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3)
콰아아앙!
대지를 찍어 내는 막원의 철곤에는 무지막지한 힘이 담겨 있었다.
철골도 녹여 버리는 금빛 화염의 파도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힘으로 흩어 낸 것이 아니었다. 대지의 진동으로 뽑아낸 거대한 발경이, 화기(火氣)의 근원인 공기 통로를 지워 버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파훼법이었다. 사내는 막원의 한 수에 내심 깜짝 놀랐다.
파아아아앙!
썩어도 준치라 했던가.
단숨에 공간을 지워 내며 이동한 막원의 손에서 철곤이 빛을 뿜었다.
퍼버버버버벅!
곤봉술이 아닌 창술이었다. 창날은 달려 있지 않았지만, 일격만 허용해도 몸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 파괴적인 연쇄 공격을 회피하는 사내의 움직임도 실로 대단했다.
막원의 눈이 빛났다.
‘빠르군.’
무극이고 성천이고를 떠나, 저놈의 신법 하나만큼은 가히 탄복할 만했다.
무게가 없는 불꽃처럼 움직인다. 다른 모든 걸 제쳐 놓고 신법으로만 승부를 겨룬다면, 성천의 강자와도 큰 차이가 없겠다.
물론 싸움은 신법의 속도 하나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막원이 손을 뻗었다.
콰앙!
사내의 몸이 흔들리며 미친 듯이 후방으로 물러났다.
‘읽혔군.’
팔뚝에서부터 상체 전반을 뒤흔드는 충격파가 실로 엄청났다.
전력이 아닌 장법, 그마저도 내외상이 심한 고수가 뿜은 장력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일격에 상반신이 뒤로 꺾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삼군의 힘인가.’
성천의 고수 개개인의 무력은 대문파 하나의 전력에 필적한다.
그 말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는 지금 다소 피폐해진 구파일방 중 하나의 문파를 홀로 상대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파라라라라락!
막원이 사내에게 접근했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았는데도 이미 코앞이다. 심각한 내외상을 입었다지만, 아직 이 정도 속도는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파바바바박!
철곤의 움직임이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달해 있었다.
사방을 에워싸며 접근하는 공격은 일타, 일타가 필살의 일격이다. 지금의 사내가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 연환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파아아아앙!
극속의 신법으로 물러난 사내.
그 사내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곤영(棍影)이 모든 것을 부숴 버렸다.
사아아아악!
나무, 바위, 풀 등등 모든 외물이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오싹!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위력!’
딱히 기합성을 내지르지도, 필살의 무공을 구사하기 전의 사전 동작이나 진기 운영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내지르는 한 수, 한 수에 궁극의 파괴력이 깃들어 있었다.
피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스치기만 해도 진기의 방벽이 깨지고 육신이 파괴될 것이다.
사내가 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콰아아앙!
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포 여러 개가 불을 뿜었다.
어디서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좌우 사방에서 쏘아지는 화포가 두 사람이 선 공간을 무차별로 침범했다.
콰르릉! 콰르르릉!
폭음이 터지며 숲이 지옥도로 변했다.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몸이 이 지경이라도 화포에 맞진 않는다. 애초에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고, 불이 뿜어지는 그 순간을 읽으면 회피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사내였다.
화르르르르륵!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화염이 화포의 화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쉬익! 콰앙!
막원이 한 발 뒤로 움직였다.
‘열화신장(熱火神掌)이라 했던가.’
매서운 위력이었다.
만듦새, 초식, 투로, 위력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고급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이 무공의, 정확히는 저들 무공의 진짜 대단한 점은 주변에 화기가 더해지면 평소보다 더 막강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퍼퍼퍼퍼펑!
연속으로 쏘아지는 열화신장의 장력을 철곤의 회선타(回旋打)로 모조리 쳐 냈다.
아까와는 전해지는 힘이 다르다. 철곤을 쥔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열화신장의 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퍼퍼펑! 콰앙! 콰아아앙!
열화신장의 경력이 갈수록 강해졌다.
막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화기를 빨아들여 위력을 상승케 하는 무공. 그것은 그 자체로 대단하다 하겠지만.’
위력 조금 더해졌다고 당할 만큼 성천의 이름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 상태였다.
소용돌이치며 쏘아져 오는 열화신장의 빈틈과 약점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 결을 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 푼의 힘으로 장력을 분쇄하고 단숨에 접근, 필살의 일격을 먹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별수 없지.’
이대로 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다.
막원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흘렀다.
‘힘으로 밀고 가는 수밖에.’
번쩍!
연달아서 열화신장을 쳐 내던 사내는, 순간 불길 가득한 전방에서 한 줄기 백광(白光)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
찰나에 찰나를 쪼갠 시간.
사내는 쏟아 내던 열화신장을 회수하고 재빨리 후측방으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막원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콰르르르릉!
불바다를 헤치고 쏘아진 막원의 신형이 단숨에 사내의 코앞에 도달했다.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엄청난 속도였다. 그간 막원이 보여 준 적 없던 신속(神速)의 신법이었다.
막원의 좌권(左拳)이 사내의 복부를 향해 내질러졌다.
콰아앙!
“컥!”
둔탁한 신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십여 장 바깥으로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갈 뻔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단순한 일권인데, 속도도 파괴력도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번쩍!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사내는 곧장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최후의 힘을 쥐어짰을 것이다. 그간 저런 힘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은 독과 내외상 때문, 그렇다면 시간을 끌어서…….’
그 순간, 사내는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어느새 막원이 그보다 먼저 허공에 올라 양손으로 철곤을 힘껏 젖히고 있었던 것이다.
