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8)
번작은 무공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무공이 강해지려면 그 고행을 받쳐 줄 정신력이 필수다. 기연이든 뭐든, 극한까지 연마한 고수의 무공은 깨달음을 동반하며, 그 깨달음은 다시 정신력의 성장을 끌어낸다.
절정고수들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놀라도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항상 심신이 조화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재 번작의 상태였다.
화정을 한계까지 끌어 쓴 데다가 내외상도 심각했고, 특히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심신의 조화가 흐트러졌단 말이다.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허점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번작은 말없이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대답이 없군.”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천강도 그렇고, 그 전에 우리 손에 죽은 너희 무장들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재미있다고 느꼈던 게 뭔 줄 아나?”
“…….”
“너희가 외치는 그 목숨을 건다는 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는 거다.”
번작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천강을 잠시 뇌옥에서 빼낸 적이 있다. 알아볼 게 있었거든. 한데 그놈, 독하더군. 정말로 목숨을 버릴 기세였어.”
당연하다. 십팔무장은 무공만 강하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무력과 성정 이전에, 충성심과 신앙이 확고하지 않으면 절대 무장이 될 수 없다.
“재미있더군. 그래서 진짜 죽이려 들었다. 어차피 뽑아낼 정보도 없는 인질 따위 무가치하니까. 돌려보내면 또 이쪽을 향해 칼을 들이밀 테니, 살려서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지.”
“…….”
“그때 놈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지 않나?”
굳이 말을 끝맺지 않아도, 말의 분위기만으로도 천강이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번작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되지도 않는 협잡질은 그만하지.”
어느새 연호정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너희가 부르짖는 죽음은 다 그런 식이다. 너희가 연성한 열양공처럼, 그 무게 없는 불꽃처럼 가볍지.”
“그래서, 어디 한번 시험해 보시겠나?”
“시험 좋지.”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내 입에서 일말의 정보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번작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건 인정했군. 좋은 자세야.”
“……!”
연호정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지금 번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뚫리고 찢어진 양 허벅지는 화정으로도 복구가 안 되었고, 미친 척 기습을 하려 해도 내력으로 상처를 막고 있어서 힘들었다.
차라리 목숨을 건 일격을 가하는 게 승산이 있겠지만, 그조차도 무리다. 지금의 내력으로는 연호정은커녕 거리를 벌린 패율조차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격을 가할 힘이 있었더라면 진즉 공격을 구사했을 것이다.
즉, 번작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목숨은 이제 연호정의 손에 달렸다.
“선배.”
“음?”
“주변에 벌레들이 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아 주십시오. 누구 하나 이곳을 침범해선 안 됩니다.”
패율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이 뭔가 승부수를 던지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 너희의 전투로 일대가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이 넓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막기 힘들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일을 벌이려는 연호정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임전 태세는 풀고, 감각만 극대화해 주십시오. 적의 접근을 느끼는 즉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적을 막는 게 아니라, 모든 내공을 감각으로 돌려 경보 역할을 해 달라는 뜻이었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후웅.
그는 연호정과 번작에게서 십여 장 떨어진 곳으로 가 가부좌를 틀었다. 감각을 극단적으로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우우우웅.
패율의 몸에서 은은한 진기가 솟구치더니, 이내 무형의 기가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졌다.
연호정이 다시 번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번작의 표정은 비장했다. 이제 연호정이 자신을 고문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렸다.
스륵.
허공섭물의 기예로 장창을 수거한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한마디 말없이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내공을 싣지 않은 움직임.
빠르지도, 아주 느리지도 않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의 눈으로도 투로의 흐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뭐지?’
번작은 의아했다.
고문은 안 하고 뜬금없이 무공 초식을 보여 준다.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파라라락! 펑! 파라락!
창술의 완급 조절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것은 창술이 아니었다. 의아한 와중에도, 번작은 연호정이 창술이 아닌 권법과 장법을 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연호정의 동작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다.
창을 내지른 연호정이 마지막 타점에서 손목을 반쯤 회전시켰다.
훅!
회전에 따라 바닥에 깔린 흙먼지가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왔다.
순간 번작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알아보겠나?”
본래 자세로 돌아온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천강이 보여 주던 무공이다. 그리고 조금 전, 내 무공에 맞서 네놈이 구사했던 권장공의 투로이기도 하지.”
“……너, 그걸 어디서?!”
“방금 말했잖나? 천강이 보여 주던 무공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화교의 무공 투로를 알려 줄 정도로 천강은 미치지 않았다. 차라리 신화교의 행보에 관한 정보 하나를 건네주는 게 낫지, 초식의 형을 이리 섬세하게 알려 주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그럼 누군가가 신화교 본단에 잠입해서 무공서라도 훔쳐 온 모양이지.”
“…….”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하다. 번작 입장에서는 그 어떤 사항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연호정의 다음 말을 들은 그는, 입을 열어 소리를 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중요한 건 너희의 무공도, 전략도, 전술도 다 하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지.”
