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인내의 시간 (5)
회의가 끝난 후, 봉공과 장로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줄곧 자리를 지키던 제갈문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공공대사를 보았다.
공공대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회의장을 나섰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는 뜻이리라.
“후우.”
한숨을 쉰 제갈문호가 탁자를 정리하고 회의장을 나섰다.
그때였다.
“얘기가 잘 끝난 것 같군요.”
제갈문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선 연호정과, 형당 관리에 바빠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모용군이 있었다.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두 분이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세 사람입니다. 저와 모용가주님이 시작했고, 공공대사님이 마무리를 해 주셨지요.”
가만히 두 사람을 보던 제갈문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떻게?”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용화진인은 한때나마 이 사람과 뜻을 같이하던 사람이었소. 화산 내부의 알력 다툼에 관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오.”
“그래서 그런 것이오? 이번 용화진인 건을 돕기 위해, 용화진인과 대립 각을 세우고 있던 용선진인을 끌어들여 힘을 실어 준 것이오?”
그렇다.
용화진인이 죽은 이상, 화산파의 반발이 극심할 것이다. 용화진인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를 떠나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파에는 용화진인을 장문인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확히는, 그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용선진인이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용화진인의 속물적 성격으로 인해 화산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화산파는 여전히 중원의 명문이었지만, 과거의 고고한 명성을 나날이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암암리에 용화진인을 탄핵(彈劾)하려는 화산의 또 다른 일파. 그 일파의 수장이 용선진인이었다.
그리고 용선진인은, 연호정과 모용군의 제안을 너무나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용선진인은 현실적인 사람이오. 그런 면에서는 용화진인과 비슷하지. 하지만 용화진인은 그 성격으로 보화(寶貨)를 쌓는 데에만 급급했소. 용선진인은 다르지. 그는 현실적 방안으로 과거의 영광스러운 화산을 되찾고자 하는 꿈이 있는 자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려는 욕심도 있는 사람입니다. 장문인이 되어 화산을 개혁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지요.”
제갈문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용선진인을 장문인으로 만들 생각이신가?”
“그건 저희의 능력 밖입니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파 내의 수장을 결정하는 건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관여할 수 없는 일. 다만 나와 공공대사가 용선진인의 인품과 능력을 대외에 인증한다면,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장문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오.”
묵묵히 두 사람을 보던 제갈문호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언질을 줬으면? 군사 성격에 이 일을 진행하라 했겠소?”
“모용가주 성격상 내가 반대해도 어떻게든 관철을 시켰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제갈문호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 대수도 동의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여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 어떻게든 힘을 합쳐 이 난해한 정국을 헤쳐 나가야 할 때지.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네.”
“감사합니다.”
“하나, 이런 방법은 안 되네. 나 역시 세작을 잡기 위해 지나치게 과격한 방법을 선택했지만, 문파의 수장을 갈아치울 생각을 하다니? 이건 정말 선을 넘은 행위네.”
모용군이 차갑게 웃었다.
“군사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전쟁 중이라고.”
“…….”
“전쟁 중에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소. 하물며 무림맹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군사의 꿈에 한 손 거들어 주는 거요. 한데 이런 일로 선을 넘었느니 어쩌니 하는 건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행위 아니오?”
“모용가주.”
“고마워해야 하지 않소?”
“……무슨 말씀이신지.”
“공석인 맹주위에 걸맞은 인재를 찾기 전, 무림맹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던 사람이 당신이오. 하면 응당 고마워할 일이지, 뭐가 그리 걸리는 게 있어서 우릴 타박하냔 말이오.”
모용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하니 당신, 화산에 사과를 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 줄 알았소? 누군가가 나서 줘서 당신을 구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거요?”
“…….”
“그도 아니면,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거요?”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사태를 똑바로 보시오!”
모용군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다.
“야망을 품은 자에게 포기란 필수요. 도리란 도리는 다 챙기면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세상이었다면 전쟁도 벌어지지 않았소. 아시겠소?”
“…….”
“손에 넣고 싶은 꿈이, 목표가 있다면 주변 눈치 따위는 보지도 마시오. 자존심이 상해도 뚜벅뚜벅 앞으로만 걸어가란 말이오. 도덕과 윤리를 앞세워 손가락질하는 머저리들 얼굴에 침을 뱉어도 모자랄망정, 그럴듯하게 보이는 환상에 매몰되어 선을 넘었느니 마느니 헛소리나 한단 말인가?”
“…….”
