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전력, 그리고 벽 (8)
“뭐라?”
양천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물었다.
“싸운다고? 아직까지?”
“그렇습니다.”
백서의 얼굴도 그답지 않게 떨떠름했다.
양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특임 부관으로 임명된 지 닷새가 지났네. 지금 자네 말은, 연호정 그놈이 황 단주를 인질로 잡고 일천의 기병들과 닷새 동안 싸우고 있단 말인가?”
“정확히는 사흘입니다. 훈련을 나갔던 구백 명의 철기단이 이틀 만에 전부 복귀했고, 진형을 짜서 황 단주를 구출하려 하고 있답니다.”
양천은 어이가 없었다.
“총 일천의 병력을 상대로 사흘을 버티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호정의 무력은 굉장하다. 당장 묵룡부 총단에서도 양천을 제외, 연호정과 맞상대가 가능한 자를 찾으라면 막막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용아철기단은 묵룡부 최강이다. 하물며 그 숫자가 일천이다. 어지간한 군소 문파는 작전 없이 힘으로만 밀어붙여도 반 시진 안에 끝장낼 수 있는 전력이었다.
“십이지신 몇이 그 광경을 보았는데,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해서 저도 직접 봤습니다만…….”
백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무공, 지략, 전술 등을 순간순간 발휘하여 일천 기병을 모조리 상대하고 있습니다.”
“허어!”
양천은 혀를 내둘렀다.
“그게 가능한가?”
물론 양천은 가능했다.
성천의 강자는 인간의 상식으로 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양천 역시 당당히 성천에 이름을 올린 절대고수이며, 작정하고 철기단을 상대한다면 별 전략이나 전술 없이 섬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무극에 오르지도 못한, 아니 무극에 오른다 한들 제힘을 가꾸지 못한 자는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철기단이었다.
특히 철기단의 진법은 공수가 완벽하여, 소수 정예나 집단을 가리지 않고 강하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로군. 직접 봐야겠어.”
* * *
“이 정도로는 한참 모자라!”
콰르르릉!
내지르는 철창에 무지막지한 내력이 실렸다.
한 손에 쥔 창을 과격하게 찌르는 행동일 뿐이지만, 그 창날 주변에서 이글거리는 발경의 힘이 상상을 초월했다.
퍼퍼퍼펑!
우악스러운 일창(一槍)에 십여 명의 철기단원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들은 기마술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기마는 일반 보병의 열 배의 힘을 낸다. 훈련된 기마는 그 자체로 맹수이며, 그 돌진력은 무림 고수의 힘으로도 쉽게 받아 내기 힘들 만큼 막강하다.
하지만 그 고수의 수준이 연호정 정도가 되면 얘기가 다르다.
연호정의 반사 신경과 경신술의 오묘함은 중원 정점을 달린다. 제아무리 기마를 모아 돌진한다 한들 부딪치지 않고 무사들만 날려 버리는데, 그 초식의 시기적절함이 천하의 철기단으로서도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기마를 포기하고 백병전으로 맞섰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계속 기마전을 고수했다면 체력도 제대로 깎지 못하면서 기마들만 다쳤을 것이다.
문제는, 백병전으로도 연호정을 어찌하기 힘들다는 현실이었다.
쉬이이이이익!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창질 한 번에 살벌한 경풍이 일며 대지가 갈라졌다.
퍼억!
돌진하던 단원 셋이 그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창대에서 뿜어진 경력이라 살았다. 창날로 뿜어낸 경풍에 맞았다면 셋 모두 사지 두어 군데는 날아갔을 것이다.
부웅! 부웅! 부우웅!
손목이 돌아가며 창대가 무섭게 회전했다.
“돌격!”
파바바박!
삼십여 명의 단원들이 진법을 형성하며 돌격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아앙!
그들이 돌진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치고 들어간 연호정의 양손에서 불이 뿜어졌다.
퍼버버벅!
