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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10화 (509/963)

510화. 전력, 그리고 벽 (3)

태사의에 앉은 양천의 자태는 그야말로 황제 못지않았다.

그의 좌우에는 무수히 많은 고수가 살짝 허리를 숙인 채 도열해 있었다. 무복이 아닌, 황궁의 고관대작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은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장엄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마치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인 황제의 대전을 보는 듯했다. 그리 고급스러운 치장이 된 대전은 아니지만, 고수들의 기도와 숨이 막힐 정도로 날 선 분위기가 이곳을 그 어떤 곳보다도 고귀하고 위험한 장소로 인식게 한다.

양천의 뒤에는 세 명의 제자가 서 있었다.

대제자 엽성, 이제자 부선, 삼제자 전홍.

엽성은 특유의 거친 기도를 일부러 수습하지 않았고, 부선도 본인만의 날카로운 기운을 제어하지 않았다. 강량에게 오른팔이 잘린 전홍 역시 사나워진 기파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양천의 바다와도 같은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를 너무나도 쉽게 품고 나아가 이곳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

고요하기 그지없는 대전.

바늘 하나라도 떨어지면 그 소리가 천둥소리를 방불케 할 것 같은 침묵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옷자락 한 번 펄럭이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태사의에 앉은 양천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새삼 지금 이 순간이 놀라웠다.

‘무림맹과의 연합이라…… 내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막상 이러한 순간이 오니 기분이 참으로 복잡하군.’

무림맹 수뇌부들과의 짧은 만남?

그때는 이러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원하는 대답을, 서로가 원하는 신뢰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 자리는 그러한 자리였다.

지금은 달랐다.

실제로 무림맹에서 파견한, 무림맹의 대표인 무사가 자신의 성으로 들어왔다.

그 사실이 양천의 기분을 독특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 스스로도 나의 감정을 모른다…… 드문 경험이군.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눈을 감은 양천,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수백 년간 서로를 물어뜯던 원수조차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무림이란, 세상이란 그런 것이지.’

양천은 새삼 감탄했다. 시대마다 강호가 토해 내는 의외성에, 그 의외성을 필연으로 만드는 피비린내 그득한 인과성에.

잠시 후.

닫힌 대전의 문 너머에서 백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주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번쩍!

양천의 눈이 뜨였다.

“뫼셔라.”

우우우우웅.

양천의, 투왕의, 묵룡부주의 목소리가 하나의 울림이 되어 대전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크르르르릉.

대전의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열리는 소리 자체가 달랐다. 마치 집채만 한 야수가 으르렁대는 듯, 대전을 울리는 굉음이 섬뜩하고도 웅장한 소리를 토해 냈다.

저벅.

태사의에선 보이지 않는 입구.

그곳에서부터 대전 중앙까지 이어진 기다란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

조심스러움이라는 눈곱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당당한 발걸음이다.

하지만 그 소리가 오만하게 들리진 않았다. 한없는 자유와 위풍당당함, 그리고 상대를 향한 존중이 묻어나는 발소리였다.

고작 발소리만으로도 상대의 기질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양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더 강해졌군.’

다시 마주할 때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양천은 비로소, 저 발칙한 파견원이 무극으로 가는 빛의 길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었다.

허상이면서도 무극 그 자체인, 그 영역에 진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표현을 써도 이해하기 어려운 신세계.

‘몇 달이 지났다고 그때와는 또 다른 경지에 들어섰는가. 참으로 놀라운 녀석이야.’

잠시 후.

계단 위로 연호정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어깨, 상체, 이후에는 두 다리까지.

서서히 드러나는 연호정의 자태 역시 눈이 부셨다. 긴 여정으로 의복의 빛이 조금 바랬지만, 특유의 신비로운 기도가 의복에 묻은 때마저 모조리 가려 주었다.

엽성의 눈이 빛났다.

그는 내심 연호정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전혀 다르다.’

길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

그때는 적당히 피로하고 적당히 꼿꼿한 학자와 같았다면, 지금은 별세계에서 떨어진 신비의 고수 같은 분위기를 마구 뽐내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무인 특유의 날 선 기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공을 익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무공과는 상관없이, 사람 자체가 대단해 보였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듯한 기세. 주변 환경이 어떻든 홀로 고고하다는 느낌을 제대로 보여 주는 기가 막힌 존재감이었다.

‘적어도.’

엽성이 힐끔 양천을 바라보았다.

‘아무에게나 칭찬을 하는 분은 아니지. 확실히 저 정도라면.’

뭐가 되었든, 범부는 상상도 못 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스륵.

이윽고 연호정이 태사의로 이어지는 붉은 융단 중앙에 섰다.

그의 뒤에는 패율과 강량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기세 역시 굉장했지만, 연호정을 향한 집중도가 원체 강해서 그들을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양천과 연호정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양천이었다.

“오셨는가.”

가만히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 의정군 총책임자 연호정이 흑도 연맹 묵룡부의 총수 양천 대협을 뵙습니다.”

멋들어진 언행이었다.

마치 타국의 황제를 알현하는 사신처럼, 연호정의 모습은 고급스러운 예법으로 가득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연호정이 저렇게 나와 주는데, 양천이라고 사석에서 보여 주는 모습으로 대할 순 없었다.

