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폭풍우가 몰아치다 (6)
번쩍!
어둠을 꿰뚫는 연호정의 눈빛은 귀신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으스스했다.
풍벽자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여기는 너무 어둡군. 따라오시게.”
당당하게 몸을 돌리고, 거칠 것 없이 걸어간다.
그야말로 대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자신이 세작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상대에게 의심을 샀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데도 등을 보인다.
척.
연호정은 서슴없이 흑룡부를 쥐었다. 적의 속내를 알아보는 시간 따위는 그에게 사치였다. 일단 사지부터 부러트려 놓고 난 연후에 대화해도 늦지 않다.
그때, 풍벽자가 말했다.
“아, 혹시 이거 알고 있나?”
“…….”
“우리가 여기서 일을 벌이면 자네가 아는 누군가가 위험해질 수도 있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일을 벌인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의뭉 떨기는. 다 알면서 그러나.”
여유만만이었다. 적어도 목소리만 듣기에는 그러했다.
“자네가 어디로 향하는 중이었든, 적어도 나와 대화하는 게 시간 죽이는 일이 되진 않을 걸세. 내 보증하지.”
“그 말을 내가 믿을 이유가 있소?”
“믿어서 손해 볼 건 또 뭔가? 심지어 자네, 나보다 더 강하잖나?”
서슴없이 연호정을 자신보다 강자라고 인정한다.
가만히 풍벽자의 등을 노려보던 연호정은, 이내 흑룡부에서 손을 떼었다.
풍벽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보지 않았음에도 연호정의 투기가 줄어드는 걸 느낀 것이다.
“잘 생각했네.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괜한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나는 그렇겠지만, 당신은 다르지. 저승길은 멀거든.”
“저승길이라…… 미안하지만 내가 죽어서 갈 곳은 저승의 유부(幽府)가 아니라네. 신의 곁이지.”
신(神).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연호정은 지체 없이 풍벽자를 향해 걸었다.
신법을 펼치진 않았지만, 걸음걸이 자체가 빨랐다. 거칠 것 없는 보행,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는 사신무장(四神武將)의 행보다.
풍벽자는 내심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말로 묶어 놓는 건 안 되겠군.’
시간을 끌든 뭘 하든,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발이 땅을 디뎠다 떼어질 때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패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완고하기까지 한 기운. 풍벽자는 넘치던 자신감이 조금, 아주 조금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풍벽자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할 필요 없다. 놈도 사람이거늘.’
잠시 후,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숲속에 있는 널찍한 공터였다.
“달빛 좋군.”
풍벽자는 여전히 뒷짐을 지며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연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정을 설치해 놓은 것 같진 않은데?”
“함정? 허허허, 대체 어떤 함정을 파 놓으면 당해 줄 텐가? 자네, 급조한 함정 따위에 빠져 허우적댈 만한 인사는 아니지 않나?”
풍벽자가 몸을 돌렸다.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낮에 봤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여유 가득한 표정. 인자하면서도 짓궂어 보이는 얼굴이다. 표정 자체는 낮에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은, 연호정의 살벌한 안광에도 눌리지 않을 만큼 깊고 단단했다. 마치 잘 제련된 철구를 보는 것 같았다.
녹이 슨 철구. 만지면 불그스름한 녹이 묻어 나올 것 같은, 시린 쇠 맛이 물씬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물끄러미 풍벽자를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디에서 왔나?”
“알고 있잖은가?”
“삼교인 건 알지. 하지만 삼교 중 어디인지는 모르지.”
풍벽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셋이자 하나이고, 하나이자 셋일세. 그런 구분을 둬 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물론, 내가 속한 교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은 확실하네. 그저 자네에게 그걸 알려 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
“광혈(狂血)인가?”
풍벽자의 눈이 깊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사음이라면 자신이 알아봤을 테니까.
제아무리 연성한 무공이 달라도 특유의 기질까지 바꾸긴 힘든 법이다. 그건 평생을 청성파에서 도가의 무공을 연성했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낮에 느꼈던 그 미묘한 기운은 사음의 것과 거리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 기운의 본질을 알아내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사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신화와 광혈이 남는데, 만에 하나 신화였다면 굳이 지척에 정보 거점을 만드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풍벽자 말마따나 삼교는 셋이자 하나이고, 하나이자 셋이다.
그러나 그들은 흑암제 시절에도 완벽한 하나가 되지 못했다. 자신들끼리 부딪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신화교의 인물이었다면, 봉공들과 몇 번이나 마주했을 서역신녀가 그를 못 알아봤을 리 없다.
그리고 신화교는 무림보다 황궁 측을 공략하느라 바쁘다고 알고 있다.
“광혈이든 사음이든 신화든, 이 자리에서 네가 죽는 건 변함이 없다.”
차아아앙!
흑룡부와 백룡부를 뽑아 든 연호정에게서 매서운 살기가 솟구쳤다.
오랜 세월 청성의 무공을 익혀 온 풍벽자조차 받아 내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살기였다. ‘가면’의 기운을 끌어 올려도 받아 내기 힘들 것이다.
풍벽자가 말했다.
“대화 좀 하자고 왔더니 냉큼 도끼부터 꺼내 드는군.”
“나도 혓바닥 놀리는 걸 싫어하진 않아.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취미도 없다.”
