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98화 (497/963)

498화. 인내의 시간 (3)

“연가주님!”

연위가 눈을 빛냈다.

“정보단 소속 비팔(秘八)입니다!”

“상황은?”

비팔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짧고 분명하게 전달했다.

보고를 들은 연위가 승현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승현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 연호정이 찾아왔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던 그였다. 그 정체불명의 이상함이 정보단원의 보고로 전부 풀렸다.

“세작으로 오해를 받았구려.”

“그렇습니다.”

“풍벽자가 세작이었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허어.”

승현진인이 눈을 감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봉공 중 세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그였다. 한데 풍벽자가, 육가도 아닌 구파의 장문인이 세작이었단다.

연위가 말했다.

“군사부로 함께 가시지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군사를 지켜야만 합니다.”

눈을 뜬 승현진인이 연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를 믿을 수 있소? 나 또한 세작일 수도 있잖소?”

“장문진인께서 세작일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 정보단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문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가서 군사를 지킵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파아아악!

두 사람이 군사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형당의 부당주, 석방헌이 된 ‘그’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만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삼교의 어떤 조직도 이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며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교도들을 운용하진 못할 것이다.

‘벌써 발각된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세작, 풍벽자의 감각은 충분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게 흠이지만, 기실 그 정도만 되어도 세작으로서의 역량은 천하에서 손에 꼽힐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세작을 관리하는 관리자였다.

관리자의 덕목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세작의 능력에 밀리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절대적인 충성을 필요로 하며, 죽음 앞에 흔들리지 않아야만 한다.

풍벽자는 죽기 싫어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 파견된 순간부터 언제나 지옥을 거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깝지는 않았다. 두려운 것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뿐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정말 좋지 못했다.

‘당가주라니.’

뇌옥의 입구에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바로 당가주 당관이었다.

언뜻 초연해 보이기까지 한 자태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심심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우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연일 리가 없지.’

당관은 거물이다. 당관만이 아니라 무림맹의 십이봉공과 장로들 모두가 쉽게 건드리기 힘든 거물들이다.

그런 거물이 지금 이 시간에, 하필이면 뇌옥 앞을 지키고 있다고?

‘읽힌 거다.’

그의 눈이 빛났다.

‘제갈문호로군. 정말 놀라워.’

지식이 많다고 좋은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얼마나 응용할 수 있느냐다.

나아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필요했다. 때로는 그러한 직감이 논리를 초월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의 제갈문호처럼.

‘확신이든 단순한 대비든,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두뇌와 직감이 놀랍다.’

아쉬웠다.

‘본교에 그만한 군사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핏빛 광신(狂神)의 흉성을 제어하면서도 다른 두 교단 못지않게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변종에 불과한 자신이 날뛸 필요도 없었을 테지.

‘문제는’

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과연 내가 당관의 눈을 속이고 뇌옥에 침입할 수 있는가다.’

혹은, 당관을 죽이거나.

‘일단 죽이는 건 힘들 거다.’

광혈귀면은 순식간에 상대와 똑같이 변신할 수 있는 놀라운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내공 운용이었다.

신법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가능하되, 그 이상은 어렵다. 지금 상태로도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지만, 당관 정도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숨어들어야 한단 것인데.’

은신술 역시 신법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의 은신술은 성천의 고수 정도가 아니면 꿰뚫어 보기 힘들다.

문제는 뇌옥의 구조에 있었다.

‘입구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어차피 뒤를 생각지 않는 작전이었다. 뇌옥에서의 일이 마무리된 연후에 죽으면 모든 게 완성된다.

뇌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 앞을 당관이라는 거물이 지키고 있으니 난관도 이런 난관이 없었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생겼군.’

그가 한 발을 살짝 뒤로 뺐다.

그때였다.

“도망은 추천하지 않아.”

제아무리 그라도 이 순간만큼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관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놀라운 은신술이로군. 천라독망(天羅毒網)을 펼쳐 두지 않았다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몰랐을 거야.”

천라독망.

사천당가에서도 최고의 비술로 일컬어지는 공부 중 하나다. 보통은 셋 이상의 독인이 펼치는 게 정석이지만, 당관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혼자서도 능히 반나절은 펼칠 수 있는 죽음의 진법이 바로 천라독망이었다.

“미리 말하는데, 거기서 이 장 밖으로 벗어나는 즉시 자네는 중독될 걸세.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겠지. 하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은 말이야.”

섬뜩한 말이었다.

적어도 관리자인 그에게 있어 이만큼이나 효과적인 협박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상정한 그에게 있어 죽지도 못하고 전투 불능이 된다는 것은 지독한 치욕이었다.

“이만 나오게.”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자네도 대화 한마디 없이 죽고 싶진 않았을 거야.”

당관이 관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자네는 본 적이 있는데.”

“…….”

“형당의 부당주 아니었던가? 성이 석씨였던 걸로 기억하네만.”

형당과 뇌옥을 관리하는 봉공 중 하나가 바로 모용군이었다. 그리고 당관은, 과거 모용군과 한배를 탔던 시절 형당의 당주와 부당주를 본 적이 있었다.

