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정리, 그리고 도전 (2)
연호정의 첫인사는 꽤 인상적이었다.
“봉공님을 뵙습니다. 의정군 대수 연호정입니다.”
상대를 남궁가주라 칭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벽산연가의 장남이라 말하지도 않는다.
철저히 공적인 일로 왔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온 표면적인 이유는 그러할 것이다.
남궁인이 웃으며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게.”
연호정이 남궁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허.’
중간중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단둘이서 독대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상대가 새롭게 보였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야.’
꼿꼿한 허리, 바르게 펴진 가슴과 맑고 깊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그 연배의 청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력의 강약을 떠나 사람 자체가 뛰어나 보인다. 의식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이미 종사(宗師)의 그것이었다.
남궁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천재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겨 보겠다며 머리를 들이밀었단 말인가.’
둘째 남궁현, 그리고 셋째 남궁상화.
악연의 시작은 남궁상화였다. 지금에야 그간의 앙금을 어찌어찌 무마시켰다지만, 애초에 잘못은 남궁상화에게 있었더랬다.
더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자신감 넘치게 접근했다가 한낱 애욕에 눈이 멀어 싸움조차 해보지 못하고 패배해 버린 남궁현도 참 못나 보였다.
무림에서 상대의 역량을 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능력이 없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남궁현과 남궁상화는 문제가 있었다.
자식이지만 참으로 답답하지 않은가.
“술은 잘하시는가?”
남궁인의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씩 합니다.”
“어떤가? 안 그래도 적적하여 홀로 술 한잔하고 있었는데, 자네도 한잔하겠나?”
“주신다면 감사히 받지요.”
남궁인이 웃으며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자, 한잔하세.”
두 사람이 부딪친 잔을 그대로 비웠다.
“이렇게 둘이서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싶군.”
“예, 그렇습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와의 독대라. 내 비록 남궁의 가주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 영광스럽다네. 드높은 명성으로 차기 무림의 기둥이라 불리던 쌍룡삼봉(雙龍三鳳)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 버린 불세출의 괴물이 자네 아닌가.”
한때나마 쌍룡삼봉은 젊은 후기지수들의 상징과도 같은 별호였다.
쌍룡과 삼봉의 재능은 성천십삼좌에 육박하거나 그 이상이라고까지 평가받았다. 실제로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사람들이 감탄하는 이유가 있는 천재들이 바로 쌍룡과 삼봉이었다.
하지만 그 다섯 천재의 이름은 완전히 묻혀 버렸다. 바로 연호정의 존재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세상에 나와 구주명가를 분쇄하는 데에 앞장선 청년 고수. 그 파격적인 등장과 무시무시한 손속,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대문파 장문인급의 경지에 오른 괴물 같은 재능은 연호정을 진정한 의미의 후기지수로 급부상시켰다.
거기에 모용우의 등장 시기 역시 기가 막혔다. 무림맹에서 수련을 거듭한 그가 무종의 벽을 초월하자, 세인들은 두 사람이야말로 천하에 어떤 후기지수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재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호신쌍위(虎神雙位), 혹은 호검쌍위(虎劍雙位).
후기지수 최강의 전사(戰士) 벽산호장 연호정과 후기지수 최강의 검사 건곤호장 모용우를 일컫는 말이었다.
다만 대체로 호장이라 하면 연호정을 뜻하고, 모용우는 건곤신검이나 건곤검협이라 부르며 구별을 두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모용우보다 연호정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의 위치와 업적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모용우보다 어린 나이에 그보다 빨리 무종의 벽을 뚫었기 때문이다.
“우리 큰애, 기억하는가?”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표를 말함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창설 건으로 모두가 무림맹으로 모일 때, 중간에서 연가와 남궁가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연호정은 그때 남궁표를 보았다. 모용우와 비슷한 연배인데,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보일 듯 말 듯한 오만함, 그리고 상당한 검기(劍氣)를 지닌 검사였더랬다.
남궁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그간 바빠서 모르겠지만, 표아가 자네를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네. 당시만 해도 자네와 표아의 무공은 비슷했지. 그것만으로도 큰 충격이었을 거네.”
“이해합니다.”
“한데 이후, 자네가 멸사군의 수장이 되어 천하를 질타하고 무종지벽까지 돌파한 이후에는 완전히 혼이 달아난 기색이지 뭔가.”
“그렇군요.”
“해서, 자네가 광동에 임무를 나가기 전에 현아와 함께 본가로 돌려보냈네. 무사는 세상과 드잡이질을 해야 강해지는 법, 자신 이상의 천재들이 많다는 걸 알고 나서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
그 건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으로 연호정에게 고마운 그였다. 아들의 오만함을 이유 있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이런 괴물이 나타났는데도 자극을 못 받으면 그건 그냥 바보다.
그런 면에서 아들의 호승심과 질투를 자극해 준 존재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아름다운 결말은, 성장한 아들이 그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가볍게 짓누르는 것이겠지만.
“자네 덕분일세. 고마우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남궁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지간하면 타인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웃으려 노력했고, 이제는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웃음은 본심과 다르게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담이 길었구먼. 그래, 일단 이 얘기는 뒤로 미뤄 두도록 하세. 공적인 일로 날 찾아오셨다고?”
