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93화 (492/963)

493화. 폭풍우가 몰아치다 (4)

쿵!

“빌어먹을.”

탁자를 후려치는 주먹에서 무시무시한 분노가 느껴졌다.

“놈이 알아챘을까.”

실질적으로 연호정과 마주하여 얘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교에서 연호정을 주시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연호정의 손에 야율적이 죽었고, 소방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장악했던 광동성의 세력이 한순간에 공중분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신화교의 무장들과 생사결을 벌일 때도 연호정은 거기에 있었다. 듣기로 일호무장 번작을 패퇴시키는 데에 연위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하였다.

심지어 무림맹 근처, 신화교의 정보 거점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도 연호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연호정은, 무림맹과 얽힌 삼교와의 굵직한 싸움에 모조리 개입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연호정을 그리 위험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 재능과 안목, 지략은 분명 대단하지만, 결국 젊음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제아무리 천재라도 경험으로 무장한 세월을 이기긴 힘들다.

결국 연호정이 중지(重地)에서 날뛰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그를 뒤에서 받쳐 준 사람은 따로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갈문호가 아니었어.’

연호정을 장기 말로 삼아 날카로운 안목으로 신화와 사음의 고수들을 하나둘씩 척결한 진짜 괴물.

그는 그게 제갈문호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얼마 전 회의 때 보여 준 제갈문호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오싹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연호정을 만나 본 결과,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전면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제갈문호가 아니라 연호정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연호정과 제갈문호의 합작이었을 확률이 높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연호정은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나아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연호정보다 그 뒤에 있는 제갈문호를 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연호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질적으로 삼교의 고수들을 패퇴시킨 중심인물이, 제갈문호보다는 연호정 쪽이었음을.

‘녀석은 나를 보았다.’

세작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직감이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 다가오는 위험을, 위험한 공기를 알아챌 수 있는 민감한 기질.

그는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타고난 그 육감이, 성장한 무공과 절정의 내공 덕에 활짝 꽃을 피웠다.

그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복호보다 나를 더 주시하고 있었어. 눈이 많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놈의 신경은 온통 나에게 쏠려 있었다.’

풍벽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의심 단계를 벗어나진 못했어. 하지만, 조만간 목을 죄어 올 것이 분명해.”

육감 외에도, 연호정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반응이었다.

점창의 패율과 청성의 검사가 싸우며 폭발한 막강한 기파는,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의 내기(內氣)를 뒤흔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풍벽자는 그 느낌을, 그 순간을 기억했다.

자신도 모르게 흔들린 내기를, 그 내기 속에 감춰진 ‘가면’의 핵(核)이 아주 잠깐이지만 드러난 때를.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본 연호정의 눈빛을 기억했다.

‘아니지.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맞아.’

풍벽자는 위기를 느꼈다.

‘제기랄! 다 된 밥에……!’

그는 세작으로서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위협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구대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무림맹에 알을 박을 용도로 키워진 사람이 그였다. 많은 세작들이 경험했던 목숨의 위협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머리로는 냉정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냉정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세작으로 활동했던 수십 년 세월이 한 방에 공중분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현실이, 무거운 중압감이 그의 평정심을 자꾸만 흐트러트렸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끌려다녀선 안 된다.’

적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그럴 때의 탈출구는 총 세 개다.

첫째, 적이 의심을 거두도록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둘째, 의심하는 대로 놔두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큰 사건을 터트려 몸을 빼내는 것.

마지막 셋째, 자신을 의심하는 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는 것.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안정적인 것은 첫 번째 방법이다.

의심을 다른 사람에 씌워 세작을 색출했다고 확신하게 만들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의심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번 의심을 벗어난 사람을 다시 의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세 번째 방법이다. 연호정과 제갈문호 둘 모두를 죽여 버린다면 혼란이 극대화될 것이고, 나아가 자신 또한 안전해질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쓸 수 없다.’

풍벽자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다 내가 죽는다.’

성공적으로 몸을 내뺀다면? 무사히 도망친다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애초에 그는 정파 무림의 세작으로서 키워진 존재다. 그런 세작이 목숨이 아까워 도주한다면, 삼교 측에서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풍벽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 작자는 이럴 때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관리자는 자신처럼 직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극치에 다다른 은신술은 거의 음신에 필적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 역시 자신처럼 평생 관리자로 살아가기 위해 키워진 존재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형당의 뇌옥도, 묵룡부도, 심지어 황궁의 뇌옥이라도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곳이라도 그가 침투하지 못하는 곳은 없다.

덕분에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은신술로 접근하여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전부 보고 사라지곤 했다.