선두의 일곱 단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데, 이미 기절한 뒤였다. 그 뒤에 선 단원들의 시야와 이동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창날의 반대편, 창대 끝으로 펼쳐 낸 무자비한 곤봉술이었다. 창날은 아니었지만, 작정하고 힘을 실었다면 몸에 구멍이 뚫렸을 속도였다.
순식간에 진형을 흐트러트린 연호정이 강렬한 진각과 함께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상처 입은 들개 떼 사이로 뛰어든 산중 대호와 마찬가지다. 연호정의 몸이 회전할 때마다 사방으로 쏘아지는 창격이 그들의 어깨와 허벅지, 옆구리를 찢었다.
“크으윽!”
“흡!”
철기단원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간다.
누구 하나 연호정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천하의 철기단이라도 순간적으로 진형이 무너진데다가, 빈틈을 파고드는 연호정의 약점 공략이 너무나도 시기적절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로 끝이냐?”
수백의 철기단이 주춤거렸다.
이곳은 절벽 끝이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길이 좁아지는 지형, 한꺼번에 덤빌 수 있는 인원수는 많아야 오십이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철기단은 강했고, 집단 전술에 능했으니까.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는 한 개 대대의 절반만 보내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연호정이었다.
초절정의 영역에서도 끝을 본 데다가, 순간 판단력과 반사 신경은 천하에서 손꼽힌다. 지형의 이점은 물론 내공을 제외, 체력만큼은 성천의 고수에 비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지구력이 좋다.
그런 연호정이 지키고 있는 절벽 위는 그야말로 철옹성을 방불케 했다.
“대단하군요.”
한참 멀리 떨어진 협곡 위에서 연호정과 철기단의 대치를 지켜보던 백서는 혀를 내둘렀다.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저 일당백의 철기단 중 누구 하나도 특임 부관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흐음.”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연호정이 강하긴 하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야.”
“예?”
“지형적 이점, 특유의 반사 신경, 어디서 쌓았는지 모를 최고급 실전 능력에 말도 안 되는 체력과 순간 폭발력까지. 어느 것 하나 범상한 것이 없지.”
양천의 말을 들은 백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반사 신경과 궁극의 전투 감각, 일천에 달하는 무사들과 싸워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지구력에, 지구력 못지않은 폭발적인 힘까지.
그중 어느 하나만 제대로 갖추어도 그 장기를 극대화하여 고수가 될 수 있다. 한데 연호정은 그 많은 장점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괴물은 괴물이군.’
양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진짜 대단한 건 저놈의 살기일세.”
“예?”
“잘 보게.”
파아아아!
기다려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각 대의 대주들의 명령에 따라 각기 다른 부대에서 차출된 십여 명의 단원들 다섯 개 조가 진형을 형성해 돌진했다.
성향이 전혀 다른 진법 다섯 개가 동시에 덤벼든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혼자서 다 막을 수는 없다.
그때였다.
번쩍!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가장 좌측에서 몰려들던 삼대 열 명의 단원들이 움찔했다.
퍼버버버벅!
그 순간의 멈춤은, 고수 간의 승부에서 승패를 뒤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엄청난 신법으로 좌측 진형의 단원 여섯을 쓰러트린 연호정이 탄력 가득한 보법을 이용, 횡으로 돌진하던 사십여 명의 단원들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으아아압!”
콰앙!
백호군림보가 연신 폭발하며 철기단원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기다란 장창을 가로로 누인 채 돌진하는데, 누구 하나 연호정의 힘을 막지 못했다.
단창, 군도로 머리를 쪼개려 해도 찰나지간 상체를 비틀며 모조리 피해 내는데, 그 유연성이 보고도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상대하는 것 같다. 대주들은 비롯한 단원들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파아앙!
진형을 싹 다 무너트린 건 물론, 밀어 내는 동시에 차고 밟고 후려치며 이십여 명의 단원들을 기절시켜 버렸다.
이 정도면 사람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거대한 공성추가 살아 움직이며 철기단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후욱!”
뒤로 물러난 연호정이 숨을 골랐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이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데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우우우우우웅!
응축될 대로 응축된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막대한 양의 진기를 사지로 퍼트렸다.
