활용성 면에선 일반 군대와 비교가 안 되지. 소수인 데다가 보급에서의 이점도 크고, 특히 기동성이 빨라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폭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

“폭탄…….”

“적어도 적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 역시 놈들이 보유한 성천급 전력을 최대한 깎아 놔야 해. 그런 사전 공략도 없이 붙었다가는 시작부터 큰코다치게 될 거야.”

“즉, 이놈에게서 성천십삼좌에 대한 정보를 얻겠다는 뜻은……?”

“죽였건 회유했건 뭐건, 백병신군 이전에도 이런 짓을 했어. 분명해.”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현재 성천의 강자 중 정파나 사파가 아닌 중립 성향의 고수는 넷이야. 거기에 마도를 표방하는 마선과 혈옥마군까지 합치면 여섯이지.”

“으음.”

“그중 절반만 저놈들에게 넘어가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성천급 강자들, 그중에서도 정사지간의 고수들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서 설득해야 해.”

다소 뜬금없지만, 황석태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주님께서 왜 연호정에게 특임 부관이라는 자유롭고도 강력한 권한을 지닌 직함을 주었는지.

연호정이 맡은 임무 자체가 자유롭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사시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선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직함을 준 것이다.

‘그 양반.’

황석태는 백서를 떠올렸다.

백서는 무림맹에서 파견한 귀한 사람을 아무 부대에나 넣을 순 없지 않겠느냐며, 그답지 않게 자신을 살살 달래기까지 했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니 전혀 다르다.

묵룡부 최강의 부대, 용아철기단 정도는 되어야 위급 시에 연호정을 지켜 줄 수 있다.

연호정에게 훈련 담당 권한을 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호정은 뛰어난 수장이며 전략 전술에도 밝았지만, 최대한 철기단을 이용하여 이번 임무를 성공리에 마치길 원한 것이다.

지나친 해석이다? 그렇지 않다.

이번 일에 단주인 자신을 필두로 최고 부대인 철기일대를 보내라 직접 명령한 것이 그 증거였다.

차라리 단주를 빼고 철기대대 서너 개를 더 보내는 것이 안정적이었을 터, 굳이 단주까지 콕 짚어서 보낸 것은 앞으로의 임무가 얼마나 어렵고 심각한 일인지를 직접 깨달으라는 것이다.

‘결국.’

황석태가 연호정을 주시했다.

‘이 녀석이 정말 이번 전쟁의 전세를 좌우할 만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이로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닐세.”

“…….”

“한데, 저 서역인의 정보는 믿을 수 있겠는가?”

미묘하게 달라진 말투.

연호정은 비로소 황석태가 자신의 위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티는 내지 않았다. 황석태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물증을 가져오라 했지. 조금만 기다리면 돼.”

“당신은 이 자와 거래를 했다고 했어. 거래란 일방이 아닌 쌍방이지. 이자에게 뭘 주기로 했나?”

“하루치의 삶.”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그건 정보처에 따로 말해 놓도록 하겠네. 어차피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야.”

“……알겠네.”

평소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황석태는 그러지 않았다.

선을 지킨다. 자신은 자신의, 연호정은 연호정의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양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양천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연호정과 그는 끝까지 불편한 관계로 남았을 것이다.

“일단은 좀 쉬지. 백병신군은 어디 계신가?”

“조용한 곳을 원하셔서 저기 숲속으로 들어가셨네. 대원들이 호법을 서고 있어.”

“알겠네. 자네도 좀 쉬어. 여기서 사나흘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이틀 전 정신을 차린 번작은 물을 제외하곤 어떤 음식도 섭취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금제순화공의 요상결로 상처가 썩는 걸 막고 어떻게든 봉합은 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상태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내내 한마디도 없던 번작이 입을 연 것은 사흘째 되는 날 정오 즈음이었다.

“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 동남향에서 소리가 들리더군. 저쪽이 맞겠지?”

“그렇다.”

잠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번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번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건네줘라.”

복면인이 메고 있던 봇짐을 연호정에게 건넸다.

동시에.

치리리리링!

철기대원들이 사방으로 퍼져서 창을 겨누었다.

번작의 눈이 차가워졌다.

“이 행동,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연호정은 봇짐을 풀며 말했다.

“섣부른 움직임을 봉쇄하고자 하는 거다.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라.”

봇짐 안에는 수십 장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연호정은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읽었다.

번작이 조롱조로 말했다.

“정보를 취급하는 전문가들도 헷갈릴 만한 문서다. 네놈이 확인해도 괜찮겠느냐?”

“글쎄다.”

연호정은 여전히 문서를 하나하나 들춰 보았다.

잠시 후.

“나머지는 어디 있어?”

번작의 눈이 번뜩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목에서 우두둑하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적점(飛敵點), 그리고 천가사(天歌師). 비왕과 음제를 뜻하는 너희 정보대의 속어로군. 앞으로 이 둘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건 알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나와 있지 않아.”

번작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걸릴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정보원 일에 능통하다면 해석이 아주 어려운 편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걸 연호정이 안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그 많은 문서를 보는 데 일각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자마자 해석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이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다.

무공이면 무공, 지략이면 지략, 협상이면 협상, 암어면 암어까지.

가히 만능(萬能)이라는 단어가 부족하지 않은 진짜 천재의 면모다.

번작이 고개를 저었다.

“보험이다. 네놈이 약속을 어기면 괜히 정보만 유출한 바보가 되니까.”

“그 와중에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이거냐?”

“내 목숨만 걸린 거래가 아니니까.”

“흐음.”

연호정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번작은 그의 웃음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가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손을 올렸다.

“물러나라.”

사사사삭!

사위를 에워싸고 있던 철기대원들이 귀신처럼 흩어졌다.

치리리리리리링!

교룡쇄가 줄어들며 번작을 자유롭게 하였다.

“쿨럭!”

몸이 자유를 찾았지만, 이틀 동안 묶여 있었다. 번작은 제대로 일어서기도, 팔을 놀리기도 힘들었다.

그때, 연호정이 번작의 명문에 손을 대었다.

번작이 깜짝 놀랐다.

“무슨 짓이냐?!”

“가만히 있어라. 약속을 지키려는 거니까.”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손에서 뿜어진 주작화기가 자연스레 번작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두근!

주작기는 심장을 담당한다. 강렬한 화기가 강심 작용을 내는 동시에 혈도 곳곳에 도사린 탁기를 빠르게 제거했다.

후우우웅.

번작의 체내를 한 바퀴 돈 주작화기가 그의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연호정이 손을 떼었다.

“이걸로 약속은 지켰다. 남은 정보는 언제 줄 거냐?”

번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삼십 리 밖에서 주겠다. 거기까지 따라오도록 해.”

“…….”

“왜? 받기 싫은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좋지. 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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