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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20화 (519/963)

520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4)

‘뭐지?’

숨을 헐떡거리며 달리는 막원.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비트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몸이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계속 달릴 때다. 죽음만이 가득했던 숲에서, 한 줄기 생로(生路)가 열렸다.

‘대체 저 녀석은……?!’

콰드드드득! 쿠우웅!

후방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드리나무가 통째로 부서지고 바위가 날아다니며 땅에 지진을 일으킨다.

무적의 무용, 광기 어린 무공이 수십의 살수들을 쓸어 버리는 소리였다. 뻗어 나오는 창술가의 기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굉장한 강자다. 하물며 저 연배에…… 한데, 대체 왜 날 돕는 것인가?’

순간 막원은 청년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정체를 당당하게 밝히던 목소리를.

‘무림맹 의정군 대수이자 묵룡부 철기단의 특임 부관입니다.’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라 합니다.’

‘아!!’

정신이 없어서 흘려 넘겼던 소개.

‘저 청년이?!’

막원 역시 강호의 소문 정도는 듣고 있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당시 천하제일가였던 구주명가를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청년 고수. 이후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이 되어 온갖 흑도 문파를 박살 냈고, 이후 최연소로 무종지벽을 돌파하여 천하제일 후기지수란 영예를 안은 천재.

그런 천재 고수가 자신을 도우러 온 것이다.

‘무림맹에서 나섰는가?’

그때, 막원은 또 한 명의 고수가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대단한 고수였다. 초절정 고수의 숙련된 기파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막원은 긴장했다.

파아앙!

순식간에 그 앞에 도달한 사람은 중년의 무인이었다. 허리춤엔 짧고 폭이 넓은 검을 찼고, 왼손에는 단창을 든 사내였다.

막원이 주춤했다.

중년 사내, 패율이 물었다.

“백병신군이오?”

“그렇소만.”

“점창의 패율이오.”

“아!”

“연호정 그놈은 만났소?”

막원의 얼굴에 어렸던 긴장의 빛이 사라졌다.

“만났소.”

“벌써 싸우고 있나 보군.”

대지에 이는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무자비한 살기와 폭발적인 경력이 숲을 뒤흔들고 있었다.

패율이 인상을 찌푸렸다.

“급하다곤 하지만, 또 지 혼자서 싸우는군.”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막원은 순간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패율이 입맛을 다시곤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아군이 있소. 그들의 보호를 받고 계시면 될 거요.”

아군이라면 무림맹의 부대가 분명할 것이다.

“업히시오.”

“뭐, 뭐?!”

“천하의 백병신군이라도 지금 그 꼬락서니로는 무리요.”

“난 괜찮네. 충분히 자네와 보조를 맞출 수 있어.”

“저기서 내 동료가 생사결을 벌이고 있소. 그리고 난 녀석을 도와야 하오.”

“…….”

“자존심은 버리시오.”

막원은 당혹스러웠다.

패율이 한층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빌어먹을, 정말 사람 추해지는군.

막원이 무안한 얼굴로 패율의 등에 업혔다.

“미안하오.”

패율은 대답도 없이 달렸다.

파아아앙!

막원의 눈이 커졌다.

‘빠르구나.’

점창파의 무공은 구파 중 가장 실전적이라 알려져 있었다.

‘실전’이란 곧 빠름이다. 무의 이치를 떠나, 더 빠르고 더 치명적인 일격으로 상대를 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패율의 신법도 그러했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치명적인 방위를 파고드는 신법이었다. 그래서 그의 신법은 무척이나 빨랐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산 몇 개를 타 넘은 패율의 눈에, 마침내 먼지를 일으키며 진군하는 철기단이 보였다.

파바박!

패율이 멈춰 섰다.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그 사람은?”

“백병신군 막원.”

패율이 막원을 내려놓았다.

“이들이 당신을 보호해 줄 거요. 그럼.”

파아아아앙!

패율이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연호정을 도우러 가는 것이다. 그 먼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황석태가 말에서 내려 포권했다.

“용아철기단의 단주 황석태가 백병신군을 뵙소.”

그답지 않게 정중한 인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배도 연배지만, 상대는 무림 최강의 무사 중 하나였다. 힘을 숭상하는 진짜 흑도인에게 있어, 삼군의 이름은 그 자체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제 말에 오르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갈 것입니다.”

막원은 생각이 많아졌다.

용아철기단? 무림맹에 그런 단체도 있었나?

이들이 풍기는 절제된 군기(軍氣) 너머 물씬 풍기는 혈향을 보면, 절대 백도 무림의 부대일 수가 없었다.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지 말자.’

순간 자신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의미가 없는 고민이었다. 죽일 거면 벌써 죽였을 것이고, 설령 이용한다 치더라도 적의 손에 잡혀 죽는 것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철기단은 막원을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물러나기 전, 황석태는 저 멀리 격전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놈이야.”

* * *

푸화악!

피와 살점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길쭉한 창날에 새하얀 광채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번쩍!

널찍한 영역을 횡으로 그어 내리는 창날에 살수 일곱의 목이 날아갔다.

창은 날이 아무리 길다 한들 기본적으로 찌르기를 우선으로 하는 병기였다.

연호정은 달랐다. 찌르기는 물론, 기가 막힌 거리 재기로 참격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나아가 창대로 후려쳐 뼈를 부러트리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그대로 밀어붙여 압사시켜 버렸다.

‘괜찮군.’

한 자루 장창을 귀신처럼 다룬다. 귀신이 창을 휘두르는 건지, 사람이 귀신 들린 창을 휘두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퍼어어억!

회전하는 창날이 살수 하나의 가슴을 뚫었다.

