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전력, 그리고 벽 (2)
성천십삼좌의 일인이자 투쟁술로는 강호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최강의 투사 양천.
눈앞의 사내는 바로 그 양천의 대제자였다.
‘굉장하군.’
엽성에 대한 패율의 첫인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엄청나게 거칠어.’
화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온몸에 둘러쳐져 있었다.
화려하다는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유의 사나운 기세가 정말 일품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맹수를 눈앞에 둔 기분, 투왕의 무공 이전에 선천적인 기질 자체가 야수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패율의 눈이 엽성의 손을 훑었다.
손등이 곰 발바닥처럼 두툼했다. 저 정도 진기를 소유하고 있다면 굳은살조차도 말끔하게 벗겨 낼 수 있을 텐데,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생기기를 반복하며 저런 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두툼한 손등에는 온갖 상처가 가득했다. 베이고 찍히고 찢어졌다가 나은 그 상처들은 엄청난 수련의 흔적이었다.
‘강해.’
강하다.
처음이었다. 패율 스스로가 타인을 보고 강하다고 평가한 것은.
무력 이전에 사람 자체가 강하다. 그런 강함을 타고난 사람이 양손이 뭉개졌다가 낫기를 반복하는 고강도의 수련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두근.
패율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물론, 겁을 먹어서는 아니었다.
‘싸워 보고 싶다.’
상대의 연배나 무공의 경지는 상관없다.
패율은 엽성을 보자마자 강렬한 호승심을 느꼈다. 타고난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수도승처럼 단련하는 저 야수 같은 사내와 목숨을 건 승부를 겨뤄 보고 싶었다.
츠츠츠츠.
황홀함마저 느껴지는 그 투기.
구파의 장문인급 무위를 지닌 엽성이 패율의 투기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엽성의 눈이 깊어졌다.
“제법이군.”
제법이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도전적인 어조였다. 상대를 자신보다 낮게 보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오, 그 제법인 무공을 보고 싶나?”
패율은 하얀 이빨이 다 보이도록 웃었다.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창칼부터 뽑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상대의 강함에 홀려 버린 것이다.
그때, 연호정이 손을 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선배님.”
패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남자와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연호정과 함께 묵룡부로 파견을 온 것이지, 무사 수업을 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게 아니었다.
연호정이 엽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양 부주의 대제자라고?”
“…….”
“부주께서 직접 불러들였나? 어지간해선 제자 일에 신경을 안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엽성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양 부주라…… 꽤 오만한 호칭이로군.”
“이 만남이 우연일 리는 없겠지. 그래서, 우리 앞을 막은 이유는?”
엽성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마상(馬上)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
떡 벌어진 체형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렬한 투기나 위엄 넘치는 기운을 발산하지도 않는다.
마치 무공 조금 익힌 학사 같다고나 할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글공부깨나 하는 유생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청년이 자신의 사부이자 강호의 위대한 고수 양천을 너무나도 쉽게 부르고 있었다.
“네놈이 연호정이냐?”
연호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 길을 막았나?”
여유롭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엽성의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상대의 여유만만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무림맹에서 파견을 왔다고 들었다.”
“한데?”
“실망이군.”
엽성이 연호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사부님께서 칭찬할 만한 인재는 아닌 것 같은데.”
“…….”
“그 세 치 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성천의 강자를 홀릴 수 있었지?”
“이봐.”
연호정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묻잖나, 왜 길을 막았냐고.”
“…….”
“대화 조금 나눠 보고 싶어서 그런 거면 이만 비켜라.”
엽성의 눈이 빛났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상대의 언사가 지나치게 건방졌지만, 배포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정파 놈들은 하나같이 허례허식에 목을 맨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그런 놈들과는 다른 것 같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제 할 말만 하는 놈이군.”
그가 패율과 강량에게 말했다.
“갑시다.”
다라락.
연호정이 그대로 말을 몰아 엽성을 지나쳤다.
패율은 아쉬운 눈으로 엽성을 보다가 연호정을 따랐고, 강량은 엽성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엽성은 자신을 지나친 연호정의 등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대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이 되면 벌컥 화를 내거나 신경전을 벌이는 등,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특히나 무림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연호정은 달랐다.
투왕의 대제자라는 자신을 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자신의 분위기에 압도되거나 대화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갈 길을 간다, 이건가.’
엽성은 연호정이 자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신경은 쓰이되, 굳이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지나쳤다고 보았다.
그건 당연했다. 양천의 대제자라면, 무력 외의 명성만 해도 대문파 장문인에 필적한다.
그래서 더 대단했다. 그 부분만큼은.
‘사부님이 신경 쓸 만한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설픈 무림인이라 평가받진 않을 정도라.’
엽성이 미소를 지었다.
위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심심하진 않겠군.’
