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화. 정리, 그리고 도전 (5)
“가 주라.”
패율이 땀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뭐야? 오랜만에 상대해 주나 싶었더니만, 그런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 때문에 주접떨려고 부른 거였냐?”
“주접이라니요. 진짜 고민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걸 배부른 고민이라고 하지.”
연호정이 입맛을 다시며 잔에 술을 따랐다.
“됐습니다.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원.”
“말버릇 보게?”
“예. 이따위 말버릇도 못 고치는 사회 부적응자가 가주가 되면 안 된다고요.”
패율은 희한한 놈 보듯 연호정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강량이 있었다.
“거기 너. 넌 어떻게 생각하냐?”
강량이 눈을 껌뻑였다.
“저요?”
“그래. 순진한 척 눈만 껌뻑껌뻑하지 말고 말해 봐라.”
“으음.”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그래?”
“예. 그냥 소가주도 하고 가주도 하면 되잖습니까?”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연호정을 보았다.
“후배가 아주 지혜로운 판단을 대신 내려 준 것 같지 않냐?”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혜로운지는 모르겠고, 성의 없는 답변인 건 알겠습니다.”
강량이 헛기침을 했다.
“제가 고민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알아, 새꺄.”
“대뜸 욕이시네.”
“이게 왜 욕이야?”
“듣는 사람이…….”
“그냥 입 닫아, 인마.”
강량에게 핀잔을 준 연호정이 패율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떻습니까? 만약 지금 장문인께서 선배에게 차기 장문인으로서 준비를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실 겁니까?”
“그럴 사람 아니다.”
“그러니까 만약에요.”
“만약 따위는 없다. 그리고 그럴 사람 아니라니까.”
“뭔 말을 못 하겠네.”
“너야말로 생각 좀 고쳐먹어라. 만약 운운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란 소리다. 거기에 왜 날 끼워 넣고 지랄이야?”
“선배는 입도 거치십니다.”
“너만 하겠냐, 개백정?”
강량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호정의 완패였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그것참, 지평이한테 맡기면 잘할 걸 굳이 왜 나야?”
“네가 장자니까.”
“요새 같은 세상에 장자 따지면서 후계 세웁니까?”
“대부분은?”
“…….”
“심지어 장자인데다가 능력도 출중하지. 그만한 인재가 버젓이 있는데 굳이 나이도 어리고, 장자도 아니고, 하물며 성품도 유약한 둘째에게 가주위를 맡기겠냐?”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지평이가 그렇게 저평가될 만한 녀석이 아닙니다. 솔직히 검(劍)만 따지면…….”
“팔불출 형님의 동생 자랑은 거기까지 해라.”
“…….”
“뭐가 되었든, 네 부친 입장에서는 둘째에게 가주위를 물려줄 이유가 전혀 없는 거다. 누가 더 뛰어나고의 문제가 아니야.”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패율이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야, 강영.”
“강량입니다.”
“됐으니까 잔이나 줘 봐.”
“옙.”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비운 패율이 다소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뭐가 문제야? 너답지 않게.”
연호정이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제가 가주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말고.”
“그 이유가 전부입니다.”
“정말로?”
“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녀석에게 가문을 맡기느니, 성품도 순후하고 재능도 출중한 녀석에게 가문을 맡기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연호정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지만, 눈빛은 깊고도 혼란스러웠다.
“저는 삼교와의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발 벗고 나설 놈입니다.”
“…….”
“운도 실력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실수 한 번에 목이 날아가는 것도 싸움이지요. 그 정도 운이, 실력이 언제까지 절 지지해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가주가 되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굳이 가주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또한 본가의 분위기상 저보다 지평이 더 낫기도 나을 거고요.”
연호정이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죽은 이후에 한층 더 무거워질 자리를 지평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패율은 헛소리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실제로 연호정은 언제나 최전방의 전선에 있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삼교와의 싸움에서, 연호정이 참전하지 않은 싸움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말하자면, 적 역시도 연호정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연호정을 만나면 무조건 죽이려 들 것이다.
연호정은 스스로를 그런 살벌한 세상으로 내던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무림인은 더욱 죽음과 친숙하지요. 그러나 저는 평범한 무림인보다도 훨씬 죽음과 가깝습니다.”
“…….”
“제가 있어도 되는 자리는, 제가 죽어도 능력 좋은 후임이 큰 문제 없이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한 자리밖에 없습니다.”
“의정군처럼?”
“예. 의정군처럼요.”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패율이 툭 던지듯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넌 왜 삼교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에 서려는 거냐?”
“…….”
