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정리, 그리고 도전 (4)
이틀 뒤.
“흐음.”
흑룡부와 백룡부를 쥐고 휘두르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군.’
광룡부 때도 그랬지만, 정말이지 묘하지 않은가.
‘점점 손이 안 가는 건 내 본능 때문인가, 아니면 단순히 질렸을 뿐인가.’
흑암제였을 때도 그는 백병(百兵)에 능했다. 나중에는 제아무리 독특한 병기라도, 그것을 쥐기만 하면 어떻게 휘둘러야 최대의 위력을 뽑아낼 수 있는지가 탁탁 잡혔다.
그가 팔십 근이 넘는 도끼를 사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남들은 다루기 어렵겠지만, 연호정에게는 강한 완력과 깊은 내공, 그리고 병기의 이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전투 감각 및 사신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한 도끼를 쥐고 휘둘러야 자신이 가진 무력의 최대치가 발현된다. 그가 거대한 도끼를 쓰는 이유는 상대를 위압하기 위해서가 아닌, 실제로 그 병기가 자신에게 맞기 때문이었다.
그건 비단 광룡부만이 아니었다.
사천당가의 장인들이 피땀 흘려 제조한 이 흑룡부와 백룡부 역시 그의 손에서 기가 막힌 효율을 발휘했다. 오히려 광룡부보다 더 빠른 쾌공(快功)과 난격도 펼칠 수 있어서, 위력은 줄어들지라도 허를 찌르는 싸움에 이점을 보였다.
뭐가 되었든, 광룡부와 흑백쌍룡부는 그에게 있어 소중한 병기였다. 이 이외의 병기를 주병기로 사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질린 건 아니다. 질릴 수가 없지. 내 병기에 내가 질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오히려 더 갈고닦으면 모를까.”
치리리링.
교룡쇄와 연결된 두 자루 도끼를 갈무리한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내 무공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건가.’
흑암제 때는 단 한 번도 병기가 낯설다거나 손이 안 간다거나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파격적인 변화의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
‘그때의 난 어땠나.’
무공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었던, 땅과 하늘 사이 어딘가에서 앞만 보고 달렸던 그 시기.
흑암제로 불리기 전, 극한의 경지로 비상(飛上)하기 전의 자신은 어떤 변화를 맞았었나?
‘철쇄다.’
연호정이 교룡쇄를 들어 보았다.
치리링.
맑은 소리를 내는 흑회색의 교룡쇄가 서늘한 한기를 뿜었다.
‘온갖 병기를 다 써 보다가 마침내 도끼를 쥐었지. 그 도끼로 아수라장을 헤쳐 오다가, 결국 철쇄에까지 눈을 돌렸다.’
그 변화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그저 철쇄를 같이 휘둘렀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도끼와 철쇄를 함께 쓴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술(術)로써 그 경지의 변화를 겪었고, 나아가 쏟아지는 무극의 빛에 제왕의 무도(武道) 위를 거닐 수 있었다.
‘오는가.’
꾸욱!
교룡쇄를 쥔 손에 강력한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그 혼돈 가득한 허상의 경지가, 내게 문을 열어 주는가.’
연호정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한 번 올라섰던 경지지만,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신기의 중심이 되는 내공심법조차도 달랐다. 그때는 우직하게 홍천기를 연마했지만, 지금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둘을 혼합하여 연가 전설의 신단(神丹)을 형성했다.
기(氣)가 다르면 몸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지면 생각의 깊이와 사고의 영역도 달라진다.
그때와 같을 거라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그 경지가 문을 열어 준다고 하여, 금세 올라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하루 만에도 오를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그 경지의 문턱에서 허덕이며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과거의 그도 이 허상의 경지에 발을 들이고 몇 년 뒤에야 무극에 몸을 실었다.
지금이라고 더 빠를 거라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느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익숙함에 젖어 틀린 길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묵룡부로 파견을 가서 그쪽과 하나가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이 중요하다 하여 나의 성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로는, 묵룡부 건보다도 중요한 것이 자신의 성장이었다. 이유인즉, 전쟁이 터지게 되면 언제라도 선봉에 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연호정은 생각했다.
그리고 판단을 내렸다.
“수련을 마치고 오는 길이냐?”
“예.”
“고생했다. 와서 앉거라.”
연위는 아들을 위해 직접 차를 타 주었다.
그는 연호정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 뭔가 고민이 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뭔가 부탁할 것이 있음을.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아들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떠냐?”
“못 마셔 본 차로군요. 이게 뭡니까?”
“홍화향(紅花香)이라고 하더구나. 팽가의 가주께서 선물해 주신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팽가주께서요?”
연위가 피식 웃었다.
“네 얘기를 많이 하시더구나. 너와의 만남이 제법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한참 네 얘기를 하시더니, 근래 구한 찻잎이라며 선물해 주셨다.”
“향이 아주 좋네요. 그 양반 보기와는 달리 쩨쩨한데요? 좋은 게 있으면 진즉에 나누고 그러지.”
“어허, 말버릇은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이냐?”
투덜거리던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요새 잔뜩 날이 서서.”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되었다. 꾸중 한 번 더 한다고 고쳐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처럼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 애비에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냐?”