“그렇습니다.”
남궁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의정군의 대수가 이 시간에 공무로 날 찾아올 일이 있을 줄은 몰랐구먼. 일이 있다면 정식 절차를 밟거나 회의 때 군사를 통해 안건으로 내도 충분하거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공무지만, 달리 보면 공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군. 어디 한번 들어 봄세.”
“밤이 늦었으니 굳이 빙 돌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 테니, 봉공께서도 저를 존중해 주신다면 부디 솔직하게 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허허허, 겁나게 왜 이러시나? 알겠네. 내 그럴 터이니 어디 말이나 들어 보세.”
연호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음? 허허, 갑자기 무슨 말인가?”
“무림맹이 무림맹답게 운영될 수 있도록, 군사님을 필두로 다른 봉공분들과 뜻을 함께해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궁인의 눈이 반짝였다.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쉽게 받아 내기 힘든 발언이었다. 내용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허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봉공들은 무림의 정의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네. 뜻은 다르지 않아.”
“저는 솔직한 대화를 원했고, 봉공께서도 동의하셨습니다.”
“설마하니, 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난적이 대륙 전체를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말하자면 중원 무림 전체가 공공의 적을 향해 뛰어들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그런 사실을, 봉공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충분히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더더욱 합심해야 하며,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세상을 위한다면 응당 그래야 하지.”
“가주님의 말씀이 진심이라는 걸 압니다.”
“허허, 이해해 주어 고맙군.”
“하지만 세상을 위해 모두가 합심한다 해도, 그 역할을 주도하는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
“저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왕이면 능력도 좋고 성품도 훌륭한 데다가 자신감도 넘치는 사람이 무림맹을 이끈다면 좋겠지요. 하나 그 모든 것보다도 권력의 욕구가 우선된다면, 그런 사람이 맹을 주도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남궁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에 뼈가 있구먼. 자네 말은,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란 뜻인가?”
“모용 봉공을 위시한 몇몇 봉공분들도 그런 생각을 안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봉공께서 정녕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오늘 제가 보여 드린 버릇없음으로 말미암아 엇나간 선택을 하진 않을 분이라는 것은 압니다. 불쾌감 때문에 대의를 저버릴 분이 아니지요.”
당근도 주고 채찍도 준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단 건지, 말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남궁인은 연호정이 자신을 어찌 보는지 알고 있었다. 말을 배제하고 눈빛과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자네는 나를 다소 위험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구먼.”
“그렇습니다.”
솔직한 인정이었다.
남궁인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경험 많은 숙수는 요리의 향만 맡아도 그 음식의 어디가 문제인지 아는 법입니다.”
“그건 좀 기분 나쁜 비유로군.”
“봉공을 음식으로 비유한 게 아니라 저를 숙수로 비유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내게서 그러한 욕심의 흔적을 읽었다?”
“예.”
남궁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증명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요, 판단이 아닌가?”
“증명할 수 없는 그 감각으로 세작을 잡았고, 모용가주의 야망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제 와선 많은 분께서 저의 감각을 신뢰해 주십니다.”
남궁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협박인가?”
“봉공의 마음속에 그러한 야심이 있다면, 협박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남궁인은 가만히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은 굳이 표정과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데, 도통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 이렇게 생각해 보도록 하지.”
남궁인이 깍지를 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내게 그러한 야심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야심 때문에, 합심이 중요한 상황에서도 나의 이득을 위해 입에 담기도 지저분한 짓거리를 불사한다고 치세.”
“…….”
“그것이 자네와 무슨 상관이 있나?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는 것을.”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피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뭐라?”
“삼교라는 희대의 난적이 출몰한 지금, 대륙은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서로를 믿고, 아끼고, 나아가 희생정신을 불살라도 모자랄 판국에, 무림맹의 봉공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사적 이익을 위해 그 ‘입에 담기도 지저분한 짓거리’를 했다면, 그 사실이 까발려지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전략적 차원에서도 그런 사람은 배제해야 마땅합니다. 또한, 그만큼 멍청하고 우매한 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맹의 중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매하다?”
“우매하지요. 전쟁이 임박하여 다 죽게 생긴 살얼음판을, 군웅할거(群雄割據)의 난세라고 착각하여 제 배나 불리기 급급한 벽창호에게 똑똑하다고 할 순 없잖습니까.”
“……!!”
“저 모용가주조차도 삼교의 존재를 알고는 당파 싸움을 그만두고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야망이 극에 달한 야심가조차도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순간 남궁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연호정이 한결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도 일을 행함에 있어 선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한데 배운 게 많고 경험이 많은 어른 중에는, 저처럼 젊은 사람도 아는 걸 괜찮다며 무시해 버리는 사람도 있더군요.”
“…….”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무림맹에 들어온 이후 그런 사람은 죄다 박살을 냈습니다. 지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지요.”
딱딱하던 연호정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봉공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무림맹의 봉공으로서 천하를 위해 한 손 거들어 주시는 협객이십니까? 아니면 누울 자리도 못 보고 신이 나서 들판을 뛰어다니는 야심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