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6)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이거 큰일 났군.’
옆구리가 뚫리는 중상을 입었다. 심지어 옆구리를 뚫은 철쇄가 상반신을 칭칭 감고 있다. 팔은 자유로웠지만, 적에게 묶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기쾌하게 찔러 오는 장창까지.
‘창술이 엄청나게 예리해.’
신화교에도 창술을 익힌 고수가 있다. 하지만 연호정만큼 변칙적이고 날카로운 창술은 구사하지 못한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놈이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인데.
‘후속타를 상정하는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창의 살기를 보자면,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각오였다.
하지만 번작은 창이 아닌 연호정의 눈을 보았다.
연호정의 눈빛은 지극히 투명했다.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이놈은 승부를 내야 하는 순간을 읽을 줄 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그렇다면…….’
번작의 눈이 번쩍였다.
‘손해를 감수한다.’
파아아아아악!
염왕권을 풀고 열화신장의 투로를 따라 움직인 그의 양손이 연호정의 창대를 잡았다.
퍼억!
양손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등줄기를 헤집는 듯하다.
번작의 볼이 살짝 떨렸다.
‘상상 이상이다!’
창날이 아닌 창대를 잡았음에도 손바닥 피부가 터져 버렸다. 창대에 걸린 회전과 회전력을 따라 증폭된 발경의 힘이 무지막지한 전사력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이이이이익!
희뿌연 수증기와 함께 창의 회전이 멈추었다. 창대를 잡은 번작의 양손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가 증발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재빨리 상반신을 비틀었다. 철쇄를 쥔 손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순간 번작은 아차 싶었다.
‘철쇄?!’
그는 재빨리 천근추를 시전했다. 철쇄를 당기려는 연호정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연호정이 몸을 비튼 것은 교룡쇄에 묶인 번작을 끌어당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퍽!
“큭!”
번작의 입에서 기어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비틀어진 상반신이 무지막지한 탄력으로 움직이며 창을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철쇄로 뚫린 반대편 옆구리에 창날의 반이 박혔다. 상시 발동되는 금제벽이 아니었다면 창대까지 들어올 뻔했다.
“으아아압!!”
강렬한 기합성과 함께 번작의 몸에서 거대한 불꽃이 번져 나왔다.
파아아악!
번작의 몸에서 창날을 뽑은 연호정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미 승부에서의 이득을 보았다. 무리해서 무너트릴 필요는 없었다.
치이이익!
그 와중에도 교룡쇄는 풀지 않았다. 쏟아 내는 현무수기로 교룡쇄 자체의 길이를 늘여 버린 것이다.
‘확실히 대단해.’
현무기를 있는 대로 쏟아부었음에도 교룡쇄를 쥔 왼손과 왼팔 전체가 불구덩이에 빠진 듯 뜨거웠다.
금제순화공, 신화교에서도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무장의 신공이었다. 네 가지 기운을 특성에 맞게 연성한 연호정과 달리 오로지 열양공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신공의 힘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교룡쇄를 놓지도, 풀지도 않았다.
‘절대 놓지…….’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크아아!”
괴성에 가까운 비명과 함께, 번작이 옆구리를 뚫은 교룡쇄의 끝을 바깥으로 빼 버렸다.
푸화아악!
뜯겨 나간 옆구리 살이 덜렁거렸다.
그야말로 끔찍한 광경이다. 옆구리를 파고든 사슬의 길이가 얼마 안 된다곤 하지만, 철쇄를 끊는 게 아니라 옆구리를 희생해 떼어낸다는 발상은 누구도 하기 힘들다.
‘저거 미친놈 아닌가?’
상대가 불구대천의 원수 중 하나, 신화교의 무장인데도 분노보다 어이없음을 느꼈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륵!
잔존하는 불꽃을 더 강하게 빨아들이는 번작.
그 열기가 너무 강해서, 현무수기로 온몸에 방벽을 쳐도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대의 땅이 부글부글 끓고, 오 장 밖의 풀과 나무도 갑자기 불타오르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후우우우우우웅!
무서운 광경이었다.
번작의 명치 부근에서 불꽃보다도 환한 구체가 빛난다 싶더니, 창에 뚫린 복부와 교룡쇄로 엉망이 된 옆구리가 무서운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순간 연호정의 머리를 스치는 당관의 목소리.