연호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계셨습니까?”
“귀신을 속이지 애비 눈을 속이랴.”
“커험!”
“편하게 말해 보거라.”
연호정이 조심스레 말했다.
“본가의 나머지 오대신공을 연마할까 합니다.”
애초에 오대신공의 구결은 전부 외우고 있었던 그였다.
실제로 연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호정이 자신과 달리 신단(神丹)을 형성했음을 알곤, 부자지간임에도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연가신단을 형성한 사람은 연가 역사에서도 손에 꼽힌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형성하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훨씬 더 많은 선조가 신단을 형성했을 것이다.
즉, 능력이 되는 사람이 본인에게 필요하다면 신단을 형성해도 된다. 그러나 딱히 신단이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안 맞는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연위 역시,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연가신단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검극사기만 연성하고 있는 건, 오히려 이 길이 자신에게 꼭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연위는 흥미로웠다. 자신과 다른 무도를 걷는 아들의 미래가.
다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서로 흐지부지하게 넘어갔던 주제에 대해 다시 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신공의 구결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굳이 애비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이냐?”
“예.”
“나는 네가 나머지 신공을 다 연성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예.”
“그런데도 네가 이 애비를 찾아온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차기 가주 건 때문이냐?”
연호정은 생각했다. 확실히 아버지의 눈은 날카롭다고.
“네가 오대신공을 전부 익히면, 지평이 아닌 너에게 소가주 직위를 내릴까 염려되어서 온 것이냐?”
연호정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으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연위가 팔짱을 꼈다.
“꼭 한번 대화를 나눠야 할 부분이기는 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묻자.”
“…….”
“전에 애비에게 얘기했던 이유 말고, 소가주 직위를 포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아버지께서 저의 거칠고 무례한 언동을 계속 교정해 주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잘 바뀌지 않는 저의 천성이 그 이유입니다.”
“너의 천성이 본가의 가주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예.”
“왜 그리 생각하느냐?”
“아버지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제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흑암제.
흑도의 제왕이자, 역사상 최초로 흑도를 통합한 남부의 흑사자.
지금은 묵룡부라는 단체가 있지만, 흑암제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집단이다. 오히려 그러한 단체를, 외부가 아닌 오직 자신과 동료들의 힘만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연호정이었다.
다만,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통치 방법 자체가 너무 딱딱하고 거칠었다.
흑도이기에 통했던 통치 방식. 그러한 방식에 익숙한 자신이 백도의 명문가인 가문을 이끌어서는 안 된다. 연호정의 생각은 그러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어느 정도 공포 통치를 하였고, 그 흑제성이라는 단체를 자비 없이 굴렸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다.”
“……자비는 있었습니다. 조금이지만.”
“뭐가 되었든,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다. 너도 알지 않느냐?”
“하지만 저의 천성이…….”
“그 천성을 만든 사람은 나와 네 어미다.”
“……?!”
“나도, 너도 연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순간 연호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위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씩 생각했다. 그간 내가 본가를 너무 고지식하게 다스렸던 건 아닌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본가처럼 신상필벌이 확실한 가문은 달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이지, 나쁜 게 아닙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나도 네가 가주가 되면, 본가를 잘 다스리리라 믿는다.”
“아버지.”
“너는 흑도를 통치해 본 적은 있지만, 본가를 통치해 본 적은 없잖느냐?”
“…….”
“또한, 흑도의 특수성이 분명하다고 너는 말했다. 나아가, 네가 성주이긴 했으나 전투를 치르느라 바빴고, 실질적으로 흑제성을 통치한 사람은 너의 수하들이라고도 하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다행이구나. 나는 너와 같은 경험도 없었다. 처음 가주가 되었을 땐 정말이지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연위가 다시 연호정에게 눈을 돌렸다.
“너는 거친 천성 때문에 흑제성을 그리 다스린 게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천성을 이유로 한 가문을 다스리는 데에 겁을 먹을 만큼 소심한 성격도 아니다.”
“…….”
“네가 흑제성을 다스린 건 과거이자 경험에 불과하다. 예전보다 더 나아지길 추구하는 너의 성격상, 본가를 흑제성처럼 다스릴 리가 없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 하나의 이유로 가문의 운명을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러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네 애비인 나도, 나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운명을 맡겼다.”
“…….”
“그리고 믿었지. 어설프고, 아직 부족한 것도 많지만 충분히 가문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본가는 그렇게 선대의 믿음 가득한 지지로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도, 내 자식에게 그 운명의 검집을 건넬 때가 온 것 같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 저는…….”
“안다. 준비가 되지 않았겠지. 스스로의 능력에 의심도 있을 테고. 나 역시 지금 당장 너에게 가주위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
“…….”
“그러나 본가의 소가주로서, 차기 가주로서 언제나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연호정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설마, 제가 그래도 거부한다고 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내쫓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쫓겠다는 말보다 백배는 더 무서운 말이었다.
“하루의 시간을 주마. 잘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
“그리고 오대신공은 익혀도 된다. 아니, 꼭 익혔으면 좋겠구나.”
연호정은 오대신공 외에 무공을 성장시킬 방도가 없는지 고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