‘……!!’
이건 피할 수가 없다.
막원의 입에서 무서운 기합성이 터졌다.
“으아압!”
부아아아아아앙!
허공을 찢는 철곤에서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사내는 비명도, 신음도 지르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사지에 힘이 빠졌다. 모든 내력을 뽑아내 금제벽(金帝壁)을 세워 막았지만, 초고온의 화기 방벽으로도 이 충격파를 상쇄할 수 없었다.
쿠우우웅!
땅에 처박히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크윽!’
비틀거리며 일어난 사내는 양팔에서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부러졌나.’
오른팔은 부러졌고 왼팔에는 금이 갔다.
갈비뼈 세 대가 나갔고, 이 일격으로 내장이 진탕되어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상대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온몸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아니, 저런 힘을 뽑아내기도 전에 당했을 수도.’
그나마 이 정도면 다행이라 할 것이다. 놀라운 힘이었지만, 마지막에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파아아앙!
어느새 막원이 동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전신을 가득 아우른 새하얀 백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동시에 그의 신법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이 보였다.
사내의 생각이 맞았다. 이 잠깐, 막원은 지나치게 무리한 것이다.
사내가 외쳤다.
“목표물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전원 놈을 쫓아라! 화포는 버려라!”
“허억! 허억!”
간신히 수습했던 호흡이 또다시 엉켜 버렸다.
막원은 내심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너무 과신했어. 고작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천무병장공(天武兵將功)은 쓸 수 있는 모든 내력을 폭발시켜 순간적으로 신체, 내력, 신경의 강화를 꾀하는 비기(秘技)였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 상대가 무(武)의 이치에 통달한 성천급 강자라면 어지간해선 당하지 않을 것이다. 둘 모두 지쳤을 때, 마지막 일격을 가할 때나 필살의 비기로만 쓸 수 있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통했다. 아직 무극의 경지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자신에게도 독이 되었다.
‘계산이 틀렸어. 잔존 내력만 생각할 게 아니라 독이 갉아먹은 체력까지 계산했어야 했는데.’
고작 일초의 공격으로 천무병장공이 풀려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순간의 실수가 생사를 가르는 법. 틀린 판단으로 나 스스로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었구나.’
추격자들과의 거리는 벌어졌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반 각 후면 놈들이 자신을 따라잡을 것이고, 그때는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 할 것이다.
막원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포기는 없다.’
살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쳐 보련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때였다.
‘……?!’
타다닥.
막원은 뜀박질을 멈췄다.
“허억. 허억.”
정리되지 않는 격한 호흡에 쇳소리까지 묻어 나왔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막원이 이내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인가.’
다시 눈을 뜬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운(天運)이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법. 이 막원의 수명을, 저 하늘은 여기까지로 정해 둔 모양이로군.’
막원의 눈이 흐려졌다.
그가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하군.’
놀라운 강자였다. 나이가 젊어 보여서 더더욱 대단했다.
그 무력은, 방금까지 자신이 상대했던 신화교의 사내에 필적할 정도였다. 게다가 단순한 기세 외에, 아수라장을 뚫고 살아온 진짜 강자의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질 좋은 장창을 쥐었고, 허리춤에는 뭔지 모를 무기를 두 자루 매고 있었다.
치리리링!
움직일 때마다 가벼운 쇳소리가 울린다. 옷 안에 쇠사슬로 만든 경갑이라도 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막원이 입을 열었다.
“창인가?”
청년은 말이 없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상대가 창술가라…… 하늘은 참으로 짓궂구나.”
“…….”
“와라. 내 마지막을, 이름 모를 창술가를 상대함으로써 화려하게 불태워 주마.”
그때, 청년의 창이 불을 뿜었다.
번쩍!
엄청난 속도의 창질이었다. 순간 양손으로 창대를 잡고 허공의 한 점을 향해 찌르는데, 그 속도와 자세가 정말이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하던 막원은, 문득 청년의 창끝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
퍼어어어어억!
순간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사방으로 피가 뿌려졌다.
창풍(槍風)이었다. 장창에 걸린 발경을 허공을 격하고 쏘아 내어 사람을 격살한 살벌한 수법이었다.
막원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의 뒤에 살수가 온 줄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데 눈앞의 젊은 고수는, 자신이 아니라 살수를 죽였다.
대체 왜?
“성천십삼좌, 삼군의 일익 백병신군 막원.”
“……?!”
“맞습니까?”
기묘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저 하늘이 정해 둔 수명이 오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네. 내가 막원일세. 자네는 누구인가?”
청년, 연호정이 웃으며 창을 비껴들었다.
“무림맹 의정군 대수이자 묵룡부 철기단의 특임 부관입니다.”
“……뭐?”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라 합니다.”
그때, 저 멀리서 파라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수들이 이동하며 나뭇잎을 건드리는 소리였다.
연호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제 뒤로 달리십시오!”
콰앙!
호쾌한 일 보와 함께 전방으로 돌진한 연호정이 무자비한 창술을 구사했다. 백호공, 백호창술(白虎槍術)이었다.
하얀 야수의 이빨이 몰아치는 살수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내고 있었다.
멍하니 연호정을 바라보던 막원은 순간 연호정의 살기 넘치는 눈빛을 보곤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서 가십시오!”
“어? 아, 알았네!”
막원은 저도 모르게 허둥대며 달려 나갔다.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살수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붉은 화기가 솟구쳤다.
“반병신 된 사람은 그만 괴롭히고 나랑 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