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전력, 그리고 벽 (9)
“끄응.”
연호정이 머리를 짚었다.
“빌어먹을, 아직도 회복이 안 되는군.”
패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 기절한 지 하루도 안 지났다. 닷새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싸우기만 했어.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실제로 몸에 무리가 많이 간 느낌이다. 만약 하루만 더 싸웠다면 진짜로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나마 연가신단 덕분에 이 정도까지 올 수 있었다.
‘생각 이상이야.’
어린아이 주먹 정도 크기였던 내단이 지금은 콩알보다도 작아져 있었다.
내단 형태의 진기는 지구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장점을 보인다. 대신, 의식이 없을 때의 회복 속도는 일반 단전보다 확연히 느렸다.
본래는 폭발적인 힘에서도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은 연호정 특유의 근력과 진기 운용으로 상쇄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며, 다행인 것이다.
“속은 좀 어떠냐?”
“엄청 배고픕니다.”
“죽?”
“그냥 일반식 먹어도 됩니다. 강철도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패율이 콧방귀를 뀌었다.
“오죽하겠어.”
그가 한옆에 쌓여 있던 육포와 물을 건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발경으로 인한 내상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발경으로 내장이 상하면 천하의 고수라도 소화 기관이 엉망이 된다.
물을 마신 연호정이 곧장 육포를 뜯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 가냐?”
“철기단이요.”
“……너 그러다 진짜 죽어, 인마. 아무리 그래도 탈진해서 기절까지 한 놈이. 외상도 그냥 넘길 상처들이 아니야.”
“이 정도 상처라면 그냥 웃어넘기고 기백을 보여 주는 편이 낫습니다.”
“기백?”
“예.”
연호정이 남은 육포를 대충 씹어 삼킨 후 말했다.
“여긴 백도가 아니라 흑도입니다. 흑도에선 기백이 생명이죠.”
패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툭툭.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들어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덩치 좋은 사내가 들어왔다.
바로 황석태였다.
연호정이 육포 하나를 더 씹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단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군.”
황석태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벌써 일어난 건가?”
“그럼 얼마나 대단한 상처라고 여태껏 기절해 있겠나.”
“…….”
“솔직히 기절한 것도 쪽팔려 죽을 지경이다.”
진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이기에 더 무서운 발언이었다. 황석태는 마뜩잖은 표정을 한 연호정을 보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자네는 괜찮은가?”
자네란다. 나이 차이만 해도 십 년 이상인 젊은 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황석태는 물렁물렁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황석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주인 나를 인질로 잡다니.”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황석태라는 인간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편적인 모습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황석태 성격에, 자신을 인질로 삼았다는 사실이 진짜로 수치스러웠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창을 뽑아 들고 생사결을 벌였을 것이다.
“덕분에 서로 좋은 훈련을 하지 않았나.”
“단원들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더군.”
“음?”
“나와 같이 짜고 한 수련이라고 말했다면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가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니다. 다만, 사랑스러운 후배 놈이 몇 마디 지껄이는 걸 듣기는 했지.”
강량을 뜻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라면 그럴 만하지.”
언뜻 보면 검밖에 모를 것 같지만, 의외로 강량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특히나 강량은 흑도 출신이었다. 흑도는 백도보다 살벌한 면이 있지만, 의외로 호쾌한 맛도 있는 동네다.
연호정이 지금 이리 행동하는 것도 그 기백과 호쾌함이 주는 이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이 적당히 면을 세워 준다? 이러면 관계가 아주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다.
평소에는 보여 주지 않던 강량의 정치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자네 성격이면 일부러라도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법한데?”
“물론 그랬다.”
“안 믿었겠군.”
황석태가 인상을 찡그렸다.
“죽으라는 명령 한마디면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목에 검을 박아 넣을 놈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품었더군.”
“좋은 거야. 원래 상관이라는 게 적당히 친근하면서 적당히 환상을 두르고 있어야 밑에 사람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법이거든.”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됐잖나? 그럼 그냥 받아들이게.”
말을 하면서 연호정은 깨달았다. 황석태는 지금 자신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변명이지만, 꽤 귀여운 변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발언일 테니까.
황석태는 가만히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
“뭐, 어쨌든 잘 왔네.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들러야 했으니까.”
“떠난다고?”
“그래.”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군. 철기단의 특임 부관으로 왔다면서, 네 일은 다 하겠다는 건가?”
“백서 그 양반한테 못 들었나? 난 철기단에 한 발 걸친 것에 불과해. 그리고 난 어디까지나 부주와 일을 하는 사람일세. 굳이 자네 눈치 안 봐도 되고, 자네와 일을 함께 할 필요도 없지.”
“…….”
“다만, 명색이 특임 부관이라는 직책까지 받았는데 서로 신고식만 하고 그냥 가는 것도 면이 안 서는 일이지. 뭐라도 도움은 주고 가야 하지 않겠나.”
“도움이라면, 훈련 일정이나 목록을 말하는 건가?”
“그것 외에 도와줄 게 뭐 있겠나? 자네들, 원체 잘하는 사람들이잖아?”
