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정리, 그리고 도전 (1)
“오셨습니까.”
“어.”
“가주님은요?”
“공공대사님과 말씀 좀 나누신다고 하더라. 먼저 밥 먹으면 될 것 같다.”
“그렇군요.”
연호정이 강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강량의 외양은 상당히 험했다. 하얀 옷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수련 때문은 아니었다. 한쪽 손에 들린 허연 붕대는 그 자신이 다쳐서 묶은 게 아니었다.
“의선각주 도와주는 건 잘 되고 있냐?”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보통 바쁜 게 아닙니다. 사방에선 비명이 끊이지 않고, 한숨 돌리자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발작하는 환자가 나오고. 잘 시간은커녕 쉴 시간도 없었습니다.”
기실, 강량의 애매한 위치를 생각하면 굳이 그런 일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다. 광동 작전에서 의정군 소속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것도 정식 소속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벽산연가의 손님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저 나서서 의선각을 도왔다.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안정이 돼서 크게 도울 일도 없습니다. 간간이 손이 필요할 때 연락 주기로 했어요.”
“그래, 고맙다.”
“형님이 고마울 게 뭡니까. 그나저나, 그 망할 세작 놈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놈들은 맞지만, 세작은 하나였다. 관리자와 연락책이 있었을 뿐.”
“뭐, 그게 그거죠.”
“하긴.”
“대충 해결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째 형님 눈 밑이 시커먼 것이 뭔가 고민이 있어 뵈는데요?”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제는 눈치도 제법이구나.”
“형님하고 붙어 다닌 시간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별건 아니다. 그냥 당분간 무림맹이 반 봉문 상태에 돌입해야 할 것 같아서.”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 봉문이요?”
“반 봉문. 그냥 봉문 말고.”
“뭐가 됐든 대외 활동을 축소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맞다.”
“아니, 왜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려면 복잡하다. 그저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때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 말이 오갔지.”
“허어…….”
“조직이란 게, 사람들 생각과 달리 크면 클수록 찌르고 들어갈 만한 빈틈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번 세작 건도 그렇지. 설마하니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세작일 줄은 몰랐지만, 누가 세작이었든 이리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무림맹이 헐렁하다는 증거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헐렁한 건 아니지요. 어떤 조직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일례로, 형님께서 묵룡부에 세작으로 파견됐을 때 역시 아무도 몰랐잖습니까?”
“그렇다. 그럴 수는 있지. 하지만 앞으로는 그래서는 안 되지.”
“맞는 말씀입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거다. 당장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강량의 눈이 빛났다.
“각자의 위치라…… 그럼 형님도?”
“그래.”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여름도 다 지나간 듯, 불과 며칠 전보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빨라졌다.
“준비를 해야지. 묵룡부로 갈 준비를.”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가는 거 맞지요?”
“원한다면 언제든.”
“묵룡부주 면전에 대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같이 올 거라고.”
“사정이야 항상 생길 수 있는 거다. 네게 따로 할 일이 있다면,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르륵.
허연 겉옷을 벗은 강량이 어깨를 붕붕 돌렸다. 그간의 피곤함을 싹 씻어 낸 듯한 모습이었다.
“원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요.”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참을 수 있겠냐?”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장부의 복수는 묵히면 묵힐수록 그 맛이 달콤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당장의 갈증 때문에 훗날 맛볼 감로주를 망쳐 버릴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연호정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그 감로주를 기다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르지.”
“그도 그렇지요.”
“네 마음이 그렇다면 되었다.”
“언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일단 맹 내 분위기가 잘 다스려져야겠지.”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러십니까?”
“사고라니?”
“형님 눈빛이 누구 하나 개박살 내기 전의 눈빛인데요? 아주 흥미진진해 보입니다.”
“무서운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됐고, 누굽니까?”
“그럴 일 없다니까 그러네.”
“박살 내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꽤나 공격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인 것 같은데요?”
“공격적인 결정이라…… 그래, 맞는 말이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겠지. 군사님의 짐도 덜어 드릴 겸 말이다.”
* * *
“후우.”
잔을 비운 남궁인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른하구나.”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별빛 그득한 밤이 되었다.
거처의 창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기분은 꽤 각별했다. 게다가 무림맹 전체가 큰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사건을 대충 다독이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깃들었다.
“오늘은 조금만 마시고 자야겠군.”
근래 들어 검을 잡는 시간이 줄었다.
딱히 심경에 변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새벽 수련을 빼먹지는 않았다.
다만, 요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이제 슬슬 중도(中道)에서 좌우를 둘러보는 일은 그만해도 될 터인데.’
남궁인은 봉공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봉공들 앞에서도 냉엄한 얼굴로 할 말 다 하던 제갈문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 참, 많이도 바뀌었어.”
