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정리, 그리고 도전 (6)
“하면, 모두 찬성하시는 것입니까?”
제갈문호의 말에 봉공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문서에 도장을 찍은 제갈문호가 연위에게 허가증을 건넸다.
“의정군 대수이자 벽산연가의 장남 연호정의 묵룡부 파견 건에 대해 정식으로 허가를 내리겠습니다. 연가주께서는 이 허가증을 연 대수에게 가져다주십시오.”
“알겠소.”
“이후, 묵룡부와 공식적인 건의를 거쳐야 합니다. 그 기간이 짧아도 한 달은 될 것으로 봅니다. 다만 무림맹의 차후 행보를 생각하면 그 정도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고로, 최대한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갈문호가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가주님.”
“말씀하시오.”
“묵룡부 수뇌부 측과 직접 대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 최소 두 분 이상의 봉공께서 참여하셔야 할 듯한데 그중 한 자리를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겠소. 가능하다면 꼭 그리하고 싶소.”
본인의 능력 이전에 파견 가는 사람이 아들이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여기에 최소 한 분이 더 가셔야 합니다. 좋게 말하면 구색 갖추기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묵룡부주의 인물됨을 확인할 분이 필요하지요.”
제갈문호는 모용군을 힐끔거렸다.
모용군은 여유로운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과거 묵룡부주와 비밀스러운 거래를 하다가 지금은 분해가 되어 버린 그였다.
평소의 그라면 먼저 손을 들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그 역시 묵룡부주를 다시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때, 공공대사가 말했다.
“군사와 다른 봉공분들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빈승이 함께하고 싶소.”
모두가 깜짝 놀랐다.
“대사님께서 말씀이십니까?”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었다.
“또 다른 성천의 강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오? 나 역시 성천위에 오른 귀인(貴人)은 본사의 무허 사백과 무당의 검선 어른밖에 뵌 적이 없소이다.”
소림사 최강의 무승 무허대사.
무당파 최강의 검인 탁무자.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요, 최강이라는 성천십삼좌 중에서도 독보적인 아성을 구가하고 있는 천하무적의 강자들이었다.
성천십삼좌에 오른 고수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하였다. 십인(十人)의 신선제왕(神仙帝王)들이 삼인(三人)의 삼군(三君)보다 한 수 위라고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차이가 얼마나 좁혀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무위가 천외천(天外天)이라는 것이다. 무림 최고 전성기였다는 삼백 년 전의 절대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그들 중 누가 천하제일인의 호칭을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 와중에도 무허대사와 탁무자의 위치는 특별했다. 나이도 가장 많았고, 이름을 날린 시기도 가장 오래되었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천하제일인은 그 두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장인들이 있소. 그리고 성천십삼좌는, 무(武)에 한해 최고의 장인들이라 할 수 있소이다. 도달한 위치는 비슷해도 방법과 전문 영역이 다르다면, 이 기회에 한번 그 위대함을 느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오.”
적이자 흑도의 총수인 양천의 위대함을 느껴 보고 싶다고 한다.
자칫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발언이지만, 누구도 그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공대사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양천을 얕잡아 보던 몇몇 봉공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길을 걷든, 성천위에 이름을 올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그 사람의 성향과 행적 이전에, 같은 길을 걷는 무도가로서 충분히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지금 즉시 묵룡부로 서찰을 보내겠습니다. 공공대사님과 연가주님께서는 언제든 출맹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 * *
“형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강량은 순간 움찔했다.
우우우우웅.
마당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예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평소 연호정이 자아내던 기도가 아니었다. 마치 연위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 검을 보는 듯 서늘한 예기가 일품이었다.
‘저건 뭐지?’
평소 운행하던 진기와는 전혀 다른 힘이다. 강량은 연호정의 운공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반 시진 후.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기다렸다.”
강량이 웃으며 말했다.
“예, 정말 오래 기다렸지 뭡니까.”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림맹 상부에서 묵룡부로 서찰을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가주님과 몇몇 봉공분들이 묵룡부주와 대담을 하러 가신다고 합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무림맹의 무사가 흑도로 파견 가는 일인데, 서로 간의 맹약 정도는 해야지.”
“한 달 정도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안에 준비를 해 놓으라고 전해 달라셨어요.”
어지간하면 자신에게 직접 얘기하셨을 분이다. 그만큼 아버지도 바쁘다는 뜻이리라.
“알겠다. 너는 준비됐냐?”
강량이 피식 웃었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상관없습니다.”