‘몰랐다고? 이런 젠장, 그러면서 그 규적이란 놈을 찢어 죽였단 말이야?’
‘저놈도 웃기는 놈이라니까. 그놈들이 어지간해선 안 죽는다는 걸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나 싶었더니만, 자기도 모르고 있었더군.’
그렇다.
신화교의 고수들은 화정(火精)이라는 것을 연성하여 회복력을 극대화한다고 했다.
그 회복력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떨어진 신체 일부를 붙이지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내외상은 숨 몇 번 고르는 것만으로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십팔무장과의 전투 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일행은 무장들의 목을 확실하게 날려 버렸더랬다.
‘그걸 잊고 있었어.’
연호정의 실책이었다.
‘빌어먹을,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평소의 그라면 그런 중요한 사실을 깜빡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상대가 신화교의 고수라는 걸 이미 아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데도 잊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면 주변을 읽지 못하는, 최근 그에게 생긴 변화와 상통하는 부분이었다.
콰앙!
백호군림의 힘찬 진각을 밟은 연호정의 눈빛이 다시 전의로 들끓었다.
‘전투 중이다. 잡생각은 금물.’
번쩍!
번작의 동공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얼마 만에 발동하는 화정인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너희는 참 상리를 벗어나는 공부들을 많이 아는군.”
“상리를 벗어난다…… 좁쌀만 한 두뇌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神學)이다.”
“잘도 가져다 붙이는군. 그나저나 그 화정이라는 거, 무한은 아니겠지?”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진각 발산 이후 연호정은 계속 번작의 빈틈을 주시하고 있었다.
번작의 목소리가 담담해졌다.
“화정이란 신의 힘이다. 우리는 그 일부만을 받았을 뿐이야. 이 화정을 자유자재로 다루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신화교주냐?”
“닥쳐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방에 가득하던 불꽃도 훅, 하고 밀려났다.
느닷없이 터진 분노 가득한 일성. 번작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외인 따위가 교주님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오호, 이것 봐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을 해도 무죄라 하지 않나? 하물며 적인데, 욕을 하든 씹고 뜯든 맛보고 즐기든 무슨 상관이냐?”
“이놈!!”
“그래도 하나는 알겠군.”
감정을 읽기 힘든 투명한 안광이 순식간에 살기로 꽉 찼다.
“너희를 도발하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나 교주 놈을 걸고넘어지는 거였어.”
파아아아아앙!
번작이 돌진했다.
이전보다 미세하게 더 빠른 속도였다. 그의 열화신장이 단숨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쾅!
끔찍한 위력이었다. 응축된 열화신장의 경력이 나무 세 그루를 폭파시키고 대지에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면 움직이는 화포나 다를 바 없다. 실제 위력 역시 화포에 비견될 만한 무공이었다.
‘그리고 빨라.’
콰쾅! 쾅!
교룡쇄에 묶여 있음에도 움직임이 자유롭다.
이유는 분명했다. 빈틈을 노리고 승기를 잡으려던 번작이, 지금은 최대 출력의 힘을 발휘하여 연호정을 재로 만들 생각이기 때문이다.
연호정 역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순간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면 그대로 팔 하나를 잃을 뻔했다.
파아앙! 파아아아앙!
찢어발길 듯 양손을 마구 휘두르니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장법도, 권법도 아니다. 말 그대로 잡아서 뜯어내는 형식의 무공, 조법(爪法)에 가까운 막무가내식 공격이었다.
하지만 투로가 단순하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다는 것이고, 빠르다는 것은 충격 저항을 감내할 내구력만 있다면 파괴력까지 우월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번작에게는 사신기의 현무수기마저 제대로 통하지 않는 화력까지 있다.
콰쾅! 콰콰쾅!
딱히 발경으로 광범위한 공격을 가한 게 아닌데도 땅이 터지고 먼 거리의 바위에 흠집이 났다.
충격파였다. 순수한 힘의 충돌이, 금제순화공의 화기가 만들어 낸 기의 충돌이 막강한 충격파를 생성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의복 끝단이 갈가리 찢어졌다. 기(氣)가 전신을 융통무애(融通無碍)하게 감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충격파에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더.’
