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인내의 시간 (1)
번쩍!
등천교의 눈이 빛났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당의 부당주는 문서 몇 장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에, 일단은…….”
부당주가 입맛을 다셨다.
“지금 당장은 형식적인 수사가 진행될 겁니다. 피해자와 대면도 해야 하고, 그에게서도 사정을 들어 봐야 하니까요.”
“…….”
등천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부당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부당주가 헛기침을 했다. 공동파 장문인씩이나 되는 사람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상황은 절대 유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맹법에는 지위고하를 막론, 형당에 들어온 이상 모두가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맹법은 유연하게 해석되기도 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였다.
아무리 공정을 외친다지만 구파일방의 일익을 맡은 장문인이다. 강호의 기여도와 역사를 생각하면, 아무리 맹법이 지엄하다고 해도 흉악범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직 피해자의 사정도 들어 보지 못했다. 가해자이긴 하나, 정확한 취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장문인께서도 일시적 구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피해자의 얘기를 들어 보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그 뒤에도 계속 구금되실 겁니다.”
등천교가 입을 열었다.
“도주의 우려가 없는데도 일단 구금부터 하고 보는 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부당주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목격자가 있으니까요. 본래 신고를 받으면 사건에 관해 얘기를 들어 본 연후에 복잡성에 따라서 바로 구금하기도 하고, 자택 구금 형태로 일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주먹구구식이군.”
“보기에는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부당주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천교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뭔가 듣기 떨떠름하다고 해야 할까.
부당주가 말을 이었다.
“입건되셨을 당시, 장문인께서도 의정군의 대수에게 먼저 살수를 가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목격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으며 가해자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니, 장문인께서 이곳에 계시는 건 당연합니다.”
왜 그 사실을 인정했을까? 자존심 때문일까? 목격자라고 해 봐야 모용군 하나인데, 제아무리 그의 발언권이 강하다 한들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일 문제이기도 했다.
부당주는 그것을 더 깊게 고민했어야 했다.
“그나마 장문인께서 용화진인을 설득해 주신 덕분에 저희 일이 편해졌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선 분명한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의 조사에 더욱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했으니까.”
“예?”
“용화진인까지 날뛰어 버리면 곤란해. 그래서 그를 설득한 것이야.”
부당주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맹을 위하시는 장문인의 마음은 역시 남다른 바가 있군요. 죄를 없는 것으로 할 순 없겠지만, 참작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참작도록 하겠습니다.”
형당이나 무림맹의 위계, 영향력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당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또 한 번 이상함을 느꼈다.
‘왠지 귀가 간질거리는걸.’
등천교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단순히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일까?
“그래도 장문인께 희소식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공동파의 사인호 검사 같은 경우 어떻게든 유예를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호정 대수와의 합의를 잘 끌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고맙구먼.”
“별말씀을요.”
“별말씀을요.”
“……?”
“…….”
“예?”
“예?”
부당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혹시,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혹시,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등천교는 부당주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가만히 등천교를 보던 부당주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기분이 나쁘신 것을 압니다. 그래도 공적인 자리이니, 장난은 그쯤 해 주십시오.”
“기분이 나쁘신 것을 압니다. 그래도 공적인 자리이니, 장난은 그쯤 해 주십시오.”
부당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공동파의 장문인이라도 가해자 신분으로 형당에 온 사람이다. 취조실에서의 이런 행동은 곤란했다.
“그만하시지요, 장문인.”
등천교는 그제야 입을 닫았다.
부당주가 한숨을 쉬었다.
“심기가 많이 상하신 것을 압니다. 말씀드렸듯 제가 자잘한 부분에서는 어떻게든 참작을…….”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자네 이름 말일세. 날 조사하는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어서.”
해석에 따라, 부당주를 겁박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공동파 장문인의 영향력이 작지 않은 까닭이었다.
가만히 등천교를 보던 부당주가 입을 열었다.
“석방헌이라 합니다.”
“석방헌이라…… 좋은 이름이로고.”
등천교의 목소리는 더더욱 낮아졌다. 마치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부당주, 석방헌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까지 낮아질 수 있나?
아니, 낮아질 수는 있다. 당장 자신의 목소리도 저와 비슷할 정도로 낮았으니까. 다만 등천교의 목소리는 남자치고 높은 편이었으며, 나이가 있는 만큼 상당히 늙수그레한…….
“……?!”
순간 석방헌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저건 내 목소리인데?’
그때, 등천교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석방헌이 본 적 없는 차가운 미소였다.
“고맙군.”
피슉!
석방헌의 몸이 덜컥 멎었다.
풀썩!
탁자 위에 머리를 박은 석방헌의 숨은 어느새 끊어져 있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천천히 탁자를 적셨다.
등천교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흡.”
키잉!
수갑이 대번에 끊어져 버렸다.
석방헌의 몸에서 열쇠를 찾아 손목의 철갑까지 빼낸 등천교가 그의 몸을 의자에 기대게 하여 눕혔다.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석방헌의 얼굴은 놀라던 표정 그대로였다.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버린 것이다.
등천교가 오른손을 올렸다.