“파견 날짜가 될 때까지 열심히 단련해 둬라. 그곳은 또 다른 전장이야. 어떤 의미로는 무림맹보다 훨씬 살벌할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흑도 출신이니까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날 이후, 연호정과 강량은 각기 수련에 힘썼다.
강량은 온종일 검을 휘둘렀고, 연호정은 새로이 연성한 신공, 검극사기(劍極思氣)를 연가신단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놀랍게도, 연호정은 검극사기를 연성하면서 벽에 부딪힌 느낌을 받았다.
신공 자체가 그에게 맞는 무공이 아니다. 그 성향과 예기는 아버지인 연위와 동생 연지평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무공의 파괴력과 속도를 중시하는 연호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검극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사유했고, 더 집중하여 축기했다.
변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지금껏 그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에 주력했다. 흑암제 때도 그러했고, 회귀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달랐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단점을 메우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는 게 마땅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름.
연호정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겨우 검극사기를 연가신단에 녹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오대신공의 네 번째 신공, 신장기(神將氣)에도 손을 댄 것이다.
신장기는 기세로 적을 압도하는 데에 능한 신공이었다. 파괴력은 용포보다 한 수 아래지만, 공간의 기를 장악하는 구결만큼은 오대신공 중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연호정은 신장기를 연성하며 깜짝 놀랐다. 구결과 특성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연성해 보니 그 차이점이 무척이나 컸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대신공이 왜 하나로 묶여 연가를 대표하는 무공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다르면서도 같다. 나뉘었지만 하나다. 하나이되 전혀 다르다.’
마치 사신무처럼.
오대신공 역시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혀 다른 성질의 무공들이지만, 그 근본 원리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함께 익히기가 어렵다. 원리는 같으면서도 장점과 느낌은 전혀 다르니, 어설프게 익히려 들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연위 정도로 한 신공을 깊게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신공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극치가 바로 연가신단이었다. 각자의 신공을 극에 이르도록 연성하지 않아도, 이미 연가신단을 형성한 이상 신공의 특성을 살리는 쪽보다 하나로 녹이는 데에 주력하게 된다.
연호정과 연위의 차이가 거기에 있었다.
연호정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려 하였고, 연위는 하나의 신공을 극치로 연마하여 또 다른 경지를 창조하려 하였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가를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연가의 무공에 지극히 정통했다는 것이었다.
‘아직 하나가 남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벽라진결, 용포신공, 검극사기, 신장기.
네 개의 신공이 하나로 합쳐지며 연가신단이 더 축소되었다.
힘이 줄어든 게 아니라 밀도가 높아진 것이다. 이전보다 더 세밀한 조절이 필요해진 동시에, 같은 초식도 훨씬 날카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보인다.’
그렇게 다시 열흘이 지나.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던 연호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올라왔어.’
무극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세상.
머나먼 여정이지만, 최소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확신을 얻었다.
우우우우우웅.
번뜩이는 깨달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충격을 주었다.
“우웨엑!”
연호정이 돌연 피를 토했다.
옆에서 휴식을 취하던 강량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형님! 괜찮으세요?!”
그때, 언제 왔는지 모를 패율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안 괜찮을 리가 있나.”
“예?”
“도가(道家)의 현문(玄門)에서는 큰 깨달음을 얻을 때 각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패율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벌써 또 한 계단 올라간 거냐?”
연호정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깨달음은 이미 얻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깨달음에 나를 녹여 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아니지만.”
“얼씨구. 이해하기도 힘든 어려운 말을 잘도 하는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패율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이가 깃들어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천재? 괴물?
그런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어떤 경지에 발을 디뎠는지.
겨우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대문파 장문인보다도 막강한 무(武)를 손에 넣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무극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길. 하지만 저놈이라면 못해도 오 년 내에 무극지경에 돌입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한데 선배는 왜 여기 계십니까?”
패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준비 끝났다.”
“뭔 준비요?”
“파견. 나도 같이 가게 되었다. 장문 사형은 물론 다른 봉공분들도 전부 허가해 주셨어.”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막무가내였지만 뭐 어쩌겠는가? 함께 가겠다는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너도 이제 준비해라.”
“예?”
“군사님과 공공대사님, 그리고 연가주님이 묵룡부주 양천과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셨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요?”
“무림맹을 반 봉문 형태로 운영한다며? 시간이 없었겠지.”
“하긴 그렇습니다.”
“옷 갈아입어라. 회의장으로 가야 해. 오늘 바로 출발한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