나름의 임무와 수련을 위해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묵룡부.
한데 얼마 전 사부님께서 자신을 호출하셨더랬다. 이유인즉, 곧 무림맹의 인사가 파견을 오고 슬슬 부에 들어와서 한 자리 맡아 보라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홀로 수련에 매진했겠지만, 그 파견원이 저 연호정이라고 하여 흥미가 동해 왔더랬다.
연호정.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자 당대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는 기린아.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 의정군의 수장이자 그간 맡았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리에 마무리 지은 천재 무사.
묵룡부에는 엽성의 사람도 꽤 많았다. 의도해서 만든 건 아니고, 양천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지라 여기저기서 은근히 줄을 댔기 때문이었다.
엽성은 그들에게서 연호정에 관한 많은 정보를 받았더랬다. 특히나 사부님이 저놈을 탐내고 있으며, 심지어 비무까지 벌였다는 말을 들었다.
사부님은 어지간해선 제자들과도 비무를 해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데 정파의 후기지수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준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엽성을 지금 이곳에 오도록 이끌었다.
“한데 이상하군.”
엽성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공을 상실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더니, 제대로 된 기도나 기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당히 묘한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공을 익히긴 했는데, 은근하게 드러나는 기운은 기대 이하였다. 아무리 잘 봐 줘도 절정고수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
‘설마하니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무공을 연성한 것은 아닐 테고.’
뭐가 되었든 독특한 놈이라는 건 분명했다.
엽성이 뒷짐을 진 채 묵룡부를 향해 걸었다. 부에 들어와서는 이런저런 일로 대면하기 힘들 것 같아 먼저 왔는데, 얻은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는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번쩍!
엽성의 몸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세 사람을 지나쳤다. 먼저 묵룡부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저 양반 저거, 저렇게 후다닥 갈 거였으면 왜 우리 앞을 막았는지 모르겠네요.”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던 거겠지.”
“선배님은 저 양반한테 완전히 반한 것 같던데요?”
“웃기지 마라. 쟤가 여자냐?”
“금방이라도 창칼을 뽑아 들 것 같았어요. 하긴, 기질 하나만큼은 정말 무섭도록 사납더라고요.”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그건 그렇지.”
그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땠냐?”
“예?”
“저 엽성인지 뭔지 하는 놈 말이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사부가 불러서 왔겠지요. 딱히 나쁜 의도가 느껴지진 않았습니다만.”
엽성의 무력이나 존재감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투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위험한 놈이다. 기질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신경 안 쓰이냐? 그래도 양천의 대제자라면 조직 내에서도 상당한 힘이 있을 텐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그는 양천을 잘 알고 있었다.
양천은 스스로가 인정한 제자에게만 애정을 주는 냉혹한 사람이다. 부선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애정을 드러냈을 뿐, 제대로 된 실권을 주진 않았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제자로서 대할 뿐이었고, 가끔 필요할 때 임무를 내려 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앞으로 엽성이 양천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실권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정말로 엽성이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저런 놈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새삼 현실을 깨우쳐 주긴 했군.’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호남의 공기야 수도 없이 맡아 봤지만, 지금의 공기는 또 달랐다.
묵룡부의 공기다.
흑도의 공기고, 피 냄새가 잔뜩 섞인 공기다.
무림맹의 애매하고 적당히 습한 공기와는 전혀 달랐다. 건조했고 살벌했다. 공기 중에 사금이 섞이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폐장이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곳까지 오며 자신의 무공을 돌아보는 데에만 집중했던 연호정은,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이 새로운 환경에 들어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호정이 힘차게 말을 몰았다.
“우리도 갑시다.”
일행이 묵룡부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열두 명의 고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이었다.
연호정과 모용군에게, 그리고 임무에서 죽은 십이지신이 몽땅 채워진, 과거와는 또 다른 전력을 보유하게 된 묵룡부의 신진 고수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후욱.
가운데에 선 백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십이지신의 기도가 사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연호정 일행을 압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 맹에서 파견 나온 일행을 맞이하는 조용하고도 엄숙한 인사였다.
백서가 포권을 취했다.
“묵룡부주님 휘하, 십이지신을 대표해 백도 무림맹의 파견원 연 대협에게 인사드리오. 백서라 하오.”
엽성 때와는 다르다. 저쪽에서 저렇게 나와 준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맞는 격을 보여 줘야 했다.
‘더 강해졌군.’
백서를 보던 연호정이 말에서 내려와 절도 있게 포권을 쥐었다.
“무림맹 의정군의 대수 연호정이 묵룡의 십이지신을 뵙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오.”
백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구구구궁!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묵룡부의 입구가 열렸다.
마치 무저갱의 입구라도 된 양, 크고도 어두운 동혈의 입구가 새삼 살벌해 보였다.
“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안으로 드십시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