치이이이익!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진기가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가면이었다.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붉은 진기의 가면이 거기에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형당에 갇히면 일차적으로 내공 봉쇄의 점혈을 당하고, 이차적으로 수갑까지 찬다. 그 수갑도 보통 귀물이 아닌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혈도를 오가는 진기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즉 육신의 힘으로 수갑을 끊는 것도, 이렇게 신묘한 진기를 끌어 올리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란 말이다.
스르륵.
등천교는 석방헌의 얼굴에 진기의 가면을 씌웠다.
우우우우웅.
얼굴 한 치 위에 뜬 붉은 가면이 석방헌의 얼굴을 본뜨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는 게 아쉽군.”
광혈귀면(狂血鬼面)이 극성에 이르면 사람의 골격까지도 덮을 수 있다. 등천교의 광혈귀면공은 그러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골격까지 본을 뜨려면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마저도 자신의 육체에 씌워 축골공(縮骨功)으로 골격마저 바꿔 변신(變身)하려면 사흘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완벽하게 석방헌의 몸을 복사(複寫)할 시간도, 변신할 시간도 없다.
‘하긴, 고작 이런 조무래기 때문에 귀면공의 횟수 한 번을 없애 버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
우우우우웅.
광혈귀면이 점차 푸른빛을 띠었다.
등천교가 파랗게 변한 가면을 얼굴에 썼다.
우둑!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두두둑! 우두둑!
그의 얼굴 골격과 근육의 형태가 변했다.
허연 수염도 빠졌고, 머리카락의 색까지 변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끄응.”
등천교, 아니 이제 석방헌이 된 사내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내심으로는 누구 못지않은 그였지만, 뼈가 뒤틀리고 근육의 구조가 바뀌는 이 과정은 참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광혈귀면공을 익힌 사람 중 생존자는 삼 할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삼 할 중에서도 변신하다가 심맥에 충격을 받아 죽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광혈의 이름 아래, 귀면공을 가장 수준 높게 연마한 그조차도 한 번씩 죽음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위험한 무공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혈귀면공의 위력은 빛을 발했다.
잠시 후.
“허억! 허억!”
한껏 숨을 몰아쉰 그가 빠르게 호흡을 골랐다.
‘됐군.’
완벽하다.
키와 골격은 석방헌이 미세하게 더 컸지만, 그 정도 차이는 얼굴만 바꾼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는 석방헌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취조실을 나갔다.
“부당주님.”
“음”
오가는 당원들이 그에게 허리를 접고 인사했다.
석방헌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지났다.
등 뒤에서 당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당주님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공동파 장문인 취조를 담당하셨잖아. 그럴 만도 하지.”
“휴, 또 분위기 살벌해지겠구만.”
대화에 많은 정보가 숨어 있다. 그는 석방헌이 어떤 인물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일 층으로 내려가는 중에 당원 하나가 그의 어깨를 쳤다.
“억!”
그가 눈을 부릅떴다.
“눈 똑바로 뜨고 다니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일 층으로 내려섰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저 멀리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헉! 저, 저게 뭐야?!”
“폭발이다!”
“어디야? 어디서 폭발이……?!”
“저기다!”
그때, 그가 외쳤다.
“당원들은 당황하지 말고 위치를 사수해라!”
우르르 몰려나온 당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가 수문장을 향해 외쳤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다! 수문장은 내가 나서면 문부터 걸어 잠가라! 혹 죄인의 탈출을 돕는 반역자가 있을 수도 있다!”
수문장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부당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는 재빨리 문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형당의 대문이 닫혔다.
그는 불이 난 곳으로 가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풍벽자의 귀면진기(鬼面眞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기다려라, 풍벽자.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재빨리 형당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간 그가 서쪽 외벽에 난 검흔을 찾았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그은 것이니까.
파바바박!
매서운 수공(手功)으로 땅을 파는데, 그 속도가 실로 대단했다.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땅이 퍽퍽 파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팠을까.
종의 길이 석 자, 횡의 길이 한 자, 높이 두 자에 가까운 커다란 철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컹!
상자를 여니, 그 안에 시커먼 구슬들이 가득했다.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그 구슬들은, 황궁이 비밀리 제작한 소형 진천뢰(震天雷), 즉 폭탄이었다.
그중 하나를 품에 넣은 그가 그대로 상자를 들어 크게 휘둘렀다.
후두두두둑.
형당 건물 곳곳으로 날아간 진천뢰가 여기저기로 떨어져 굴러다녔다.
“응? 이건 뭐야?”
“구슬? 아닌데. 구슬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묵직…….”
그가 미소를 지었다.
‘구슬은 아니지.’
파아아아악!
언덕을 타 넘은 그가 품에 넣은 진천뢰의 안전관을 뽑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형당을 향해 진천뢰를 던졌다.
잠시 후.
콰아아아앙! 콰콰콰쾅!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형당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퍼어어어어어엉!
시뻘건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광혈귀면의 암시에 걸린 풍벽자가 자살을 감행했음을.
‘완벽하군.’
그가 몸을 돌렸다.
파악!
바람과 같은 신법을 펼친 그는, 어느새 무림맹 내성을 벗어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