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폭풍우가 몰아치다 (1)
“차 맛이 어떤가?”
“아주 좋습니다.”
연호정의 말에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온다고 나름 신경을 썼네. 무당산 산기슭에서 재배하는 찻잎이지.”
“그렇습니까?”
“전대 도인께서 심심풀이로 찻잎을 재배하셨다네. 그 찻잎이 바로 이걸세. 심신을 안정시키고 피로를 해소하는 데에 좋지. 나름대로 약초라면 약초인데, 향과 맛도 제법 좋아서 귀빈에게 대접할 때나 잘 말린 놈을 꺼낸다네.”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사실 귀빈을 나누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사람에게 위계는 있어도 귀천은 없는 법이니까.”
“…….”
“다만, 자네에게 이 차를 맛보여 주고 싶었어. 그것뿐일세.”
아버지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연호정은 참으로 승현진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자네, 엄청나게 성장했군.”
승현진인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하는 말입니다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 부족하다 느낀다면, 그저 정진하면 될 뿐이야.”
역시 승현진인의 반응은 남들과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호정이 멀었다고 하면, 그 정도도 충분히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림의 상식으로 볼 때 타당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승현진인은 부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딱히 현기 있는 말도 아니었지만, 연호정은 승현진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편안하군.’
처음 승현진인과 대면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승현진인은 잔뜩 흥분한 채로 기별도 없이 자신을 찾아왔었다. 이유는 바로 옥청의 무공 때문이었다.
승현진인은 흥분했지만, 연호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연호정은 승현진인의 담백한 인정과 놀라운 안목에 호감을 느꼈다.
그렇다. 승현진인에게는 그러한 힘이 있었다.
천생 도인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인간임을 버리지 않은 도덕적인 도인의 모습은 연호정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옥청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승현진인과 비슷하게 변할는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옥청이 살검(殺劍)을 쥐고도 순후한 천품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도인들의 가르침과 환경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 대로 놔둔다…… 다만 엇나가지만 않게 다독일 뿐. 무당의 분위기는 그러하구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씁쓸하고, 조금은 부러움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차별 없는 문풍이라.’
회귀 후, 연호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질감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 대상에는 아버지나 동생, 묵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이방인이다.’
가족도 있고 전우도 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관계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아는 사람들 품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된다고?
틀렸다.
이미 수십 년의 생을 살아 본 연호정에게, 과거의 생을 잊고 이 세상의 품에 안겨 살아가라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한 주문이다.
물론 누구도 그런 주문을 하지 않을 것이며, 연호정 스스로도 그러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적이 자신의 무공에 감탄할수록, 누군가가 자신의 성장을 보며 경악할수록 연호정은 더더욱 현실과 유리된다.
회귀 후의 인생에 익숙해지는 것과 그러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연호정은 분명,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이방인이었다.
“도인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승현진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번뇌가 많아 보이는구먼.”
“그리 보이십니까?”
“허허, 그간 자네가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지 않네. 사람은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쉴 때는 또 쉬어 줘야 하는 법일세.”
“휴식은 필요할 때마다 잘 취하고 있습니다.”
“몸만 쉬면 무얼 하나? 정신이 쉬질 못하는데.”
“…….”
“휴식의 휴(休)라는 글자를 보게. 나무(木)에 사람(人)이 기댄 모양새지? 휴식이란 그런 것이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무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 그것이 진짜 휴식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무가 너무 많아서, 어디에 기대어 쉬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많아서겠지.”
연호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승현진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묵룡부에 파견 가는 이번 작전 말일세.”
“예.”
“아직 세부 작전은 모르겠네만, 필경 어려운 일이겠지.”
“어렵지 않은 작전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세작으로 파견 갔던 이전보다는 심적 여유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때처럼 들킬까 조마조마하진 않을 테니까요.”
“대신 묵룡부 중진들의 견제를 계속 받겠지?”
확실히 평범한 도인은 아니다. 무당산은 손에 꼽히는 도가의 성지(聖地)지만, 그러한 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세상사에 통달하기도 해야 한다.
“그 정도야 어렵다고 할 수 없지요.”
“허허, 자네답네.”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승현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장으로 가 볼까?”
“예?”
“자네 무공을 좀 보고 싶구먼.”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사상이나 무공을 점검한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진인께서 먼저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하니 내가 자네 무공이 의심스러워 손을 섞자 하겠는가?”
승현진인이 뒷짐을 지며 먼저 나갔다.
“따라오게나.”
잠시 후, 두 사람이 연무장 중앙에 섰다.
승현진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의 일 처리에 아무 불만이 없는 사람일세.”
“그리 말씀하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일은 제가 벌이는 게 아닙니다. 저도 군사님의 명을 받는 처지 아니겠습니까.”