다소 창백하던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본래대로 돌아왔다. 숨소리는 여전히 골랐고, 흐르는 땀도 금세 증발해 버렸다.
연호정이 씨익 웃으며 외쳤다.
“고작 그것밖에 못 하나! 다시 덤벼 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엄청난 위엄과 살벌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듣는 이의 등줄기를 훑는 맹수의 포효다. 그러면서도 홀로 창을 겨누며 수백의 철기단을 상대하려는 그 배포가 대단해 보였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피가 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것을 해내고 있기에 더 대단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저놈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시 그랬군.”
“예?”
“깨달음이 있었는지, 예전보다 진기가 훨씬 더 단단하게 응축되었더군. 내단처럼 뭉친 진기가 양적, 질적 향상을 이뤘단 말일세.”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 정도의 경지에서 단 한 번의 깨달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한데 고작 몇 달 만에 또 새로운 경지에 진입했단다. 이제는 괴물이라는 단어로도 연호정을 설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놈이 천재라 한들, 그만한 깨달음을 완전히 체화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야. 하면, 그 깨달음을 체화하기에 가장 좋은 수련이 뭘까?”
“…….”
“실전일세.”
“……!”
“놈은 지금 철기단을 상대로, 한 단계 상승한 자신의 무공을 완전히 몸에 붙이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진기 운용이 더 섬세해지는 동시에 능숙해지고 있잖나.”
“허어……!”
“특히 저 살기가 대단하군. 내단으로 응축된 진기를 곧바로 상단전으로 끌어 올려 살기를 퍼트리는데, 가히 하나의 기예(技藝)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양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살기마저도 섬세하군. 원하는 대상, 원하는 범위로 정확하게 쏘아 내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네. 하물며 아차 하면 당할 수도 있는 실전에서.”
“…….”
“재능이나 경험 이전에 배포가 없으면 불가능한 짓이야. 심장에 강철을 두른 건 알았지만, 저런 미친 짓에 가까운 수련까지 감행할 줄은 몰랐군.”
백서가 고개를 저었다.
“소신의 눈에는 미친 짓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워낙에 압도를 하고 있으니…….”
“미친 짓 맞네. 자신만 수련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
“예?”
양천이 턱으로 철기단을 가리켰다.
“보게.”
백서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르르르르릉!
제아무리 뚫을 수 없는 철옹성이라 한들, 이대로 물러나면 철기단이 아니다.
또다시 오십여 명이 진형을 형성하며 돌진하고, 그 뒤로 이차 대기 인원들도 대형을 이루어 달린다. 그러한 대형이 무려 열 개, 즉 오백 인원이 연호정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새 귀신처럼 사라진 백여 명의 철기단은 양옆 절벽을 타며 연호정의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기절한 황석태와 패율, 강량이 있는 곳이었다.
“자존심 강한 철기단이, 상대에게 홀려 무작정 돌진만 하던 철기단이 비로소 머리를 쓰고 있네.”
“그 말씀은……?!”
“그래.”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훈련을 시키고 있는 거라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철기단까지. 하긴, 철기단이 언제 고수 하나를 잡자고, 납치된 상관을 탈환하려고 작전을 짜 봤겠나?”
“……!”
“신고식을 어떻게 치를까 궁금했는데, 반대로 혼자서 천 명의 신고식을 감당하고 있었군.”
백서가 탄식했다.
“그릇이 다르군요.”
“그래서 내 것으로 삼고 싶은 게지. 무력을 떠나, 저 정도 그릇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양천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세. 꼴을 보아하니 이틀 안에 끝날 것 같네.”
양천의 예상은 정확했다.
연호정과 철기단의 승부는 정확하게 이틀이 더 지나 끝났다.
놀랍게도, 그동안 철기단의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대부분이 중경상에 그쳤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반면 승부 막바지쯤엔 연호정도 중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넘쳤다.
그날, 일천의 철기단 모두가 연호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강자를 향한 진심 어린 존경의 표현이었다.
연호정은 그들의 인사를 받곤 웃으며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