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전력, 그리고 벽 (4)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부선의 인사에 엽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느냐?”
“네. 그럭저럭이요.”
엽성은 저 멀리 떨어져 걷고 있는 전홍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전홍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다시 부선을 향한 엽성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놀랍도록 성장했구나.”
그는 부선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부선은 충분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다만, 천하를 논할 만한 그릇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능만 치자면 셋째인 전홍이 자신에 비할 만했더랬다.
한데 오늘 보니,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정작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선은 무종지벽을 돌파했고, 전홍은 오른팔이 잘린 채 기도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습하지 못한 기도만으로도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긴 했다.
“듣기는 했지만, 정말 무종의 벽을 부쉈구나.”
들었지만 믿기지는 않았다. 부선의 재능을 아는 까닭이다.
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어요.”
엽성이 고개를 저었다.
“운만으로 부술 수 있는 영역이라 한다면, 그 벽을 뚫기 위해 고생하는 무수히 많은 고수들에 대한 실례다. 재능이든 노력이든, 너는 충분히 대단한 성과를 낸 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엽성 역시 부선에게 어느 정도 운이 따랐다고는 보았다.
그러나 운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엽성은 부선의 노력과 독기를 순수하게 인정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비무 한 번 부탁드려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부선으로서는 제법 큰 용기를 낸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흑도에서의 비무는 정파의 비무와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냥 실전이나 다를 바 없다. 비무를 벌이다가 죽으면 본인 책임이며, 어떤 암수를 써도 용인되는 싸움인 것이다.
거기에, 그들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구실만 하나 잡으면 어떻게든 죽이려 하는 사이. 말이 오라비고 사형제지, 결국은 서로를 빛나는 미래를 막는 장애물처럼 여길 뿐이다.
지금 부선은, 그걸 아는데도 한 수 가르쳐 달라 말하는 것이다.
엽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고마워요.”
부선이 허리를 숙였다.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라.”
잠시 후, 부선이 사라지자 엽성이 피식 웃었다.
“많이 컸군.”
제 무공이 오라비보다 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리 말하는 걸 보면, 기질 자체가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무공의 성장보다도 소중한 성정의 발전이다.
‘저런 모습까지 보여 준다면, 예전처럼 마냥 아래로 볼 수는 없겠어.’
뒷짐을 진 엽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넓군. 오랜만에 왔더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그가 나직이 투덜거리며 길을 걸었다.
잠시 후.
대전에 도열했던 묵룡부의 수뇌부 중 둘이 그를 따랐다.
* * *
팔짱을 낀 것도 모자라 버젓이 다리까지 꼰 연호정의 모습은 그답지 않게 제법 심각했다.
‘창왕이라.’
창왕(槍王) 소현립(蘇炫笠).
무림은 대개 정파와 사파로 구분되고, 구분된 두 파벌의 연맹체가 무림을 대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강호 무림에는 무림맹과 묵룡부를 제외하고도 무수히 많은 고수와 집단이 있었다.
심지어는 정파나 사파,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채 자유로이 천하를 방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단순 숫자만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무사들의 숫자가 정사(正邪)를 압도할 것이다.
성천십삼좌 중에도 정파나 사파에 속하지 않은 고수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각 파벌에 속한 무림인들은 그 정사지간(正邪之間)에 있는 고수들의 무력이,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둔 이들보다 부족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편견과 아집을 비웃듯, 성천십삼좌에는 정사지간의 고수가 넷이나 존재했다.
창왕 소현립도 그중 하나였다.
소현립이 무림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이제는 흑도 연맹의 총수가 된 투왕 양천과 비슷했다.
기인에게 무공을 사사한 그는 사십이 넘은 나이로 세상에 나와, 정확히 백 번의 비무행을 벌였다. 그리고 그 백 번의 비무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양천처럼 피와 눈물이 섞인 패배를 거듭하며 강해진 것이 아니라, 무림에 출도했을 때 이미 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전승의 전적을 이루진 못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소현립이 이길 수 있는 싸움만, 그러니까 고만고만한 무인들만 골라서 비무를 했다고 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비난도 소현립의 백 번째 비무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진 뒤에는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혈청신마(血聽神魔) 율산이었지.’
율산.
전성기 때는 정파와 사파 모두를 압도하며 무림을 삼등분했던 파벌 중 하나인 마도(魔道)를 대표하는 마지막 고수.
중원 무림의 살아 있는 공포로 불리던 율산이 소현립의 마지막 상대였다.
그리고 소현립은, 당시 화산파의 전대고수들이 펼치는 매화검진(梅花劍陣)조차 박살 내 버린 율산을 열두 시진이 넘는 사투 끝에 죽이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때부터 소현립의 별호는 창왕이 되었다. 그리고 창왕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무림 최강자라 불리는 성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은 마도라는 간판을 거는 것조차 금기가 될 정도로 마도가 죽어 버렸다. 혈청신마는 아니었어. 그는 스스로를 당당히 마도의 적자라 부르짖던 진짜 고수였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혈청신마의 무공은 당대 성천의 강자들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소현립은 불혹의 나이로 무림에 출도해 환갑이 되기 직전 율산을 패퇴시켰다.
