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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17화 (516/963)

517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1)

“벌써 출발한다고요?”

강량이 땀을 닦으며 들어섰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준비해야겠다.”

“쳇,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던 참인데.”

“재미라니?”

“정안 소저랑 신나게 비무 중이었거든요.”

“호오, 이기기 힘들 텐데?”

“내공 없이 술식으로만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죽을 뻔했지 뭡니까.”

“흐음.”

턱을 쓰다듬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남아라, 그럼.”

“예?”

“남아서 수련해. 패율 선배랑 다녀올 테니까.”

“드디어 제가 싫어진 겁니까?”

“응.”

“한 번 망설이질 않으시네…….”

“네 기세가 심상치 않아. 중요한 순간처럼 보인다. 크게 욕심내지 말고, 열심히 수련해 봐.”

강량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은 수련 과정에 있어선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제게 뭔가 큰 변화의 시기가 왔다는 뜻일 터다.

‘하긴 그때도…….’

예전, 양천의 방해 아닌 방해가 아니었다면 무종지벽을 돌파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쉬워하진 않았다. 그 정도에 집중이 깨져 버린 자신의 잘못도 컸으니까. 그런 걸로 만약을 따지면 세상 못 사는 법이다.

다만, 연호정의 말을 들으니 다시 기회가 온 것 같다.

강량이 물었다.

“제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컹. 알겠습니다.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사고 치지 말고.”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겁니까?”

“죽일.”

그렇게 강량을 떼어 낸 연호정이 무복을 입고 창을 들었다.

패율이 그의 허리춤을 힐끔거렸다.

“흑백쌍룡부에 교룡쇄까지 챙겨 가냐?”

“예.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 창으로 푹푹 찔러 대다가 여차하면 또 난도질하겠군.”

“싸우러 가는 거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연호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으냐?”

“예.”

“간만에 몸 제대로 풀겠군.”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듣지.”

거처에서 나온 두 사람이 곧장 묵룡부의 본부를 나섰다.

“응?”

패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철기단 아니냐?”

“맞습니다.”

잠시 후.

히히히히힝!

거친 투레질과 함께 백여 기의 기마가 두 사람 앞에 멈추었다.

선두에는 황석태가 있었다. 평소와 달리 단단한 경장 갑주 차림에 붉은 장창을 든 모습은 위엄이 넘쳤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주도 가려고?”

“훈련은 부단주가 잘 시킬 거다.”

“그래도 되나?”

황석태가 콧방귀를 뀌었다.

“상부에서의 명령이다. 나더러 꼭 함께 가라더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사양 안 하겠네.”

황석태가 기마 두 기를 건넸다.

연호정과 패율이 기마에 올랐다. 훈련이 잘된 기마인지, 처음 보는 사람을 태웠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황석태가 말했다.

“급하게 명령 하달만 받았다. 목적지가 어딘지, 어떤 임무인지는 자세히 모른다.”

“가면서 설명하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절대 경동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누구보다 격정적인 분노를 담은 흑제(黑帝)의 귀안(鬼眼)이었다.

“상황이 급하게 됐어. 여러모로.”

* * *

“허억! 허억!”

숨소리가 거칠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숨소리였다.

심각한 사태였지만, 그는 위기감보다는 어이가 없는 것을 느꼈다.

‘호흡이 벌써 흐트러지다니. 정말 지독하게도 당했군.’

재미있지 않은가.

한 가지 병기에만 통달했을 때는 몰랐던 것을, 열 가지 병기에 통달하니 깨달았다.

바로 모든 병기는 그 모양새에 쓰임의 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그러자 손에 잡히는 모든 병기를 숨 쉬듯 자연스레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백병(百兵)이다. 그는 백병을 다루는 자였으며, 천하 어떤 병장기가 손에 쥐어져도 최고의 기량을 보여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병기의 범위에 한계를 둔 것이 실책이었다.

‘독(毒)도 훌륭한 병기였어. 내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군.’

퍼퍼퍼펑!

그때, 하늘 사방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러한 행위가 목표물인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는 걸 아는데도 등줄기를 훑는 소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느끼며, 막원은 내심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나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인 것을.’

백병에 능통한 무인.

신선제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진 못하지만, 같은 성천의 이름으로 엮인 절대고수가 자신이었다.

신선제왕을 제외하면, 가히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천성이 천성이라 명성에 크게 연연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룩한 무(武)에 자신감은 있었다.

그 자신감이 이번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일단은 움직이자.’

힘 있게 한 발을 내디디려 했지만,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던 욕을 자꾸 하게 된다. 그만큼 초조해졌다는 뜻이리라.

우우우웅.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를 운용해서 치솟는 독기를 잠재웠다.

힘들었다. 독기(毒氣)는 시간이 지날수록 질적, 양적 상승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독기의 먹이가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내공이었다.

독기는 점점 강해지는데 내력은 점점 약해진다. 게다가 그간 입은 부상도 심각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대로 며칠 지나면 사경을 헤매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추격자까지 따라붙었다.

앞이 막막했다.

파아아아악!

그러나 앞길이 막막하다고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원은 비축해 둔 체력을 쥐어짜 달리기 시작했다.

숲의 정경이 순식간에 뒤로 휙휙 밀려났다.

‘아직 다리는 괜찮군.’

한 번씩 독기가 치솟아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것만 빼면 몸을 놀리는 것 자체에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순간 막원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우두둑!

은밀하게 접근해 온 복면인의 비수를 피한 그가 상대의 팔을 꺾었다.

푹!

자신의 비수에 목이 찔린 복면인이 부르르 떨더니 쓰러졌다. 죽은 것이다.