등판을 뚫고 나온 창날, 쏘아진 창풍이 그 너머에 있는 나무를 뚫고 숨은 살수 하나의 어깻죽지까지 날려 버렸다.

‘완전히 손에 익었어.’

광룡부 정도의 병기를 휘두르려면 창술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오랜 시간 창을 다루지 않았다. 언제 쥐어도 달인처럼 다룰 수 있으되, 그 창을 몸에 붙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연호정은 바로 그 수련을, 내가기공 수련과 결합하여 철기단을 상대로 감행했다.

‘주작.’

파파파파팡!

그가 일순 불꽃 같은 보법으로 백여 장을 관통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그 백여 장 안에 있던 스물다섯 명의 살수들은 모조리 목이 뚫려 있었다.

엄청난 범위를 아우르는 창술이었다. 주작의 속도, 백호의 공격력, 청룡의 유연함을 한데 섞은 삼신(三神)의 무공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한 줄기 불꽃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연호정이 땅에 창을 꽂았다.

우우우우우웅!

삼신기(三神氣)가 삽시간에 가라앉고, 연가신단의 모든 진력이 북천(北天)의 흑제(黑帝)를 깨웠다.

북천은 곧 현천이며, 현천은 곧 현무다.

현무공의 북천십이벽(北天十二壁), 진무대제중벽(眞武大帝重壁)의 발현이었다.

번쩍!

연호정의 전면에 반투명한 흑색의 성벽이 생겨났다.

그리고.

콰아아앙!

연호정의 몸이 흔들렸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내장이 진탕되지도, 외상을 입지도 않았다.

치이이이익!

강력한 화기가 진무대제중벽의 표면을 이루는 수기(水氣)의 대부분을 증발시켰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연호정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화포(火砲)를 막은 것이다.

화기(火氣)를 잔뜩 머금은 폭발형 거대 철탄(鐵彈)은 진무대제중벽을 뚫지 못했다.

콰아앙!

묵직한 신법으로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어느새 화포 앞에 도달했다.

“헉!”

“이, 이놈?!”

대포알을 넣는 놈들은 딱 봐도 관부 측 인물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상당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관부의 무공이 아닌, 무림의 무공이었다.

번쩍!

연호정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던 기질,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니 놈들이 익힌 무공의 종류를 알겠다.

반사적으로 살기가 뻗어 나왔지만, 그래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열양공!’

중원 무림의 열양공이 아니었다. 비록 수준은 낮지만, 저 독특한 화기를 머금은 열양공을 연호정은 본 적이 있었다.

연호정의 장창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콰아아앙!

대포의 포구(砲口)로 쑤셔 박은 장창에서 주작화기가 폭발했다. 그러자 사방으로 화약이 터지며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제아무리 열양공을 익혔다 한들 이 정도 폭발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관부인 셋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화르르르륵.

무서운 불꽃이 숲을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익!

연호정의 의복 곳곳을 점령한 불꽃이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그 거대한 폭발에서도 연호정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렇군.”

부르르르르.

산천초목이 떤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연호정이 자아내는 무지막지한 기파에 숲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떨리고, 치솟는 화염은 자꾸만 다른 나무로 도망치려 했다.

화아아아악!

벽라진결, 용포신공, 신장기, 검극사기로 제련된 연가신단이 초고속으로 회전했다.

지잉! 지이이잉!

막대한 양의 진기가 생성되며 연호정의 감각이 극한까지 발달되었다.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거기냐!”

콰아앙!

폭음과 함께 나아간 연호정, 그 속도는 육안으로 좇을 수가 없다.

쾅! 콰앙! 퍼어어어엉!

앞을 가로막는 나무와 바위를 모조리 깨부수며 직선으로 질주하는 호장.

짙은 살기로 물든 지금의 그를 보고 있노라면, 벽산호장이라는 호젓한 별호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푸른 산의 맹장이 아닌 악귀가 되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가히 피에 물든 귀장(鬼將)과 같았다.

‘나와라.’

콰르릉! 콰앙! 콰아앙!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돌아가는 길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의 기감에 포착된 한 사람, 아니 하나의 목표물 앞에 도달하기 위한 최단 거리를 주파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버럭 소리쳤다.

“나와라!!”

콰아앙!

장창 일격에 집채만 한 바위 하나가 네 개로 쪼개졌다.

그리고 쪼개진 바위의 뒤, 피범벅이 된 덩치 큰 서역인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치이이이익!

연호정의 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일었다.

두근두근!

심장을 터트릴 듯 맥동하는 주작화기가 전신의 피를 들끓게 했다.

“얼마 만이지? 오래 지난 것 같은데, 또 이렇게 보니 엊그제 만난 것처럼 생생하군.”

웃음기 어린 연호정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스르르륵.

서서히 치켜 올라가는 장창의 창날에서 귀신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앞.

창을 겨눈 연호정의 오 장 거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보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만큼 의외인 인물이었다.

“……연호정?!”

“옳지. 그래야지. 기억해 내야지.”

하얗게 웃는 연호정의 모습, 도드라진 송곳니가 마치 늑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치이이이익!

부러진 사내의 오른팔에 대어진 부목이 순식간에 불살라졌다.

초절정 고수라면, 지극히 섬세한 내력 조절로 부러진 뼈를 맞춘 후 경화시킬 수 있다. 부러지기 전만큼 자유롭게 쓸 수는 없겠지만, 무공 구현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이다.

푸스스스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피도 허연 연기를 내며 사라졌다. 대체 어떤 식의 내공 운용으로 그런 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연호정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놓쳤던 먹잇감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사실 자체였다.

“오랜만이다, 번작.”

신화교의 십팔무장.

그중 최강의 무장으로 이름 높은 무적의 선봉장, 일호무장 번작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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