석방헌이 된 관리자가 말했다.

“대단하시오.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이오?”

“누군가가 이리로 가라 하더군. 여길 노릴 수도 있을 거라고.”

“제갈 군사로군.”

“뭐, 그거야 알 바 아니고. 나는 네놈이 더 대단하다. 설마하니 무림맹이 창건된 때부터 형당의 부당주로 살아온 건가? 아니면 그전부터 석방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건가?”

광혈귀면공에 대해서 모르는 당관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관리자는, 그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를 보며, 당관이 말을 이었다.

“네놈의 눈깔을 보니 회유나 협박 따위는 통하지 않겠군. 철저하게 훈련받았어. 임무를 위해서는 목숨이고 나발이고 없는 놈이야.”

“…….”

“그래도 찔러는 봐야겠군. 지금이라도 본맹으로 이적하게나. 목숨도 살려 주고, 자네라는 인간의 가치를 잘 활용해 주겠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제안이었다.

관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표정의 변화도, 눈빛의 변화도 없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은 멋진 것이지. 하지만 나는 자네의 그러한 태도를 충성이라 보지 않는다네. 개도 보상이 없으면 주인을 따르지 않는 법이거늘, 자네의 충성은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 무가치한 신앙 같군.”

“……보답을 바라는 충성 따위는 진짜 충성이 아니외다.”

“그런가?”

“당신과 충성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소. 다만, 나 역시 하나 제안하리다.”

“신선하군. 잡힌 물고기가 제안 따위를 하다니, 참으로 생소한 상황이야.”

“날 죽이면 당신도 죽소.”

“호오, 최소한 내 흥미를 끌긴 했네. 계속해 보게. 들어 주지.”

“나는 바보가 아니오. 그리고 본교 역시 바보가 아니오. 사지로 향하는 놈의 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소?”

“흠.”

“여기 계신 걸 보면 세작이 누구인지 아시는 듯하군.”

“풍벽자? ……씹어먹을 놈 같으니.”

확실하군.

관리자는 무림맹이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수많은 정보를 빼돌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교가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얻길 바랐다.

필수 임무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훗날 광혈에 지대한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는 거물 몇이라도 죽여야 할 것이다.

“내 몸에는 폭혈공(爆血功)이 숨 쉬고 있소. 내 목숨이 끊어지거나 심맥에 지대한 타격을 받는 순간 반경 십여 장이 초토화될 것이오.”

“그건 마음에 안 드는구먼그래.”

폭혈공은 자폭성 마공이었다. 당금 무림에는 금지된, 이제는 이름만 알려진 전설상의 무공에 가까웠다.

물론 말이 그렇지, 무림의 몇몇 조직은 그와 유사한 마공을 조직원들에게 심어 두기도 했다.

다만, 관리자가 말한 폭혈공이 진짜 그 폭혈공이라면 문제가 정말 심각해진다.

“선택하시오. 당신이 죽을 거요? 아니면 날 얌전히 뇌옥에 들여보내 주겠소?”

“…….”

“뭐가 되었든 난 죽소. 거기에 당신도 함께 죽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오.”

“내가 자네의 목숨을 움켜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실상은 그 반대라 이건가?”

“상관없소. 더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소. 셋을 세기 전에 선택하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자폭하겠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오 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거리는 폭혈공의 반경에 넉넉하게 들어온다.

당관이 눈을 빛냈다.

선택을 강요당하면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폭혈공의 위력을 낮추려면 자폭자가 죽기 전에 기해혈(氣海穴)이나 명문혈(命門穴) 중 한 곳을 파괴, 폭발 전 진기 변환을 죽이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하더군.”

“시험해 보시겠소?”

“그래 볼까?”

“당신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자폭할 텐데?”

“자네는 나와 본가를 너무 우습게 아는군.”

“성천의 강자라도 이 거리에선…….”

“천라독망에 걸렸음에도 그따위 언사를 내뱉다니, 참으로 우습도다.”

관리자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뭐가 저리 당당하지?

푹!

순간 관리자는 자신의 명치를 내려다보았다.

등 뒤, 명문혈을 뚫은 장검 하나가 그의 명치로 쑥 빠져나와 있었다.

당관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독을 모르는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네놈의 감각이 언제부터 흐트러졌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더냐?”

“……!!”

눈을 부릅뜬 관리자가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당관과 모용군이 서 있었다. 빛살처럼 날아와 그의 명문혈을 파괴한 사람은 바로 모용군이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관리자의 피부가 점점 핏빛으로 물들다가 시퍼렇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관리자가 히죽 웃었다.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틀렸어.”

허공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아아아아앙! 쾅!

어느새 당관과 모용군의 앞에 내려선 연호정이 현무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사신기 최강의 방어 무공, 북천십이벽이 시커먼 수기(水氣)를 일으키며 절대 무적의 방벽을 세웠다.

화포도 막는 무적의 방벽, 흐트러진 폭혈공 따위에 뚫릴 무공이 아니다.

반투명한 흑수(黑水) 뒤에서 당관이 차갑게 웃었다.

“고생했다. 잘 가라.”

관리자가 눈을 감았다.

일순 그의 몸에서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