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정리, 그리고 도전 (7)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들렸다.
“무림의 일에 발을 들이지 말고, 차라리 지금까지 쌓아 온 가문의 무공과 보화를 오롯이 민심을 위해 쓰는 건 어땠을까.”
“지금도 그러고 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무림에도 발을 걸치고 있잖느냐? 진정 그들을 위해 산다면 굳이 무림맹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었지.”
“틀린 말은 아니지요.”
“무림맹 창설에 동의한 것도, 이곳에 눌러앉아 헤아릴 수 없는 회의에 참여한 것도 내 나름대로 세상을 위해 힘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앞으로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위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오랜만이었다. 나 자신의 욕망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낀 것은.”
“예?”
“묵룡부주를 만났잖느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땠습니까?”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막연히 생각했다. 성천의 강자들은 천외천의 강자라고. 하지만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셨으니까요.”
“그랬지. 이제야 똑똑히 알겠다. 성천십삼좌가 왜 최강이라 불리는지를.”
연위가 혀를 내둘렀다.
“완전히 달랐다. 사람이 아니었어. 그를 마주한 순간, 애비는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무공이더구나.”
자식 앞에서 이런 심정을 순순히 말하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아버지가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목표가 뚜렷해졌다. 막연하게 올려다보기만 했던 그 경지가, 이제는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지.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내가 그처럼 지고한 경지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하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반드시 그 경지에 들어서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러냐?”
“잊으셨습니까? 저 역시 과거, 그러한 경지에 올랐던 녀석입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랬구나.”
흑암제 시절을 겪었던 아들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는 그였다.
다만 가끔 그러한 사실을 잊곤 했다. 말은 들었지만, 본 적은 없으니까. 아들의 말은 믿되 그 사실을 생생하게 떠올리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아들이 대단해 보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지금껏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무공을 쌓아 오셨습니다. 꼼수나 요령부터 찾아보는 저 같은 놈이랑은 다르시지요.”
“굳이 그리 말할 필요까진 없다.”
“다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말이 그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요. 분명 아버지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 빛의 경지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자신감이 차는구나.”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연위가 화제를 돌렸다.
“무공 외적으로, 네가 양 부주를 고평가하는 이유를 알겠더구나.”
“그렇습니까?”
“흔치 않은 호걸이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야. 다만…….”
“위험하지요.”
“그렇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도 희생시킬 만큼 독하기도 할 것이다.”
“잘 보셨습니다.”
“그가 너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었다. 너를 좋게 보는 걸 넘어서 굉장히 탐을 내더구나.”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걸 더 탐내는 법이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선을 긋는 발언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들 진심으로 그의 밑에 들어갈 일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위가 연호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거기서도 잘하리라 믿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너에게,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몸 성히 돌아오란 말을 자주 했더랬지.”
“…….”
“애비의 마음은 언제나 그와 같다. 천하를 위해 일하되, 다치지 말고 멀쩡히 돌아와야 한다.”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 * *
쿠구구궁!
무림맹의 남쪽 성문, 주작화문(朱雀火門)이 장엄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제갈문호는 직접 성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건 내가 따로 주는 여비일세.”
“그러실 필요까지는…….”
“받게. 사람은 돈이 없으면 추해지는 법이라 하지 않는가. 자네는 무림맹 대표로서 묵룡부에 가는 거야.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앞으로는 더 신경 써야 하네.”
연호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 원래 쓰던 도끼는 어디에 뒀나? 그 손도끼 두 자루로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오히려 묵룡부에서는 도끼를 못 쓸 수도 있어요.”
“흠.”
따로 이유가 있으리라.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율, 잘 부탁하네.”
패율이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사고를 쳐도 누울 자리를 보고 치는 놈이라오.”
“허허, 자네가 사고 칠까 무서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닐세.”
“무림맹 대표, 잘 보필하겠소.”
제갈문호가 입맛을 다셨다. 패율의 퉁명스러운 성격은 참 대하기가 어려웠다.
“알겠네. 그리고 강 검사. 자네도 몸조심하게.”
“옙.”
경쾌하기까지 한 대답이다. 제갈문호는 피식 웃다가 일순 의아한 눈으로 강량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데 자네, 눈이 왜 그러나? 시퍼렇게 멍이 들었어.”
“아, 이거요…….”
강량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패율이 이죽거렸다.
“강호의 선배가 후배에게 애정 어린 가르침을 준 결과외다.”
말이 좋아 가르침이지, 이 정도면 거의 일방적인 폭행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제갈문호가 혀를 찼다.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게. 그래도 자네가 선배 아닌가.”
“그건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오.”
