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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89화 (488/963)

489화. 조각 (7)

“아버지!”

“그래, 들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문서를 살펴보는 제갈문호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정말 괜찮은 거냐고요.”

“괜찮다.”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문호가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지. 사실 괜찮지는 않지. 괜찮을 수가 없다. 무림맹의 봉공을 뇌옥에 가두는 일이야. 눈앞의 불길 하나 잡자고 훗날 홍수가 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요!”

“문제는, 그 작은 불길 하나로 무림맹이 통째로 연소될 수도 있다는 거다.”

제갈아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세작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만약 잡지 못하면, 그 세작이 빼돌리는 정보로 인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낫지 않겠어요? 공동파는 강해요. 무력만이 아니라 그 영향력도 막강하죠. 특히 감숙성에서 공동파는…….”

“옥문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파지. 그 말인즉, 북부의 상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요! 만약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알려지지 않게 막아야지. 공동파 역시 쉬쉬하려 할 것이다. 그네들도 공동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넋 놓고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들어 제갈아연을 보았다.

“아연아.”

“……네.”

“애비가 앉은 이 자리는 말이다, 찬사보다는 경멸을 받는 자리다. 이 애비가 머리를 잘 써서 무림맹에 큰 도움이 되어도, 그 공(功)은 차기 맹주나 봉공들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야.”

“…….”

“하지만 내가 못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럼 능력 없는 총군사 때문에 무림맹이 그 지경이 된 거라고 싸잡아 욕할 것이다. 총군사란 그런 자리다. 잘해도 본전, 못하면 누구보다도 욕을 먹는 고약한 자리지.”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도 내가 봉공들의 추천을 거부하지 않은 까닭은, 나 역시 세상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원해서였다. 내 능력을 떠나, 우리 가문이 주는 영향력과 내 조촐한 지혜가 천하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자리를 수락한 게야.”

“알고 있어요.”

“나는 말이다, 이 자리를 수락하면서 모든 것을 뒤로했다. 네 동생에게 벌써 가주 수업을 받게 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나는 제갈세가의 가주이기 전에 무림맹의 총군사이기 때문이다.”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얼굴 가득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강단 넘치는 사내의 굴강함으로 바뀌었다.

“총군사로서 나는 모든 오욕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다. 때로는 과격하고, 가끔은 치졸해 보일지라도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단 말이다.”

“…….”

“물론, 선을 넘진 않을 것이다.”

선을 넘지 않겠다.

그 말은,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선을 넘겠다는 것보다도 더 살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세작을 잡지 못하면 무림맹의 정보가 적측에 전달된다. 무림맹은 백도 정파의 연합이지만, 동시에 중원 전역의 정보를 다룬다. 말하자면 놈들은 맹에 심어 놓은 세작 하나로 천하의 모든 정보를 손쉽게 얻어 가고 있다는 거다.”

“…….”

“차후 놈들이 이 중원 땅에 무슨 짓을 할지를 생각하면, 공동파가 아니라 소림사, 공공대사를 뇌옥에 집어넣어서라도 세작을 색출해 내고 싶구나.”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 거죠?”

“괜찮지 않다. 그래도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나 호정이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들도 충분히 고려했을 테죠. 그런데도 굳이 이 방법을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고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자랑스러웠다. 똑똑한 사람은 이해심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딸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함이 컸다. 과거의 일이지만, 가문이 힘들다고 남궁세가 측에서 건의한 정략혼을 거부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딸이 큰 피해를 볼 뻔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운 딸이다.

그런 딸이기에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은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딸에게는 알려 줘도 될 것 같았다.

자신과 연호정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단순히 세작 때문만은 아니다.”

“네?”

“그저 세작을 잡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더 들이면 될 일이었다. 며칠 안에 잡겠다, 함정을 파겠다, 등의 작전을 무리하게 세울 필요는 없지.”

적어도 세작만 잡는다면.

제갈아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그 부분이 저도 의아했어요. 물론 세작이야 하루빨리 잡는 게 좋지만,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다고 선포한 이상 세작 역시 당분간은 허튼짓을 벌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죠.”

“역시 거기까지 내다 보았구나.”

“네.”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세작 색출 외에 어떤 목적으로 이리 급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으냐?”

“…….”

제갈아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사실 그녀도 여기까지는 추측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세작을 잡는 것 외에 뭔가가 더 있다고. 하루라도 빨리 세작을 잡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들어 보니, 세작 색출과는 별개로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의 지혜라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문제다. 다만 이 일을 나와 연 대수가 하고 있기에,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았을 뿐이야.”

