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99화 (498/963)

499화. 인내의 시간 (4)

“……중인 고로, 더 이상의 사망자는 생기지 않을 거라는 의선각주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제갈문호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침통해하고 있다는 걸, 가득 쌓인 울분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눌러 참고 있다는 걸.

“이차 사상자 통계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은 맹 내 피해 물자에 관해 보고하겠습니다.”

제갈문호는 폭발이 일어난 곳과 그곳을 보수하는 데에 드는 비용, 기간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치솟는 울화를 억누르고 냉정하게 조사하여 이리 보고하는 것은 보통 정신력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러모로 제갈문호의 대단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상, 피해 사항에 관한 보고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있던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세작은 풍벽자였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평소에는 봉공들만 출입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장로인 다른 구파 장문인은 물론 군소 방파의 대표들도 와서 제갈문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풍벽자…… 풍벽자라…….”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방정맞은 면모가 없진 않았으나, 그 또한 드문 인간미였거늘. 청성파의 장문인으로서 합당한 인품이요, 실력자였던 풍벽자가 세작일 줄은 상상도 못 했소이다.”

좌중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특히 복호사태의 표정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풍벽자와는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나. 그가 삼교의 세작일 거라고는, 정말이지 요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봉공분들, 그리고 장로분들께서 혹시라도 불안해하실 것을 염려하여 드리는 말씀이니, 냉정하다는 타박은 회의가 끝난 뒤에 해 주십시오.”

“…….”

“조사 결과, 더 이상의 세작은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우리 중 세작은 풍벽자 하나였으되, 그를 관리하던 관리자와 연락책이 있었지요.”

공적인 자리에서 굳이 냉정하다는 말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제갈문호는 그러한 단어를 써서 수뇌부들의 마음을 다독이려 했다. 그만큼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일 테니까.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부러 피해자 명단에선 뺐습니다만,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께서는 분명히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예상하셨겠지만…… 용화진인은 폭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형당의 건물 전체가 박살이 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다. 하물며 용화진인은 내공이 봉쇄당한 상태였다. 제아무리 전신에 자하(紫霞)의 기가 흐르고 있다 한들, 그 폭발에서 무사할 순 없었을 것이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세작을 잡기 위해서이긴 했으나, 다소 과격한 조치였음은 분명합니다. 세상에 이유 없이 죽어도 괜찮을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용화진인은 결코 그렇게 죽어선 안 될 분이었습니다.”

“…….”

“모두 저의 과오입니다. 못난 군사를 질책해 주십시오.”

좌중은 또다시 입을 닫았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용화진인은 제갈문호와 연호정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렇게 과격한 일 처리로 사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면, 용화진인이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빌미로 제갈문호를 욕하기에는, 삼교와 세작이라는 변수의 위험성이 지나치게 컸다.

세작 색출 과정에서의 문제로 징계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하거나 뇌옥에 가두기에는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승현진인이 입을 열었다.

“군사.”

“예, 진인.”

“군사께서는 봉공 중 세 명을 의심하셨소. 나와 복호사태, 그리고 풍벽자요.”

“그랬습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세작으로 의심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나빴소이다.”

“이해합니다.”

이해하지만,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 부분은 사과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태도는, 놀랍게도 승현진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우리가 이곳에 왜 모였소이까? 거창하기는 하지만, 결국 천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모인 것 아니오?”

“…….”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찌 깨끗한 방법만 고집할 수 있겠소? 선을 넘지 않는 한이라면 다소 과격한 방법도 필요할 때가 있소이다.”

조용히 있던 남궁인이 입을 열었다.

“동감합니다만, 이번 용화진인 건은 과격한 수준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여러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떠나, 충분히 그리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그들은 이런 식의 독단적인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번 건은 분명 선을 넘었소이다.”

“징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권한의 제한 정도는…….”

“전시가 아니라면, 그리 생각할 수 있다고 보오.”

“……?!”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승현진인을 보았다.

승현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군사가 우리 중에 세작이 있다고 할 때도, 연호정 대수를 묵룡부로 보내자고 할 때도 군사의 말을 십 할 받아들이지 못했소. 고백하자면,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오.”

“…….”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소.”

승현진인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건 전쟁이오.”

몇몇 사람이 침을 삼켰다.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라 칭해지는 무당파의 장교가 뱉는 말이다. 그 무게감이 굉장했다.

“저들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소. 우리가 모르는 새에 말이오. 한데 우리는, 세작이 존재한다는 걸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소. 사태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과격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동원한 것을 성토하기에만 바빴소이다.”