연호정의 저런 언행은, 묵룡부주인 자신의 면을 세워 주는 것인 동시에 맹부(盟府)의 동맹 관계를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공식 서신은 있는가?”

“그렇습니다.”

양천이 좌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묵룡부주의 새로운 친위대, 묵룡대(墨龍隊)의 대주가 서 있었다.

“받게.”

“예.”

총총걸음으로 연호정에게 다가간 그가 서신을 건네받곤 계단 위로 올라섰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룡대주가 서신을 펼쳐 읽었다.

“친애하는 흑도 연맹의 총수이자 강호의 위대한 고수 묵룡부주께 무림맹 봉공 일동이…….”

묵룡대주의 목소리는 굵고 울림이 있었다. 무림맹에서 보낸 공식 서신을 읽기에는 아주 제격인 음성이라 하겠다.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서신을 읽는 와중, 양천과 연호정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어떤 전음도 없이, 오로지 눈빛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작은 잡았나?’

‘어려웠지만 잡았소.’

‘무림맹 분위기가 말이 아니겠군.’

‘꽤 살벌하지.’

‘여기서도 할 일이 많을 걸세. 긴장하시게.’

‘양 부주께서도 그래야 할 것이오.’

잠시 후, 묵룡대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하, 무림맹 십이봉공 전(傳).”

서신을 다시 접은 묵룡대주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무림맹이 반 봉문의 형태로 운영될 것이라고?”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함께 손을 잡자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내빼긴가?”

자칫하면 분위기를 냉각시킬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연호정은 그의 말을 천연덕스럽게 받았다.

“곰이 겨울잠을 자는 것은, 단순한 생존 이전에 더 나은 봄을 맞이하고자 하는 전략이지요.”

“그런가?”

“예.”

“하나, 파견원인 그대가 이곳에서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무림맹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을 텐데.”

“그래서 완전한 봉문이 아닌, 반 봉문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냥 봉문이든 반 봉문이든, 결국 대외의 업무를 축소하겠다는 뜻은 분명한 것. 자칫 본부의 힘만으로 적들을 상대할 일이 생긴다면 어찌하겠는가?”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호오, 자네가 무림맹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봐도 된다는 겐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난적과의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시점입니다. 그 정도 권한도 몰아 주지 않은 채 책임만 질 줄 아는 바보를 보낼 정도로 무림맹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빛나는 그의 두 눈이, 양천의 안광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파견 나와 있는 동안, 모든 권한과 책임은 저의 몫입니다. 그 부분은 분명히 하셔도 좋습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신다면, 그 즉시 목을 치십시오.”

“허허허!”

양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은 웃음, 공적인 자리임에도 사심을 숨길 수 없는 투왕의 웃음에 잔뜩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천하를 논하는 배포로다.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졸장부의 자신감은 비웃음을 살 뿐이지만, 수많은 목숨을 어깨에 이고 온 금강역사의 목숨은 어떤 보화로도 살 수 없는 가치로 빛나는 법이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룡부는 백도 연맹 무림맹과의 연수 제의를 마지막으로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사자(使者)의 발언에 충분한 신뢰를 느꼈다.”

“…….”

“이 시간 이후, 묵룡부와 백도 무림맹은 형제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등줄기를 훑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흑도와 백도가 진정으로 손을 잡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무림사서(武林史書)에 기록되어도 모자람이 없는 순간, 이곳에 자리한 것만으로도 그들 모두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

“흑도 전역에 명을 내리겠다. 지금부로 백도 문파를 향한 도발이나 공격을 일절 금한다. 백도 측이 먼저 이 맹약을 깨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흑도 역시 절대 상대방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물러들 가도록. 흑도 역사에 길이 남을 오늘의 일을 축하하는 자리는, 파견원들의 노독이 풀리면 마련토록 하겠다.”

도열한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총수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파견원 대표 연호정은 잠시 남도록 하게.”

잠시 후.

“후우, 덥구만.”

양천의 자세가 조금 방만해졌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격식을 차리는 일도 참 못 해 먹을 짓이야.”

연호정도 그 자리에 벌러덩 앉아 버렸다.

“소름이 돋을 뻔했소.”

“내 말이 그 말이네.”

양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 한잔하겠나?”

“좋소. 다만, 앞으로의 계획부터 듣고 합시다.”

양천이 혀를 내둘렀다.

“벌써 일 얘기를 하자는 겐가? 자네, 안 피곤하나?”

“피곤해서 죽을 것 같소. 하지만 앞으로 부주께서 나를 어찌 쓰려는지는 알고 피로를 풀고 싶소.”

“나중에 듣지 그러나?”

“불길한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부터 합시다.”

양천의 얼굴에 심술궂은 웃음이 새겨졌다.

“자네의 그 불길한 생각이 뭔가?”

“성천.”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더이다. 그때의 대화도 그렇고.”

“역시 감이 좋군.”

“……정말이오?”

양천이 품에서 작은 서신 하나를 꺼내 날렸다.

서신을 받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뭐요?”

“뭐겠나?”

“말장난 마시고, 뭐냐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의 소재지가 거기에 적혀 있네.”

“……?”

“아마 성천의 미친놈들 중에 그나마 가장 쉬운 놈일 게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누구요?”

양천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창왕(槍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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