번작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번작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흐름을, 이 도형을, 파훼법만 안다면 철저하게 무너트릴 수 있는 이 절대적인 약점을.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맞았구나.”
번작과의 싸움에서 일부러 파훼법대로 상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길 자신도 있었지만.
반면, 번작은 자신의 반응이 상대에게 확신을 안겨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하지만 이 반응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상태가 멀쩡했을지라도 상대에게 들켰을 것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저 ‘형태’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중원 천지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걸 신경 쓸 무림인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문파 간의 전쟁이 아니라 땅을 빼앗으려 드는 전쟁이었다. 한가롭게 그런 걸 조사할 미친 인간이 어디에 있겠나.
‘이놈이 어떻게 태양군도(太陽群圖)를?!’
연호정이 턱을 매만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십팔무장의 수장인 네가 알고 있다면, 네 위의 수뇌부들 역시 다 알고 있다고 볼 수 있겠어.”
“……!”
“즉, 너희는 무공이든 전략 전술이든, 하다못해 작전상 도주를 감행할 때조차 이 도형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최소한 도형을 따르지 않을 경우,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겠군. 그 위험을 감수하고 도형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번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과다 출혈로 인해 어지러웠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무림맹 유군 부대 수장이라는 작자가 알아 버렸다.
아니, 연호정만 알진 않을 것이다. 필시 무림맹의 수뇌부들 역시 태양군도에 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번쩍!
번작의 눈에 생존 욕구가 피어올랐다.
‘알려야 한다. 반드시!’
죽음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우연히 연호정을 만났지만,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졌고, 남은 건 죽음이다. 믿기 싫었지만, 번작은 자신의 삶이 여기서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연호정이, 무림맹 수뇌부가 태양군도에 대해 알고 있는 이상 절대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자신이 여기서 죽어 버리면 이 중대한 사실을 모르는 신화교가 치명적인 일격을 받을 것이다.
내심과 달리 번작은 이죽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대단한 발견을 하셨군.”
“그렇다고 생각해.”
“그 도형에 따라 움직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다만 확신이 없었어. 그래서 무림맹은 결단을 내렸다. 목숨 걸고 실험해 보기로.”
“……뭐?”
“황궁 쪽으로 사람을 보냈다. 너희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무림의 세작들이지. 그가 황궁 곳곳을 돌아보며 특이 사항을 전달할 거야. 너희가 황궁을 장악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상이든 전술이든 뭐든 간에 이 도형을 따른다면, 세작의 보고가 아주 큰 효용성을 갖겠지?”
쿵! 쿵!
번작의 심장이 강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내공으로도 막을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
‘이놈 말은 거짓이다.’
번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날 흔들려는 수작이야. 황궁에 세작을 보냈다? 설령 그랬다고 한들, 전부 잡힐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신감으로 가득 찬 생각이 모래성보다도 쉽게 무너지는 듯했다.
“다소의 위험 부담이 있어 걱정이 많았다. 일단은 황궁의 외전만 건드려 볼 생각이었는데…… 네 반응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쪽 상황을 전해 주면 우리는 더 빨리, 더 정교한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
“이로써 신화교는 봉쇄되었다.”
번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호정의 말은 단정적이었고,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러운 자신감을 풍기고 있었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언제나 한발 앞서 있을 것이다. 사음이 진격하고 광혈이 미쳐 날뛴다 한들,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신화교가 설 곳은 없을 것이다.”
으드득.
번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저도 모르게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기분이 별로인가?”
“……이놈.”
순간 번작은 막원의 말을 떠올렸다.
‘이 땅, 이곳에서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족속들이 이길 싸움일진대, 굳이 너희 같은 사이비들에게 붙을 필요가 있겠느냐?’
설마, 막원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연호정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우리도 일을 좀 쉽게 하고 싶거든.”
“……?!”
“신선제왕, 그리고 삼군. 그들 중 누굴 회유했는지, 누굴 죽였는지, 혹은 다음 표적이 누구인지 전부 불어라. 그리하면…….”
“…….”
“네 목숨, 하루를 연장시켜 주지.”
죽이지 않겠다는 말은 않는다. 믿지도 않을 것일뿐더러, 연호정 역시 거짓말로라도 상대를 살려 주겠다고 말하기 싫었다.
“수하를 시키든 어쩌든, 성천십삼좌에 관해서 내가 믿을 만한 증거를 가져오게 해. 그럼 딱 하루 널 풀어 주지. 그 하루 동안은 널 쫓지 않겠다.”
“……내가 네놈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느냐?”
“믿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다 죽어 가는 놈이?”
“…….”
“하루 풀어 준다고 했지, 널 풀어 줬다는 사실을 맹에 알리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스륵.
장창의 창날이 번작의 목젖에 닿았다.
“단 하루의 목숨이 네 지혜를 저울질할지, 충성심을 저울질할지는 전적으로 네 판단이다.”
“…….”
“거래, 응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