“형식상으로는 그렇지. 그러나 자네의 의견과 생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다는 걸 아네.”
“군사님께서 마음이 넓으신 편입니다.”
“헛똑똑이도 아니라네. 제아무리 친인의 의견이라도 마뜩잖으면 무시할 사람이 제갈 군사야. 실로 군사다운 군사라 할 수 있네.”
역시 날카롭군.
승현진인이 한 발을 뒤로 빼며 오른손을 중단으로 올렸다.
“자네가 그간 해 왔던 일,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네. 자네가 처리한 일들을 목록화하면, 지금도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겠지.”
“…….”
“난 그런 사람을 평가할 자격이 없네. 다만,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가만히 승현진인을 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기수식을 펼쳤다.
무당태극권, 승현진인의 깨달음이 녹아 있는 권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변모시킨 독특한 권형(拳形)이었다.
“오게.”
“갑니다.”
파아아악!
연호정은 힘차게 움직였다.
태극권 특유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조금도 없었다. 어느새 그가 연성한 태극권은 승현진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만의 색채로 가득한 무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파바바박!
그러면서도 휘두르는 손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여유롭고 부드럽다기보다는, 서늘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승현진인의 두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파라라라라락!
두 사람의 소맷자락이 연신 부딪쳤다.
실제로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거나, 상대의 요혈을 노리는 방식의 대련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승현진인의 자세와 형을 무너트리려 했고, 승현진인은 연호정의 수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흘려 내 빗나가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결이었다. 연호정의 공격은 점점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고, 승현진인의 방어는 점점 더 부드럽고 풍성해졌다.
투웅! 투우웅!
공기가 묵직하게 울렸다.
두 사람의 권법 대련은 살벌하면서도 보기가 좋았다. 음과 양, 공과 수가 만나 태극을 그린다. 한 사람의 손에서 완성한 태극이 아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써 완성된 합무(合武)가 거기에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우웅.
두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승현진인이 웃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정말 날카로운 권법이었네.”
“진인의 권법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자네에게 전수한 태극권이 그런 식으로 변모했을 줄은 몰랐네. 마치 와류(渦流)처럼 격렬하군. 뭣도 모르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간 온몸의 뼈마디가 남아나질 않겠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비해서 많이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그전에는 태극권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흉포하고 빨랐지요.”
“자네의 마음이 예전보다는 더 여유롭고 단단해졌다는 뜻이겠지.”
승현진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줄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거늘, 딱히 그럴 만한 게 없구먼. 조금 위태롭기는 하나…… 자네라면 충분히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자네 덕에 개안(開眼)을 했으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승현진인의 저 담백하고 소박한 인품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그를 도인으로서 존경하는 이유였다.
“그럼,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뉘라서 자네의 파견을 반대하겠나. 그저 몸 성히 다녀오기를 바랄 뿐이라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장문인!”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무당의 도사였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도사는 말을 이으려다가 연호정을 보며 깜짝 놀랐다.
연호정은 도사를 모른 척했다.
다시 승현진인에게 눈을 돌린 도사가 전음을 보냈다.
승현진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뭐, 뭐라? 등 봉공이?!”
“……그렇습니다.”
멍하니 도사를 보던 승현진인이 연호정을 보았다.
어느새 연호정은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보게, 연 대수.”
“진인께서는…….”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모른 척해 주십시오.”
“……!!”
“무림맹에 격변이 일어날 겁니다. 각오도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지켜봐 주십시오.”
승현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히 등천교가 형당에 끌려갔다는 말만 들은 게 아니라, 그 전후 사정도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진인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무당파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한 건물 귀퉁이를 돌았다.
스르륵.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당관이 다가왔다.
“싸가지.”
“오셨습니까.”
“어땠냐?”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대단하시더군요. 구파일방의 장문인 중 능히 수위를 다툴 만한 무공입니다. 무공의 성질은 다르지만, 아마 공공대사님과도 박빙을 이룰 듯합니다. 지금의 저로도 쉽지가 않아요.”
“그걸 물은 게 아니잖느냐.”
당관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양반에게서 이상한 걸 느꼈느냐?”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화에서도, 무공에서도요. 오히려 누구보다도 무당다운 무공을 연성했다고 생각합니다.”
당관은 말없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피 냄새 그득한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사도(邪道)로 빠지지 말라며 무당 원무신의 깨달음을 전수해 주던 승현진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지혜가 깊은, 그러면서도 강단 넘치는 무당파 장문진인의 얼굴이.
“……그래서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다시 고개를 내린 연호정의 눈빛은 전투에 나설 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승현진인에 대한 감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보를 분석했던 사람들이 꼽은 의심이 가는 두 사람.
그중 한 명은 승현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