‘이번에도 왔을까?’

안 왔을 수도 있다. 만약 왔으면 그 역시 연호정이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를 알아챘을 테니까.

‘됐어. 지금 없는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결국 그는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첫 번째 방법……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돌리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 대한 연호정의 의심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이다.’

거의 확신하고 있는 수준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지우는 일은 괜한 짓이 될 것이다. 오히려 궁지에 몰렸으니 더 발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별수 없군.”

풍벽자의 눈에서 살의의 섬광이 뿜어졌다.

“연호정과 제갈문호, 둘을 죽이는 수밖에.”

* * *

연호정은 제갈문호에게 가지 않았다.

그 전에 연위와 당관, 그리고 모용군을 불렀다.

“어떻게 되었느냐?”

당관의 물음에 연호정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두 사람이 확실히 의심스럽습니다.”

“으음.”

연위의 얼굴에 심란함이 드리워졌다.

“승현진인과 복호사태라.”

그들이 모여 정보를 취합했을 때, 가장 의심스러웠던 두 사람이 바로 무당파의 승현진인과 아미파의 복호사태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면?”

“승현진인은 확실히 의심스럽습니다. 삼교의 세작이 구파의 무공을 익혔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숨길 줄 알며, 그 누구보다도 장문인의 역할을 확실히 수행한다고 가정했을 때, 승현진인만큼 의심스러운 사람은 달리 없을 겁니다.”

그는 승현진인의 진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도인답기에 더욱 그를 의심했다.

“승현진인이 적의 세작이라면…… 정말이지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다.”

구파 중 어디라도 세작이 있다면 분명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무당파는 달랐다.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라 칭해지는 무당파의 장문진인이 적의 세작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삼교에게 한계가 없다는 뜻이 된다. 다른 문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무당파의 무공은 소림과 함께 품성을 중요시했다.

닳고 닳은 도문의 어른조차 속여 넘길 정도라면, 이는 보통 무서운 인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당파에는 당대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적의 고수가 있었다.

검선 탁무자.

지닌바 무공은 물론, 깨달음으로는 소림의 권신보다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 반선(半仙)이 그였다.

그런 탁무자마저 속았다? 그렇다면 누구도 그를 잡을 수 없다. 그 정도 정신력이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당파의 장문인을 연기할 것이다.

‘솔직히 의심할 만한 사항이 많다. 승현진인의 과거를 보자면,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냉정하고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어. 어떤 의미로는, 반드시 장문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보다 독해 보일 정도였다.’

연호정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의심할 구석은 많지만, 직감의 영역에서 논하자면 그는 승현진인에게서 세작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하면, 네가 생각하는 남은 한 사람은 누구냐? 복호사태가 아니었느냐?”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만나기 전에는 복호사태를 의심했지요. 우리 모두가 분석한 정보에 따르면, 분명 복호사태는 지나치게 강조된 정의감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장문인이 되기까지의 행동을 보면, 승현진인 못지않게 욕심이 있었어요.”

정의감이 넘친다고 신분 상승의 욕심이 없을 이유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어 할 수 있고, 최고의 자리에서 남들을 거느려 보는 꿈을 꾸니까.

“하지만 저는, 복호사태가 아닌 풍벽자가 더 의심스러웠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가늘어졌다.

“청성이?”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느꼈는가?”

“글쎄요……. 사실, 냉정하게 보자면 그를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조각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각되었다?”

“예. 그 역할을 위해 완벽하게 조각된 것 같단 느낌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승현진인이나 복호사태보다 훨씬 더 세작에 가깝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연위와 당관, 모용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직감이 뛰어나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보지 못했으니,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직감일 뿐입니다. 물증이 없는 심증은 반쪽만도 못하지요.”

“음.”

“물증이랄 건 없지만, 패율 선배에게 일부러 청성의 검사와 대무를 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이런저런 걸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런데?”

“숙소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발생한 연후, 풍벽자의 내기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기 속에서, 청성의 무공 외에 다른 것을 연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죄다 느낌이니, 직감이니 하는 말의 연속이었다. 연호정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말에 별 신빙성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가주는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들 정도의 위치가 되면, 논리보다도 감각을 따를 때가 더 많았다. 심지어 연호정은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이기기 힘든 진짜 강자였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만간 세작이 저나 군사님, 혹은 둘 모두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겁니다.”

“……!”

“세작이 선택할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 의심의 씨앗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도 있지만요.”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놈이 무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세작을 압박하면 살해 시도가 더 빨라지겠지요. 우리의 첫 번째 승부처는 바로 거기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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