성천의 일좌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무력이었다.
‘창왕은 문파도 세우지 않았고, 제자나 사형제도 없다고 하였다. 그저 자신의 창 한 자루에 인생을 건 구도자라고 하였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천이 준 서신에 적힌 소현립에 관한 정보를 보면, 그는 구도자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쉬운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다는 얘긴데.’
연호정은 성천십삼좌 중 신선제왕(神仙帝王)으로 구분되는 열 명의 초인들을 떠올렸다.
- 권신(拳神) 무허대사(無虛大師)
- 검선(劍仙) 탁무(倬武)
- 마선(魔仙) 혁련휘(赫連輝)
- 음제(音帝) 하은교(河恩嬌)
- 도제(刀帝) 종리백(鐘里柏)
- 검제(劍帝) 남궁승(南宮丞)
- 창왕(槍王) 소현립(蘇炫笠)
- 암왕(暗王) 당형(唐衡)
- 비왕(飛王) 공손백룡(公孫白龍)
- 투왕(鬪王) 양천(楊擅)
저들 열 명이야말로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혁련휘를 주목할 만했다.
혈청신마 율산은 스스로를 중원 마도의 적자라 표현했지만, 기실 그러한 호칭은 오히려 혁련휘가 가져가야 옳았다.
무너질 대로 무너져 이제는 문파조차 몇 찾아보기 힘든 마도의 절대자.
스스로 마(魔)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누구도 찾지 못하는 미지의 지역에 궁전을 세우고 마의 명맥을 잇고 있는 마선(魔仙).
‘세상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자.’
혁련휘가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권신 무허대사, 당대 천하제일권이자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노승의 발언 때문이었다.
‘허허, 마(魔)에 몸을 담아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진짜 강자로다. 지금의 나조차도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성정이 순후하여 다행이야. 저만한 자가 작정하고 피의 행보를 벌였다면, 중원이 큰 병을 앓았을 것이다.’
그 한마디가 혁련휘라는 정체불명의 괴인을 성천의 강자로 불리게 하였다. 무허대사의 발언이 얼마나 대단한 무게를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혁련휘를 포함, 정파와 사파를 제외하면 신선제왕 중 네 명이 중도(中道)를 걷는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들 네 사람을 전부 아군으로 만드는 작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애초에 그들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왕 그러한 임무를 맡은 이상,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그게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창왕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작전…… 그것 하나만 생각해선 안 돼.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한 번의 임무가 중요해.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
연호정이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형님!”
“음?”
상념에서 벗어난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강량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그냥 이런저런 생각. 근데 왜?”
“밖에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연호정은 자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곤두서니, 그 즉시 누가 찾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라.”
“예.”
강량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연호정은 스스로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뭐야.’
이곳으로 올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답지 않게 자꾸 실수를 하는군.’
여기는 적지다.
동맹을 맺었다지만, 아직은 적지라고 생각해야 옳았다. 그렇다면 언제고 마지막 한 가닥의 감각만큼은 날을 세워 둬야 했다.
한데 지금은?
‘위험하군.’
묵룡부로 오는 길에서야 패율과 강량이 있었다지만, 이곳에서 일이 터지면 두 사람이 막기는 힘들다.
연호정은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렸다.
‘정신 차리자. 집중하는 건 좋지만, 본래의 나를 잊어서는 안 되지.’
잠시 후, 정안이 들어왔다.
“연 대수님.”
“왔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인데? 그새 진기가 한층 깊어졌어.”
정안 역시 마주 웃었다.
“대수님답네요. 만나자마자 무공 얘기부터 하는 거예요?”
“제일 큰 변화잖아? 딱 봐도 고생한 티가 나.”
“정말요?”
“욕은 해도 빈말은 안 하는 주의야.”
“욕은 또 왜 해요?”
정안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많이 밝아졌군.’
진기만이 아니었다. 묵룡부는 정안에게 있어서 원수의 조직인데,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오히려 성정이 밝아지고 진기가 깊어졌다.
어느 곳보다도 집중하기 힘든 곳에서, 누구보다도 집중력 있는 훈련을 한 결과다. 소림의 승려들이 일부러 면벽 수련을 하는 것처럼, 정안의 고단한 수련 역시 좋은 성과를 낸 모양이었다.
“무림맹에서의 일은 잘 처리가 되었나요?”
“덕분에.”
“다행이네요.”
“너도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다. 안심했어.”
“그러면서 먼저 찾아오게 만들어요? 생각도 안 했죠?”
“생각은 했지.”
“참나.”
밝아진 모습이 어쩐지 묵비를 연상케 했다.
피식 웃던 연호정이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어떠냐? 이를테면 연심이라든지.”
“아…….”
정안의 얼굴이 흐려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몇 번 만난 적이 있긴 한 모양이군.”
“사실, 오늘 아침에 봤어요. 직접 찾아와서…….”
“찾아왔다고? 연심이 너에게?”
“네.”
“왜?”
정안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떠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떠난다…… 그럼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