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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97화 (496/963)

497화. 인내의 시간 (2)

“이, 이게 도대체?!”

군사부의 호위장은 놀라서 창밖을 보았다.

어지간한 일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였지만, 사방에서 연신 폭음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선 제아무리 그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위장이 제갈문호를 보았다.

“군사님!”

“경거망동하지 말게.”

제갈문호는 차분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반대로 당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예상이 가오?”

“세작이 발악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제갈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허연 달빛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이 시간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모용가주가 실수했을 리는 없을 테니, 복호사태 쪽은 아니라는 말인데.”

“복호사태가 아니라 함은?”

“승현진인이나 풍벽자입니다. 하지만 승현진인이었다면 풍벽자의 동태를 확인한 연 대수가 곧장 연락을 취했거나, 이곳으로 직접 왔겠지요.”

“하면?!”

“예. 이로써 세작이 풍벽자임을 구 할 이상 확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관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풍벽자를 떠올렸다. 유쾌하면서도 당돌하고, 그러면서도 백도 정파 어른으로서의 담백함과 차분함이 돋보이는 얼굴을.

“이런 망할 놈이……!”

“구 할 이상의 가능성이지만, 아직 사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군사부의 정보단에서 따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좋소, 누가 세작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태라고 칩시다.”

당관이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폭발이 일어났소. 군사도 느꼈잖소? 이 폭발이 평범한 폭발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갈문호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첫 번째 폭발은 화약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화약이 터지긴 했으나 화기(火氣)가 지나치게 충천하고 있어요. 그 말인즉 화약보다는 대량의 기름이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반면 두 번째 폭발은…….”

“화약이오. 아마도 진천뢰(震天雷)일 것이오.”

암기의 전문가들은 온갖 사출병기(射出兵器)는 물론 화약에 관해서도 깊은 지식을 보유하기 마련이다.

당대 천하, 화약과 화탄에 관해서 당관만큼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몇 없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니오. 수십 발이 터졌소. 터지는 소리와 연쇄 폭발의 미묘한 간격 차를 생각하면 기존의 진천뢰가 아닌 개량형이 분명하오.”

폭음의 크기와 터지는 양상만 듣고도 화탄의 종류와 개량 여부를 알아챈다. 당관의 안목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첫 번째 폭발은 증거 인멸, 그리고 두 번째 폭발은…….”

“도주를 위한 시선 끌기.”

“역시 그렇군요.”

“지금이라도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안 됩니다.”

제갈문호가 차를 홀짝였다. 다급한 상황임에도 그는 냉정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놈들은 한계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그러하지요. 만에 하나 도주하는 척하고 다시 내성으로 진입, 군사부나 봉공들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겁니다.”

“…….”

“제자리를 지키십시오. 답답해도,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앉아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의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영 답답했다.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풍벽자라면, 두 번째 폭발이 의문이다.’

이차 폭음이 터진 곳은 형당, 전투 부대 두 곳의 거처, 그 외에 조직 네다섯 곳이 밀집한 구역이었다.

물론 말이 밀집이지, 내성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이 정도 폭발로 여러 조직이 피해를 보진 않았을 것이다.

‘답은 하나, 연락책이나 관리자가 저쪽에 있다는 것.’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이 정도 폭발로 연 대수가 풍벽자를 놓칠 리는 없을 터. 적도 그 정도는 알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문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세작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연락책이나 관리자가 살기 위해 풍벽자가 희생했다는 뜻인가?’

정말 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판이 뒤집히는 일이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세작을 떨쳐 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세작, 그리고 세작과 연결된 연락책과 관리자를 잡는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충분하긴 합니다.”

“충분하지 않소. 세작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오. 이미 패배한 전쟁에서, 그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일 뿐이지.”

“예, 당가주의 말씀도 옳습니다. 그러나 세작을 잡은 행위 자체가 삼교를 향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반격의 봉화를 올리는 순간이라고 볼 수는 있지요.”

제갈문호가 눈을 감았다.

“연 대수가 묵룡부로 향해야 하는 이유가 더 확고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제 삼교의 시선은 무림맹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그 압박감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묵룡부가 제대로 나서 주면, 삼교의 시선도 분산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훗날의 일.’

지금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한없이 무거워진 분위기 속, 두 사람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군사님!”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연 대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세작 풍벽자는 자폭했고, 연락책 역시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가 관리자를 잡으러 간다고 합니다!”

제갈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관리자의 정체는?”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형당에 갇혀 있던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쾅!

제갈문호가 탁자를 후려쳤다.

참고 참았던 불안감이 분노가 되어 표출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관리자가 어디로 도주했다던가?”

“그 또한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갈문호가 서둘러 말했다.

“지금 당장 내성 전체에 적색 경보를 내리게! 지금부터 누구도 내성을 오갈 수 없네! 폭발 현장을 수습할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든 무사가 내성과 외성의 성벽을 완벽하게 사수해야만 하네!”