“내겐 쓸데없을지 몰라도, 자네에게는 제법 쓸모 있는 시간이 될 텐데.”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저 멀리 북쪽 지점에서 거대한 화염이 솟구쳤다.
폭발이었다. 그 폭발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여기까지 땅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저곳은?’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뇌부들의 거처가 아닌데?’
풍벽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로써 내가 빼돌렸던 정보 문서와 통로가 날아가 버렸군.”
“그리고 연락책도 죽었겠지.”
“…….”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흔적을 지웠나? 역시 예상대로군.”
풍벽자의 눈이 흔들렸다.
“연락책을 죽인 것은 어떻게 알지?”
“방금 말했듯 흔적을 지워야 하니까. 너 같은 놈들이 하는 짓거리야 뻔하지.”
“…….”
“연락책은 누구였나? 대놓고 의복단은 아닐 테고, 의심을 씌우기 가장 좋은 사람은 복호사태겠지. 그렇다면 역시나 음향단에 연락책이 있었겠군.”
무서운 놈.
풍벽자는 연호정의 눈치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의심하고, 의심이 가는 자의 주변을 모조리 조사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를 활용해 느닷없이 터진 사태를 순식간에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해 내는 저 두뇌는 보통 사람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역시 이놈이었어.’
풍벽자는 확신했다.
이놈이야말로 당대 무림맹의 보이지 않는 핵이다. 제갈문호가 돕기도 했겠지만, 이놈의 불가해한 능력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아쉽구먼. 자네가 이리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다면, 진즉에 죽여 버리는 것인데.”
“미리 알았다 해도 죽이진 못했을 것이다. 워낙 뒤통수를 많이 맞고 살아와서 그런지, 그런 쪽으로 감각이 좋거든.”
“그런가?”
“그래서 의문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날 죽일 생각이다. 죽여야만 하지. 하지만 너무 요란한데?”
“요란하다?”
“굳이 이런 식으로 날 끌어들일 이유는 없다. 그냥 몰래 와서 독을 타든 화약을 터트리든 하면 되니까.”
풍벽자가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지.”
“말하자면 날 묶어 두는 것이 지금 당장 너의 최선이라는 뜻인데.”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군사부에 암살자라도 보냈나? 널 관리하는 관리자가 그러라고 시키던가?”
두 번째였다.
풍벽자는 벌써 두 번이나 상대의 안목에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물론 정말로 암살자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최근 관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는 풍벽자도 알지 못했다.
풍벽자가 놀란 것은, 연호정이 ‘관리자’의 존재 자체를 유추했기 때문이었다.
‘…….’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연호정의 판단은 정확했다. 풍벽자는 최고의 세작으로 키워진 존재이며, 도인들도 속을 만큼 자신의 천성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록 위기 한 번 겪지 못한 그는, 어느새 능력은 출중하나 응변의 기지는 부족한 반쪽짜리 세작이 되어 버렸다.
그에게 관리자가 붙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미안하지만 천하의 어떤 암살자도 군사부에 침투할 수는 없다. 현재 군사부는 강호에서 가장 뚫기 어려운 철벽의 요새가 되었거든.”
“…….”
“그나저나.”
스륵.
연호정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함정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테고.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게 해 준 무기나 슬슬 꺼내 보지 그러나?”
움찔!
풍벽자의 오른손 검지가 꿈틀거렸다.
연호정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감정에 풍랑을 일으켰다.
“설마하니, 정말로 나와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니겠지?”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히는 연호정.
다가오는 그를 보며, 풍벽자가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러웠지만, 연호정의 눈에는 그 미소가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였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넌 죽는다.”
“그래?”
“자신 있으면 한 발 디뎌 보시지.”
허세도, 농담도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연호정은 이 공터에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놈이 뭔가 함정을 설치했음을. 함정을 설치한 것 같지 않다는 말 자체가 상대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연출된 발언이었다.
‘이상하군.’
연호정 역시 웃고 있었지만, 사실 상당히 의아했다.
‘나나 군사님을 죽이는 거야 합당한 판단이지만…… 뭐가 이렇게 어설프지?’
처음 골목에서 나타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반응이 마치 삼류 파락호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상대를 압박한 건 자신이지만, 아무리 경험 없는 세작이라도 이 정도 압박에 저렇게까지 흔들릴 수가 있는가? 그래도 최고 중의 최고일 텐데?
연호정은 다시 한번 풍벽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설마 다른 사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자는 풍벽자가 확실했다.
풍벽자가 이죽거렸다.
“왜? 천하의 벽산호장도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사다.
연호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이 점점 심각한 빛을 띠었다.
‘뭐야, 이거.’
압박이 절정에 치달은 순간.
그 순간부터 풍벽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웅. 우우웅.
청정한 도가신공의 기운 너머로, 낮에 연호정이 느꼈던 그 기괴한 기운이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폭주를 시작하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설마 이놈?!’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또 한 번의 폭음이 울려 퍼졌다.
군사부 쪽이 아니었다. 군사부와는 완전히 반대쪽, 형당 뇌옥 방향에서 터진 폭발음이 사위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풍벽자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죽어!!”
쾅!
진각과 함께 공터 땅 밑에서 희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그 범위가 실로 엄청났다. 반경 이십여 장을 아우르는 연기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려 버렸다.
그리고.
치이이이이이익! 주르륵.
풍벽자의 몸이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