파파파파팡! 콰르르릉!
숲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연호정의 움직임은 더 유연하고, 더 자연스러워졌다. 번작의 무공에 순식간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퍼퍼퍼퍼펑!
연달아 터지는 화염의 폭풍 앞에 하늘마저 빨갛게 물들었다.
“후욱!”
숨 한 번 쉬지 않고 무차별 폭격을 가하던 번작이 한순간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콰아앙!
폭음을 내며 쏘아진 연호정이 청룡공, 용군삼형(龍群三形)의 무공을 연달아 펼쳐 냈다.
퍼어억!
내질러진 창날이 번작의 옆구리를 뜯었다.
콰직!
휘몰아친 창대가 번작의 빗장뼈를 부쉈다.
퍼어어엉!
유연하게 흘러 들어간 주먹이 번작의 복부를 강타했다.
푸화아악!
번작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청룡공은 회피와 반격에 중점을 둔 무공이었다. 번작의 무공이 강할수록, 하나의 빈틈이 나오는 순간 숨도 못 쉴 만큼 치명적인 연환공으로 상대를 분쇄해 버리는 것이다.
그때였다.
치리리리링!
튕겨 나간 번작이 몸을 회전시켰다.
일순간 정신이 날아갈 뻔했을 정도로 위력적인 무공이었지만, 번작은 광기 어린 신앙의 힘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을 회전시킨 것은 충격을 분산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티이이잉!
교룡쇄 끝부분이 번작의 몸에서 떨어졌다. 몸통을 칭칭 묶고 있던 교룡쇄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파아아앙!
피를 토하면서도 번작은 달렸다.
마음 같아선 연호정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오직 이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분노를 증폭시켰고, 빈틈을 보였다.
‘쓰라리군.’
화정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뜯겨 나간 옆구리도, 부러진 빗장뼈도, 진탕된 내부도 빠르게 복구 중이지만 그게 한계였다.
‘내상이 더 이상 낫질 않아.’
두세 번의 회복만으로 화정이 더 이상 제 역할을 못 한다.
그만큼 연호정의 공격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파바바바박!
번작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
콰앙!
연호정의 왼발이 힘찬 진각을 밟았다.
백색의 돌풍이 장창을 휘감았다. 번작이 도주하는 그 순간부터 청룡기가 백호기로 전환되어 한계에 가까운 힘을 끌어낸 것이다.
그 잠깐 새에 번작은 벌써 삼십여 장 밖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온 숲이 엉망진창이라 번작의 신형이 훤히 보였다.
“딱 좋아.”
연호정의 손에서 백색의 광채가 폭발했다.
번쩍!
쏘아진 백풍(白風)의 뇌창(雷槍)이 번작의 허벅지를 그대로 뚫어 버렸다.
퍼어어어억!
“크윽!”
상상도 못 한 일격이었다.
그나마 다리가 통째로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하지만 당장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된 건 마찬가지였다.
‘화정!’
화르르르륵!
불꽃을 피워 멀리 떨어진 거목에도 불을 붙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기를 회수하여 힘을 불렸다.
하지만 다리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순간의 판단으로 뼈가 파괴되는 건 면했지만, 바깥이 아닌 안쪽 허벅지 근육이 완전히 파열되어 버렸다.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였군.”
번작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연호정이 그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 감각에 대한 주의력은 잃었어도, 네 몸뚱이 안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훤히 보이더구나.”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
연호정은 그 신들린 눈으로 번작의 화정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때였다.
퍼어엉!
폭음과 함께 온몸에 피 칠갑을 한 패율까지 나타났다.
패율이 침을 뱉으며 물었다.
“뭐냐, 이 누런 새끼는? 겁나 강해 뵈는데?”
“방화범입니다.”
“그러시구만. 이 아름다운 숲을.”
“판결 절차 따위는 다 무시할 생각입니다. 제가 판관이 되기로 했지요.”
“그래서 판결은?”
차아아앙!
백룡부를 뽑아 든 연호정의 얼굴은 가히 흉신악살을 방불케 했다.
“판결은 극형, 형벌의 종류는 오체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