남궁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승현진인. 군사의 저러한 독단은, 최소한 여기 계신 봉공분들과 회의를 거친 연후에…….”

“회의가 되었소? 세작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고 삼교라는 희대의 난적을 막연한 문젯거리로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군사의 설득이 먹혔겠느냔 말이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다소 지나친 언사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게다가 군사라는 자리는, 설득이 안 된다고 독단을 저지르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홀로 고뇌해야 하는 것이오? 군사가 왜 존재하오? 우리는 군사가 해 놓은 일만 받아먹는 새끼 새에 불과한 것이오?”

남궁인은 입을 닫았다.

말꼬리를 잡자면 사흘 밤낮을 두고도 할 수 있는 토론이다. 하지만 말꼬리를 잡는 것 자체가 흉해 보일 수 있다. 특히나 상대는 세작으로 의심받았던 승현진인이었다.

여기서 더 나서서 군사의 위신을 깎아 봤자 본질을 보지 못하는 멍청이가 될 뿐이다.

“삼교라는 존재가 없더라도 우리는 군사를 도와야만 하오. 군사뿐만이 아니오. 서로를 돕고, 무림맹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함이 마땅하외다. 한데 지금, 명백한 적이 있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돕기는커녕 당파를 나눠 상대를 헐뜯기만 하였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무림맹 봉공이나 장로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나름의 사적 이득을 취한 사람도 있을 거라 보오.”

승현진인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몇몇 사람은 얼굴을 붉혔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동시에 애먼 데에 눈을 판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본도가 군사를 두둔한다고 생각지 말아 주시오. 군사의 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 맞소. 그러나, 그가 이러한 행위를 하게 된 이유는 결국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오.”

승현진인의 목소리는 진중하고도 호소력이 넘쳤다.

“용화진인의 죽음은,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상자가 난 잘못은 군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 모두에게 있소.”

“…….”

“제대로 귀를 열지 않고, 제대로 보지 않았던 우리 모두가 군사와 같은 죄를 짊어지고 있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승현진인이 복호사태를 보며 물었다.

“복호사태.”

“……말씀하시지요.”

“이 사람의 말이 틀렸소이까?”

복호사태는 탄식했다.

“틀리지 않았지요.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뒷방 늙은이라도 사태를 제대로 보았다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앉아만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우리는 보고 듣는 이목마저도 늙은이의 그것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절친했던 청성의 장문인이 세작이었다는 충격적 사실에 얼이 빠져 버린 그녀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이라 그런지 말의 깊이감이 달랐다.

복호사태가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군사.”

“말씀하십시오.”

“나는 군사의 방법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

“나는 이제야, 지금에야 우리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싹!

복호사태의 슬픔 가득한 말은, 듣는 이들 모두가 소름이 돋게 했다.

“적은 전력을 다해서 중원을 노리고 있어요. 황궁도 장악하려 하고 있다지요? 묵룡부주를 쥐고 흔들려고도 했고요. 하물며 무림맹에, 다른 누구도 아닌 봉공 중 하나를 세작으로 만들기까지 했군요.”

“…….”

“이건 전쟁입니다. 어느 한쪽이 패망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는 암울한 전쟁이에요. 그런 전쟁 속에서, 군사와 연 대수만이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움직였어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어떤 영광도 없는 치열한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주셨단 말입니다.”

복호사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분명히 말합니다. 군사에게 용화진인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으려거든, 이 사람에게도 함께 물어 주세요. 오랜 친구가 세작인지도 몰랐던 무능한 늙은이를 내쫓아 주시길 바랍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승현진인의 말에도 힘이 있었지만, 복호사태의 말은 그야말로 좌중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녀가 청성의 장문인과 얼마나 절친한 사이였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더더욱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승현진인과 복호사태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제가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태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궁가주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어요.”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의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일어난 일을 모르는 체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남궁인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책임을 지든, 용화진인의 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자칫 화산파가 들고 일어나면, 제아무리 무림맹이라도 난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제가 화산파로 찾아가겠습니다.”

모두가 놀라서 그를 보았다.

“남궁가주님의 말씀대로,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지요. 과정이 어찌 되었든 책임을 질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책임은 이번 일을 주도했던 제가 져야 함이 마땅합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용화진인의 일은, 제가 분명하게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때, 공공대사가 말했다.

“그 건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소.”

“예?”

공공대사가 회의실 문밖을 향해 외쳤다.

“들이시구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등장했다.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도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화산파의 용선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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