“나이가 좀 걸리긴 해도, 사실 너 정도면 이제 사람들을 가르쳐도 돼. 함께 싸울 이들이 개화할 수 있도록 도우면 된단 말이다. 혼자 돌격하는 건 그만두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넌 항상 누구보다 먼저 놈들을 상대하려 들지. 너의 특출난 능력 덕분에 네가 참전한 모든 싸움에서 승전보를 날렸지만, 이제는 주변을 생각할 때도 되었어.”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씀은 아닌데, 어째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너무 열 올리지 말라는 게 아니다. 네 말마따나 사람은 어차피 죽어. 무책임하게 죽느냐, 책임을 다하고 죽느냐, 대비를 하고 죽느냐, 대비를 못 하고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
“하지만 그 여러 형태의 죽음에도 공통점이 있지. 그게 뭔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결국 남은 일은 죽은 사람이 아닌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거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훗날을 생각하는 너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반드시 지칠 거다. 네가 지치면? 그럼 죽는 거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
“네 가족 일이기에 더 고민이 깊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착각은 마라. 죽은 사람의 의지를 잇는 것은 결국 산 사람이다. 죽으면 거기서 끝이야. 하지만 넌 작전을 짤 때, 자신이 죽을 걸 걱정하면서 짜지는 않지.”
“…….”
“가주위도 똑같다. 네 능력이 된다면, 그것을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여라.”
강량이 워,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공중분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뭔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알았으니까 입 닫아라, 강영.”
“강량입니다.”
“알 바 아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제가 생각이 깊긴 했던 모양입니다.”
패율이 혀를 찼다.
“진짜 너답지 않았지. 역겨울 정도였다. 사람 죽일 때는 그 커다란 도끼로 잘도 썰어 대더니, 그래도 제 가족 일이라고 술까지 푸면서 고민이냐?”
“가족 일이니까요.”
“다른 사람에게도 가족은 있다.”
“제 가족은 아니잖습니까.”
“뭐, 그것도 그렇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가 좀 되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패율이 은근슬쩍 따라 일어났다.
“감사하면 나랑 한 판…….”
“이 은혜는 나중에 갚지요. 그럼.”
후웅.
연호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눈 뜨고 봐도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패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새끼가 정말!”
그가 이를 바득바득 갈 때, 강량이 넌지시 물었다.
“저랑 한 판 하시겠습니까?”
“치워라.”
“형님만큼은 아니어도, 신선한 재미는 있을 겁니다.”
“강영.”
“강량입니다.”
“됐으니까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애송이와 칼질하려고 연마한 창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애송이는 아니지요. 제 검에 투왕의 제자가 쓰러졌거든요.”
패율의 눈이 빛났다.
“투왕의 제자?”
“있습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오만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서는 사람을 졸(卒)로 보더군요.”
“그런 놈 패대기친 게 뭔 자랑이라고?”
“실력은 진짜였어요.”
“퍽이나 진…….”
“한데 겁이 나시는 겁니까? 왜 자꾸 빼세요?”
순간 패율의 눈이 충혈되었다.
다른 어떤 말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겁을 먹었냐니? 후배한테 이따위 소리를 듣고도 칼을 뽑지 않는다면 그건 무사가 아니다.
쾅!
탁자를 후려친 패율이 몸을 돌렸다.
“나와라. 강호의 선배로서 제대로 한 수 가르쳐 주마.”
강량이 히죽거리며 일어났다.
“좋습니다.”
* * *
한적한 공터로 나온 연호정의 눈에, 가부좌를 튼 연위가 보였다.
우우우우웅.
연위의 몸은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놀랍구나.’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었다. 그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찾아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엄청나게 부드러워졌어.’
그는 회귀한 후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진기를 떠올렸다.
그때의 아버지가 품고 있던 기도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가히 한 자루 보검과도 같았달까.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진기의 광영(光影)도, 색채도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그 살벌한 예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연호정은 등줄기를 훑는 소름을 느꼈다.
‘어느새 저기까지……!’
다시 맹으로 복귀했을 때 아버지와 대무를 했더랬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때보다 또 한 계단 성장하셨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발전이 있으셨던 것일까. 최근에는 수련도 예전만큼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뭔가 깨달음이…… 아니다, 이건 깨달음이 아니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미 아버지는 무극으로 가는 문을 열었어. 시작의 깨달음은 진즉에 다 얻었고, 지금은 그저 당신께서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계신 거다.’
평생을 정통의 방식으로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 지금의 무(武).
그 지난날의 세월이, 오직 한 길만을 고집했던 아버지의 진득한 장인 정신이 지금에 와서는 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른 성장을 유도한다.
기본이 탄탄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광신에 가까운 믿음이, 오히려 퇴보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금의 영역에서 날개를 달아 주고 있는 것이다.
정통의 힘이다.
정통 중의 정통, 올곧은 하나의 길을 빈틈 하나 없이 연마한 진짜 무사에게, 저 하늘은 이제야 막힘없는 광도(光道)를 선사하고 있었다.
‘경이롭다.’
저러한 경지에 오르시기까지, 아버지는 얼마나 지독한 실패를 겪으셨을까.
남들은 수도 없이 포기했을 그 지난한 관문을, 단 한 번의 포기도 없이 실패보다 많은 도전 끝에 기어이 넘어서신 것일까.
번쩍!
연위의 몸에서 검극사기의 광채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벌써 생각이 정리되었느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무공이 발전하고도, 아버지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예, 정리되었습니다.”
“그래. 하면 대답을 들어 보자. 너는 이 애비의 뒤를 이어 연가의 차기 가주가 될 생각이 있느냐?”
연호정은 대답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