패율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순간 제갈문호는 할 말을 잃었다. 붕대로 꽉 묶인 패율의 팔에서는 지금도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 미친놈 검이 얼마나 사나운지 아시오? 까딱 잘못했으면 뼈째 동강이 났을 거요. 빌어먹을, 눈에 멍이나 든 정도면 다행이지. 싸가지만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냥 쌩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강량이 재차 헛기침을 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는 자제하게. 둘 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패율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옆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웅얼거리는데, 대충 ‘서러워서 살겠나.’,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러다 후배 하인 노릇도 하겠네.’ 따위의 대사들이었다.
물론 제갈문호는 그의 투덜거림을 무시했다. 잘 들리지도 않았고, 딱히 대꾸할 생각도 없었다.
“그럼, 무운을 빌겠네.”
그렇게 세 사람이 호남성 묵룡부로 향했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연호정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느껴질 정도의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다. 한 번씩 주변을 둘러보며 웃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할 일이 없어 여행이나 나온 한량과 비슷했다.
패율이 물었다.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적당히 가도 됩니다. 어차피 그쪽도 제가 해 줬으면 하는 일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냐.”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딱히 추억에 잠기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씩 외로울 때면 이 주변 풍경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흠.”
패율이 주변을 주욱 훑어보았다.
“기억에 남을 정도의 풍경은 아니구만.”
“그렇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패율은 입을 닫았다. 연호정과 비슷한 속도로 말을 몰며, 그는 순식간에 명상에 잠겼다.
하루하루,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모조리 무공 수련에 집중한다. 그것이 명상에 불과할지라도 패율은 수련에 몰두했다.
조잘거리고 싶었던 강량 역시 패율을 보며 함께 명상에 잠겼다. 상당히 거친 사람이었지만, 이런 부분은 배울 만했다.
‘좋은 조합이야.’
두 사람을 본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부딪치겠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겠지.’
강량은 도전적이었고, 패율은 호승심이 넘쳤다.
그런 와중에서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내내 티격태격하겠지만,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이라.’
우우웅.
연호정은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기반은 잡았고, 이제 늘릴 일만 남았군.’
지금 그가 연성한 연가신단에는 오대신공 중 네 개의 무공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신단은 그 자체로 막대한 용량의 진기를 뿜어낼 수 있다. 네 가지 신공의 기운을, 상황에 맞게 원하는 농도와 기세로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되면 그 힘을 받는 사신무 역시 한층 막강한 위력을 자아낼 것이다.
‘지금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이상을 원한다면 한 차례 균형을 맞추는 게 좋겠지.’
벽라진결을 가장 오래 익혔고, 그 뒤로 용포진기를 익혔다.
그 두 무공에 비하면 검극사기와 신장기는 이제 걸음마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신공의 이해도는 완벽했지만, 연성한 수준이 그러하다는 말이었다.
‘신단으로 하나가 된 이상, 각 무공의 성취를 늘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나중을 위해선 나을 거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당분간 검극사기와 신장기 위주로 신단을 연마해야겠군.’
이런저런 생각은 많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정체되었던 무공이 다시 발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발전의 끝은?
‘성천이라.’
과거 흑암제 시절, 무시무시한 전투력으로 최강의 투사라 불리었던 흑도대종사.
최소한 그때 이상의 힘은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의 싸움이 한결 편안해질 테니까.
자신의 무공과 앞날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묵룡부와 성천십삼좌에게로 생각이 이어졌다.
‘묵룡부주가 내게 바라는 첫 임무는 뭘까? 적어도 편한 일은 아니겠지.’
이전의 만남 당시, 헤어지기 전 양천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연호정은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네가 와서 함께 일해 준다면야 그처럼 좋은 일은 없겠지. 하지만 말일세, 본부는 자네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네. 즉, 자네가 본부에 와서 운영이나 전투 조직을 다스리는 등의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
‘하면 내가 파견 나올 필요도 없잖소?’
‘본부에 와서 놀아도 되네. 자네 하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배울 수 있고, 나도 심심하지 않고.’
‘점점 오기 싫어지는군.’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말하자면, 자네는 우리가 하기 힘든 일,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담당하게 될 거야.’
‘그게 뭐요?’
‘글쎄…… 한번 궁리를 해 봐야겠지만.’
‘궁리는 무슨.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어 보이는데 말이오.’
‘허허, 그냥 생각만 해 봤네. 사실 삼교와의 전쟁에 앞서 흑과 백이 손을 잡는 건 바람직한 일이네만, 무림에는 우리 외에도 많은 고수가 있다네.’
‘……설마?’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다만 ‘그들’ 중 몇몇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정파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던가?’
‘…….’
‘한번 고민해 보게. 나도 고민해 보도록 하겠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성천이라…… 드디어 그 영역이로군. 여러 가지 의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