황석태가 불퉁하게 말했다.
“제 얼굴에 금칠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군.”
“음?”
“그럼, 그 잘하는 철기단을 닷새 동안 막아 낸 너는 뭐지?”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나야 끝내주게 잘난 놈이지.”
황석태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몸을 돌렸다.
“몸은 멀쩡한 것 같으니 따라와라. 부하들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지.”
연호정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면은 우리 쪽 노친네들보다 훨씬 낫구먼.”
광활한 평야에 일천의 기병이 도열했다.
황석태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부상이 심한 사람 있나?”
조용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중상자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너희를 그런 꼬락서니로 만든 인간은 멀쩡한데, 너희가 앓는 소리를 내면 안 되지.”
그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만 나오게.”
잠시 후,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철기단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흠모, 존경, 질투, 분노, 경외 등 어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그들 눈에 선연했다.
황석태가 말했다.
“본단의 특임 부관으로 온 연호정이다. 부주님의 명령이며, 한시적으로 본단의 훈련을 담당할 것이다.”
여전히 철기단은 조용했다. 하지만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이 하나같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들은 연호정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백도에서 자랑하는 후기지수이며, 젊은 층에서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천재였다.
그들은 연호정의 무력을 닷새 동안 몸으로 깨우쳤다. 하지만 그것과 훈련을 담당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황석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인사는 알아서 하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인사는 닷새 동안 찐하게 했는데 더 할 게 뭐가 있겠어. 그렇지 않나?”
여전히 철기단은 요지부동이었다. 입을 뻥긋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해선 이미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거고, 무력이야 어제까지 봤으니 그것도 더 증명할 필요는 없겠지.”
“…….”
“훈련도 잘했다. 마지막에는 정말 고지를 점령당하는 줄 알았어. 백병전에 능하다 해도 기마 전술에 더 익숙할 텐데, 잘 날뛰더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정확히는, 없애야 할 단점이 많다고 보았다.”
황석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호정이 어떤 단점을 보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계속 말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장단점이 다르지. 부대도 똑같다. 철기단은 충분히 강해. 당장 무림맹만 해도, 하나의 부대만 생각하면 철기단과 정면 승부를 겨룰 만한 부대는 없을 거다. 적어도 지금은.”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 수장이 하는 말이다. 철기단원들의 눈빛이 또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백병전에 능하다 한들 근본적으로 기마 부대인 이상 한계도 명백하다. 하물며 집단전의 능력을 이 정도로 끌어올린 부대에게, 장점을 더 부각시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
“일단 단점부터 없애고, 하나의 완전무결한 부대로 탈바꿈한다. 장점을 다시 강화하는 것은 그때부터다. 그게 내 판단이다.”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말했다.
“인사는 더 할 게 없네. 다만 시간이 없으니 대주와 부단주들을 모아 주게. 훈련 목록과 일정, 세부 항목을 짜야겠어.”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언제 떠날 생각이지?”
“이삼일 후에.”
“그 안에 훈련 계획을 잡는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철기단의 능력은 충분히 봤어. 심지어 맨몸으로 부딪쳐 보기까지 했지. 그만큼 봤는데도 훈련 일정 하나 못 짜면 그건 바보지.”
느닷없이 바보가 된 황석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세작으로 왔을 때 묵룡부의 인사 개편을 맡은 사람이 나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골조는 내가 만들었어. 철기단의 훈련 일정을 짜는 것 정도야 이틀이면 충분해.”
* * *
“……음.”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이게 사실인가?”
정보단주가 고개를 숙였다.
“십 할의 확률이라 자신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참,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어떻게 일을 벌이려고만 하면 항상 이런 난관을 안겨 주는지.”
고개를 젓던 그가 물었다.
“특임 부관은 어디 있나? 철기단과 함께 있나?”
한옆에서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훈련 일정을 전부 짰고, 지금은 훈련 초기 단계를 단주와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좋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요.”
양천이 피식 웃었다.
“또 그 구렁이 같은 입담으로 철기단주를 구워삶은 모양이군.”
“…….”
“특임 부관을 부르게. 최대한 빨리.”
“예.”
반 시진 후.
“부르셨소?”
양천이 툴툴거렸다.
“지금은 묵룡부 소속인데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연호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투를 바꿨다.
“무슨 일입니까?”
“한결 듣기 좋군.”
양천이 손에 쥔 문서를 연호정에게 날렸다.
문서를 받아 읽은 연호정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진짭니까, 이거?”
“십 할 확신한다더군.”
“빌어먹을, 어째 일 하나 해 보려고만 하면 자꾸 사건들이 터지는지.”
“내 말이 그 말이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내일 떠난다고 했나? 하루 정도는 일정을 당겨도 괜찮겠지?”
“그래야지요.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병력은? 안 붙여 줘도 되나?”
“안 붙여 줘도 됩니다만…… 아무래도 있으면 더 좋기야 하겠지요.”
“철기단이면 되겠나?”
“일부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출정 허가를 받을 필요 없네. 준비되는 즉시 출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