과거 무림맹이 창설되기 전.
그때만 해도 제갈세가의 힘은 크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영향력은 충분했지만, 그것도 옛날 같지는 않았더랬다.
그리고 남궁인은, 제갈세가가 힘을 잃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군사직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었을 적, 회의 때 보여 주었던 모습 이후로 제갈문호는 달라졌다.
가주가 달라지니 가문의 활기도 달라졌고, 나아가 세인들의 평가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림맹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이 바뀐 걸 보지 않으면 모른다?
헛소리다. 무림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제갈문호의 지혜롭고도 과감한 전술과 행정 능력은 이미 중원 전역에 퍼져 있었다.
말하자면, 가문이 약해지고 있는 때에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무대에 올라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 준 셈이었다.
남궁인은, 제갈문호가 처음으로 유약했던 자신을 벗어던지고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보였던 그때를 떠올렸다.
‘맹법은 지엄하여, 무림맹 소속원은 누구도 법령에서 자유롭지 아니한다. 설령 맹주라 한들, 맹주 특별법에 의거한 보호 기간이 끝난 후에는 법령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
‘각 부대장에게 그 정도 권한도 주지 않을 생각이시라면, 저 역시 군사직을 내려놓겠습니다.’
‘무림맹 창설에 동의했을 때, 이곳에 계신 봉공분들 모두가 맹법의 지엄함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믿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을 때마다 눈과 입에서 불이 뿜어지는 듯했다.
각성의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이후로 제갈문호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막강한 권위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그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제갈문호가 바뀐 근본적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제아무리 그러한 이유가 있다 한들 사람이 쉽게 바뀌냐는 것이었다.
‘무림맹에서의 영향력이 달라졌다. 이는 곧 각 세가의 힘에도 영향을 끼친다.’
남궁인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의 제갈세가는, 백도의 어떤 문파도 건드리기 힘든 희대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단순한 영향력만 생각하면 아직도 제갈세가는 남궁세가보다 아래였다.
실질적인 재력과 무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특히나 남궁세가에는 당대 무림의 전설이라 불리는 성천의 신검(神劍), 검제(劍帝)라는 위대한 거인이 존재한다.
그 이름만으로도 제갈세가는 감히 남궁의 위에 설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아버지도 나이를 드셨다.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 사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 검제 남궁승은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흥미를 끄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라도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시겠으나, 적어도 현역이 아닌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세상은 남궁가에 검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정작 그 검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점차 그 존재를 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그러면.’
위대한 남궁가의 명성이, 실질적인 무력에 영향을 주는 힘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선 안 될 일이다.
‘조만간 세상에 그 힘을 드러내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역시 참기 힘듭니다, 아버지.’
남궁인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밤은 좋은데 내 기분이 저 아리따운 광경을 따라가질 못하는군.”
요즘 같아선 정말 첫째에게 일을 맡겨 두고 몇 달 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무력보다 정치에 뜻을 둔 나의 숙명인가.’
정치라고 하니, 또 제갈세가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줄이야.’
제갈세가를 의식하게 된 것은, 둘째인 남궁현의 매파를 거부했을 때부터였다.
분명 이쪽에도 부담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제갈세가는 그 매파를 거절해 버렸다.
정치적 우호 관계에 금이 가는 걸 감수하겠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남궁현의 무공이나 명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쪽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리도 민감한 문제를 과감하게 거절했다?
‘우리가 아닌 연가를 선택했다…… 재미있구먼.’
벽산연가와는 꽤 깊은 악연으로 얽혔다.
하지만 그 악연은 과거에 정리했다. 그 일을 계속 끌고 와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인의 눈이 깊어졌다.
제갈세가, 그리고 벽산연가.
‘본가와 악연을 지닌 두 가문이, 지금은 무림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속이 쓰리다.
정치엔 친구도, 적도 없는 법이다. 원하는 목표가 일치하면 언제든 친구가 될 수 있고, 목표가 달라지면 한순간에 냉정하게 등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이나 연씨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나는 근본부터가 달라. 같은 맹수라도 범과 사자는 사는 곳이 다른 법이지.’
툭. 툭.
가볍게 쥔 주먹으로 몇 번 창가를 두들기던 남궁인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별 쓸데없는 생각이 많군. 오늘은 빨리 자야겠어.”
하지만 그는 오늘도 일찍 잠들 수 없었다.
“가주님.”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남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해가 넘어가고는 손님을 받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예, 예에. 한데, 공적인 일로 찾아오신 터라…….”
공적인 일?
“누구냐? 손님이?”
“예, 의정군의 대수입니다.”
“…….”
“…….”
“…….”
“가주님? 어찌할까요. 다시 돌려보낼…….”
“아니, 괜찮다.”
남궁인이 다시 의자를 뺐다.
“들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