“예, 예!”

“그리고 당가주.”

“말씀하시오.”

제갈문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뇌옥 입구로 향해 주시오!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전부 막아 주시오! 섣불리 진입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제압해 주시오!”

느닷없이 뇌옥을 들먹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당관은 그와 입씨름하지 않았다.

파아아앙!

창밖으로 몸을 날린 당관의 신형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파아아아아앙!

풍벽자의 독진(毒陣)에서 벗어난 연호정은 군사부 정보단에 연락 이후 곧장 형당으로 향했다.

‘엄청나군.’

풍벽자의 함정이 독이나 폭약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연호정이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이이익!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연호정은 순간 자신의 어깨에서 흘러 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그가 단숨에 어깨 쪽 의복을 뜯어냈다.

펄럭! 치이이익!

뜯어져 나간 의복이 연기를 내며 녹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독이었다. 아니, 독이라기보다는 화골산(化骨散)에 가까웠다. 독의 명가인 당가에서도 독인(毒人)의 경지에 오르거나, 사전에 확실한 조치를 취해 둔 고수가 아니라면 알고도 당할 만큼 독한 놈이었다.

치리리리링!

맨살이 드러난 좌측 팔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선명한 근육 위로 흑회색 교룡쇄가 칭칭 감겼다.

파파파파팡!

허공에서 몇 차례나 방향을 전환한 연호정의 눈에 놀란 얼굴을 한 제갈아연이 보였다.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보며 외쳤다.

“호……!”

파아악!

단숨에 그녀를 안고 달리며, 연호정이 말했다.

“폭발 현장의 화재 진압 방법, 잘 알고 있겠지?”

“어? 아, 알지!”

“형당의 화재를 잠재워 줘. 최대한 빨리!”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제갈아연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응!”

후우우우우웅!

혼신의 힘을 다해 거리를 좁힌 연호정의 눈에, 비로소 엉망진창이 된 형당이 보였다.

‘이런 미친!’

폭약이 터진 지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형당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으아아악!”

“벽을, 벽을 무너트려! 불을 잠재워야 한다!”

“사람부터 구해! 저기 건물 벽에 깔린 사람! 저 사람 아직 살아 있어!”

“모래를 퍼 와! 빨리!”

무수히 많은 사람이 형당의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출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나다.’

도대체 몇 발의 진천뢰가 터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넓은 형당의 건물 중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연호정이 외쳤다.

“사람부터 구해야 해!”

“걱정하지 마!”

휘리리리릭!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공중으로 던졌다. 허공을 난 제갈아연이 멋들어진 신법으로 형당 대문 앞으로 내려섰다.

터어어엉!

무너지지 않은 형당의 벽을 밟고 날아오른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저기다.’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형당 내에서도 그나마 멀쩡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야산과 이어진 곳, 형당에서 외성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파아아아악!

극속의 혈익휘천으로 쏘아진 연호정이 땅에 내려섰다.

‘……!’

깊게 파인 땅, 그리고 한옆에 굴러다니는 큼직한 상자가 보였다. 필시 진천뢰가 담겨 있던 상자일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전신에 막대한 양의 진기를 흩뿌렸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쓸 때가 아니었다. 사지로 뻗어 나가는 진기를 현무기(玄武氣)로 치환하여 뇌와 연결된 척수(脊髓)로 집중시켰다.

화아아아아악!

시야가 밝아지고,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지각 능력이 평소의 배 이상이 되었다. 신경에 직접적으로 진기를 쏟아부어 지각 능력 자체를 향상시키는 방법이었다.

진기 운용 방식을 생각하면, 이 방법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반신불수, 심하면 즉사할 수도 있다. 지극히 섬세한 내공 운용이 필요한 것이다.

효과가 확실한 것은 기(氣)가 강성한 백호기와 주작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흑암제 시절에도 시도해 보지 못했다. 진짜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인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연호정이 눈이 도주자의 족적을 읽어 냈다.

‘외성 쪽, 야산을 타 넘었군.’

파앙!

그대로 야산을 타 넘는 연호정의 눈에 쭉 이어진 족적이 보였다.

평소라면 절대 보지 못했을 흔적. 흔적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족적과 바람의 흐름, 화약의 냄새, 긴장하여 쏟아 낸 땀 냄새가 그에게 도주자의 이동 방향을 알려 주었다.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낼 순 없지만, 적의 이동로를 예민하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연호정은 지각 능력을 극대화한 채,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는 속도로 도주자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흔적이 멈추었다.

흔적이 나아가는 길만 보면 도주자는 외성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냄새와 족적은 외성을 넘어가지 않았다.

‘우측.’

연호정의 동공이 현무기의 어둠을 담았다.

‘다시 내성으로?!’

외성을 넘어 도주해야 마땅한데, 이놈은 다시 내성으로 돌아갔다.

대체 내성 어디로?

순간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뇌옥!”

콰아앙!

현무기를 거둔 그가 극속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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