막원이 재차 호흡을 골랐다.

‘반응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

이 또한 독기 때문이었다. 점차 크기를 불린 독기는, 아주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내력을 잡아먹고 더욱 성장했다.

성장한 독기는 폭발하듯 사지로 뻗어 나가려 했고, 그 확산을 막는 데에 또 신경을 써야 했다.

‘별수 없군.’

그는 등에 진 두툼한 철관(鐵棺)을 내려놓았다.

쿵!

무게가 스무 관에 달하는 철관이었다. 그리고 그 철관에는 그가 애용하는 병기 열두 자루가 접힌 채 들어 있었다.

막원의 눈에 결심의 빛이 깃들었다.

치리리링!

그가 철관의 머리쪽 중앙에서 다섯 자 길이의 철곤(鐵棍)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백병을 수족처럼 다루는 그였지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곤봉술과 창술이었다. 위기 상황에서도 가장 손에 익은 병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목숨이 먼저다.’

저 철관을 만들기 위해서 제법 고생했더랬다.

하지만 귀물을 아끼자고 목숨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철관을 벗으니 허리가 시원하고 보행이 가벼워졌다.

부웅! 부웅!

몇 번 철곤을 휘둘러 본 그가 재차 달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앙!

방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평소라면 철관을 벗어도 속도에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체력과 내공이 크게 소모되었다는 뜻이리라.

파바바바박!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이 가벼워지니 내력 운행도 한결 쉬워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전부 독기가 발작하는 곳으로 몰았다. 그러자 독기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정확히는 응축된 것에 가까웠지만, 그걸로 당분간의 발작은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퍼어엉!

막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화포?!’

순간 좌측 저 멀리에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콰아아앙!

쏘아진 화포가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를 파괴했다.

화르르륵!

뜨거운 화염이 부서진 먹잇감을 탐욕스럽게 잡아먹었다.

막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화포라니? 설마 나 하나 잡자고 화포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대체 화포를 어떻게 동원한 거지?!’

황궁과 관부의 힘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약해진 시대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고, 선이라는 게 있다. 제아무리 무림인이 미쳐 날뛰는 세상이라지만, 허가도 없이 관부의 화포를 동원할 수는 없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심지어 한 문도 아닌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폭음을 내며 쏘아진 화포가 막원의 앞과 뒤를 무자비하게 부숴 버렸다.

부우우우우웅! 파아앙!

막원의 돌진은 눈부셨다.

한 손으로 철곤을 회전시켜 화염과 연기를 사방으로 흩어 내며 돌진한다.

파바바박! 콰앙!

막원이 서 있던 곳을 거대한 화염이 집어삼켰다.

어느새 막원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나뭇가지를 밟아 가며 이동하고 있었다.

신기(神技)에 이른 경공술이었다. 살기와 화기(火氣)를 읽어 가며 회피하는 막원의 감각은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

화포의 움직임보다도 빠르게 숲을 가로지르는 막원.

순간 그는 등줄기를 훑는 살기를 느꼈다.

‘공격…… 정면……? 온다!’

막원이 정면으로 철곤을 찔러 넣었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막원의 몸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 힘을 다해 기습을 감행했지만, 중상을 입은 막원의 힘은 여전히 괴수의 그것이었다.

“굉장하군. 이쯤 되면 정면 승부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는데, 이거 아슬아슬하겠어.”

한쪽 무릎을 털어 내며 일어난 상대는, 지금껏 막원을 기습한 살수들과 달리 복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막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아는 까닭이다.

“역시 자네였군.”

“짐작했소?”

“몰랐네. 방금까지는.”

“그랬구려.”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화포를 동원할 수 없었겠지.”

“틀렸소. 내가 아니더라도 관부의 화포를 동원할 만한 사람은 많소이다.”

“뭐?”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중원인과는 다른 모발, 다른 피부,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샛노란 머리카락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기다란 팔다리는 그가 서역에서 온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사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황금빛 화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 말고 누가 또 화포를 동원할 수 있는지 알고 싶소?”

“…….”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제안하리다. 우리에게로 오시오. 우리에게 온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건 물론 나보다도 높은 지위를 얻게 될 거요.”

“그따위 것 흥미 없다고 하였다.”

“이 동네 사람들, 소위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은 참 유별나더군. 돈이나 여색을 탐하는 자들도 많긴 하지만, 유독 그 명성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더란 말이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제멋대로라, 이거요. 어떨 때는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가 하면, 또 어떨 때는 보물을 한 아름 쥐여 준다고 해도 거부하더군.”

“…….”

“알고는 계시겠지. 몇 년만 지나면 우리는 황궁과 관부 전체를 장악할 수 있소. 그렇게 되면 당신네들이 중원이라 부르는 이 대지의 주인도 바뀌게 되는 것이오.”

막원은 말없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싸우든 전쟁은 터질 게요. 당신은 이기는 편에 붙기만 하면 되오.”

“그러고 있잖은가?”

“음?”

막원이 차갑게 웃었다.

“이 땅, 이곳에서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족속들이 이길 싸움일진대, 굳이 너희 같은 사이비들에게 붙을 필요가 있겠느냐?”

매서운 도발이었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아쉽군. 중원인이 아닌 당신은 그래도 우리를 이해할 줄 알았는데, 그새 무림인이 다 되셨소.”

화르르르륵!

사내의 몸에서 황금빛 화염이 타올랐다. 그야말로 엄청난 화력을 지닌, 금제(金帝)의 불길이었다.

막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뚫고 나아갈 길이 막막하여 앞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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