“네?”

“네가 보는 애비는 어지간하면 과격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제갈아연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갈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건물 너머, 크고 널찍한 삼 층 누각이 보였다. 그 누각을 중심으로 거대한 담벼락이 세워져 있었는데, 고풍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바로 무림맹의 형당이었다.

“지금의 무림맹은 위태롭다. 겉으론 화려하고 막강해 보이지만, 정작 속은 텅 비어 있지. 자칫 잘못하면 모닥불의 불씨 하나만 잘못 튀어도 활활 타 버릴 정도로.”

“……?!”

“시시각각 힘은 커지고 있는데, 정작 내실은 부실하다. 그 이유는 바로 봉공들 때문이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아버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오직 연호정만 알고 있는 살벌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흑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황궁도 아니며, 이미 스러지고 없어진 혈교나 마교도 아니지. 우리는 귀를 열 줄 알고, 서로를 존중할 줄 알며,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당연한 것일수록 어렵다는 사실을.

학당의 훈장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세상에 거짓말 한번 안 해 본 사람은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기본’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판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무림맹은 거대한 무력 조직이야. 힘이 향하는 곳에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떤 식으로 해결되느냐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미래가 결정된다.”

“…….”

“봉공들이 서로를 존중한다며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 적들은 시시각각 힘을 불리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다간 무림맹은 거대해진 자신의 힘을 어디로 휘둘러야 할지 모르는 멍청한 괴물이 되어 버릴 거다.”

“하지만…… 존중이 바탕이 되기에 우리가 흑도와 다른 거잖아요.”

“그렇다. 이상을 바라고 꿈꾸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설령 이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지. 그러나…….”

제갈문호가 제갈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갈아연은 문득, 아버지의 눈에서 지독한 피로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게 봐야 한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제갈문호 정도 되는 사람이 그것을 왜 몰랐겠는가. 지금 그의 말은, 머리로만 알았던 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체감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이상을 꿈꿔야 한다. 이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내디뎌야 하지. 그러나 현실을 무시해선 안 돼. 현실을 무시한 미래지향적 사고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바로 지금의 무림맹처럼.”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무림맹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맹주가 지배하는 통치 체제가 필요하다.”

“……!”

“물론 그 맹주는 능력이 뛰어나야만 하겠지. 그리고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들보다 훨씬 분명한 도덕적 이상향을 품고 있어야 한다.”

“…….”

“나아가, 현실의 도덕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결단력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도덕과 현실의 선을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을 배제하지 않는 사람이 맹주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맹주를, 봉공들은 따라야만 한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맹주가…….”

“없다, 지금은.”

제갈문호는 단언하듯 말했다.

“현재로서는 마땅한 인재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인재가 없다고 무림맹의 패망을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군사로서, 그러한 맹주가 취임하기 전까지 확실한 환경을 만들어 둬야 할 의무가 있다.”

“확실한 환경이라면?”

“분란을 일으키는 봉공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갈아연은 깜짝 놀랐다.

“제, 제거라니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단어 선택이 다소 과격했구나. 제거라는 말은, 정말로 봉공들을 죽이거나 뇌옥에 가둔다는 것이 아니다. 이 무림맹 정치에 참여할 수 없도록, 정치적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을 뜻한다.”

“……!!”

“누가 맹주가 되어도, 최소한 무림맹이 그 목적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약간의 전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맹을 좀먹는 족속들을 모조리 파내 버려야 한다.”

“그, 그럼 지금 공동파 장문인을 형당에 보낸 것도?!”

“그래, 그 계획의 일환이다. 연 대수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계획이었지.”

제갈문호의 안광이 불타올랐다.

“무림맹은 바뀌어야 한다. 세작을 잡고, 분란을 일으키는 봉공들을 뽑아내고, 오로지 평화와 질서를 위해 뜻을 모으는 ‘진짜’들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무림맹에는 그러한 조치가 필요해.”

언젠가 모용군은 제갈문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무림맹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모용군은 그 이유로 제갈문호의 이러한 성향을 꼽았다.

제갈문호는, 설령 누가 맹주가 되더라도 무림맹이 목적에 맞게 기능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은 맹주가 없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문호는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암담한 현실이, 답답한 형국이 그를 모용군이 보았던 그 미지의 군사로서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모든 오명은 내가 뒤집어쓸 것이다. 공공대사님께도, 연 대수에게도 이 책임을 나누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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