“협객 놀이나 하려거든 그 자리에서 내려오시오. 진정 당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싶거든, 그런 듣기에만 달콤할 뿐 실속 따위는 요만큼도 없는 강박이란 수의(壽衣)를 하루빨리 벗어 던지시오.”
모용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 버렸다. 제갈문호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제갈문호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용가주의 무자비한 말에 완전히 공감할 만큼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저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겁니다.”
“…….”
“다만, 모용가주의 말에도 생각해 볼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제갈문호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함세. 모용가주의 말처럼, 정말 나는 어떻게든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네.”
“군사님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지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 모용가주의 말에도 옳은 부분이 있네. 어쩌면 그는, 사태를 지나치게 가벼이 보고 있는 나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과한 해석입니다. 저 인간은 그런 인간이 아니에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든, 새삼 깨달았네. 내가 지쳤다는 것을, 그리고 자네나 모용가주만큼 사태를 긴박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을.”
연호정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그래서가 아니라, 뭐라 말해도 제갈문호를 위로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만 하네. 사태가 아무리 심각해도 타 문파의 수장을 입맛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겠지만, 사태가 급박할 땐 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제갈문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연호정을 타박하지 않았다.
세상의 개성은 딱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연호정과 자신은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거처로 갈까.”
“그러시지요.”
군사부의 거처 앞에는, 놀랍게도 공공대사와 연위가 있었다.
제갈문호가 놀라서 물었다.
“두 분께서 여긴 어찌……?”
공공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의 앞날을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본맹을 가장 잘 아는 분이 군사 아니오? 해서 찾아왔소이다.”
연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감이오.”
제갈문호는 알 수 있었다. 공공대사가 자신을 다독이러 왔다는 걸.
‘이것 참.’
괜스레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친 듯했다. 왠지 민망했다.
가만히 공공대사를 보던 제갈문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대사님답지 않게 심하셨습니다.”
용선진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모용가주와 연 대수는 그럴 수 있다지만, 대사님께서 그러셔선 안 되었습니다.”
“군사를 볼 낯이 없소이다.”
구구절절 변명 따위는 없다. 공공대사는 담백하게 사과했다.
제갈문호는 왠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후배에게 혼나니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기분이 좋소이다. 이유인즉, 그 험한 군사 일을 하면서도 가슴속에 협의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오.”
“과찬이십니다.”
“다만, 빈승은 이번 일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소이다. 과격하다면 과격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오.”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 역시 할 말은 없습니다.”
제갈문호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잠시 후, 네 사람이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공공대사가 먼저 운을 뗐다.
“회의장 분위기가 무거워서 미처 묻지 못한 부분이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세작은 풍벽자였고, 연락책은 의복단이었던가? 하면 관리자는 누구였소?”
연호정이 말했다.
“모용가주가 말하기를, 형당의 부당주였다고 합니다.”
“형당의 부당주라…….”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음?”
“형당의 폭발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시신조차 온전히 건지지 못한 사람도 많지요. 다만…….”
“……?”
“뇌옥 안에서 형당의 부당주 석방헌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연위 역시 놀란 기색이었다.
“그럼 대체……?”
“만약 그가 정말 석방헌 부당주라면, 관리자는 사람의 얼굴을 즉석에서 바꿀 수 있는 기괴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인피면구였다면 당관이 그 즉시 알아차렸을 것이다. 즉, 관리자는 석방헌과 똑같이 생긴 면구를 쓴 게 아니라 실제로 얼굴을 변형시킨 것이다.
“축골공과 비슷한 종류겠지만,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무공일 겁니다. 상대와 똑같은 얼굴로, 그것도 그 짧은 시간에 변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
“허어.”
“또한, 등천교 장문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등 장문인이 그간 관리자 역할을 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구파의 장문인,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적의 세작이었단다.
“이럴 수가…….”
“이 사실을 공동파에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성도 청성이지만, 공동파의 도인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하지요.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며 무림맹을 비난하거나 탈퇴할 수도 있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등천교 장문인이 바꿔치기를 당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음?”
“관리자가 상대의 얼굴을 본떠 그대로 변신할 수 있는 무공을 익혔다면, 등 장문인의 얼굴이라고 본뜨지 못할 리는 없지요. 그 또한 그런 식의 희생자였다고 알리면 그만입니다.”
“……허어.”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냐?”
“예.”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 할 말이 없다.
연호정도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당분간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인내의 시간이라니?”
연호정이 제갈문호를 보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무림맹을…… 반(半) 봉문(封門) 형태로 운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