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조각 (5)
“제법 깜찍했다.”
연위의 말에 연호정은 그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애비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군사에게 따로 알렸더냐?”
“그렇습니다.”
“왜? 이 애비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분명 허락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만?”
“계속 마음을 쓰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연위는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이 조금씩 어색해졌다.
어찌 되었든 묵룡부로 파견 가겠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아버지가 아닌 제갈문호에게 먼저 알렸다. 그리고 그것을 비밀에 부쳤으며, 회의 전 제갈문호가 알린 것이 불과 어제였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커험.”
“…….”
“……으음.”
연호정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한참이나 아들의 얼굴을 보던 연위가 피식 웃었다.
“섭섭하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아버지의 반응이 담백하지 않은가. 죄송하다고 말하는 연호정의 얼굴은 그 말과는 달리 꽤 밝았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애비를 신경 써 준 것을 안다. 그리고 공적으로 봤을 때, 너의 행위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라면 봉공이 아닌 군사께 먼저 알리는 것이 응당 합당할 것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군사께서 중간에서 마음고생을 제법 하신 듯하다. 너도 이해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랬겠지요.”
“그 부분, 분명히 사과를 드리거라. 근래 날이 서 있지만, 군사만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그리도 순한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안다면 되었다.”
연위는 이 문제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실제로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섭섭함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섭섭함일 뿐이었다. 제아무리 자식이라도 공사가 분명하거늘, 이런 일로 서운하다며 타박해서는 안 된다.
“그나저나, 정말 그것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묵룡부주가 너를 제법 총애한다고?”
“분명 그렇습니다. 꽤 부담스럽지요.”
“하긴.”
가족으로서가 아닌 무사로서, 연호정은 분명 어떤 수장이라도 탐을 낼 만한 인재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특히 지략과 안목이 뛰어났다. 어중간한 수장이라면 경계하겠지만, 능력이 출중하고 대범한 수장이라면 기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양천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위험하진 않겠느냐?”
“강호의 일입니다.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지요. 다만 예전에 세작 침투 건을 생각하면, 그때보다 훨씬 자유롭고 여유로울 겁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이 애비도 마음이 놓인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이건 내가 허락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다. 군사께서도 말씀하셨잖느냐? 봉공 한 분, 한 분께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뭐, 그렇게 되긴 했습니다만.”
“자신 있느냐?”
앞뒤 다 뗀 말이지만, 연호정은 아버지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집중해 봐야겠지요.”
제갈문호가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는 하나.
연호정더러 직접 봉공들을 보고 확인해 보라는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비록 연호정이 전생했다는 것을 모른다지만, 그의 능력과 안목이 강호 정점에 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눈과 직감을 믿는 것이다. 확신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상한 부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당가주가 말하기를, 이번 세작은 무공보다 정신력이 더 무서운 자라고 하였다.”
“그럴 겁니다. 구파든 육가든, 수장으로서 한 단체를 이끌면서 세작업을 병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요. 무공 특성도 그렇고, 조직의 눈도 그렇고요.”
“잘 알고 있구나.”
“그런 쪽으로는 경험이 많으니까요.”
연위는 새삼 자신의 아들이 수십 년의 생을 살다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이왕 이렇게 판이 깔린 거, 제대로 보고 오너라.”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어디부터 가느냐? 정말 공동부터 가 보려느냐?”
“물론입니다. 등천교 장문인은 아주 흥미진진한 사람이거든요. 여러모로요.”
스르릉.
흑백쌍룡부를 꺼내 날을 살펴본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 * *
연호정이 공동파의 거처에 도달한 건 해가 중천에 뜬 정오였다.
한여름의 햇볕도 이제는 한풀 기세가 꺾인 느낌이었다. 이 더위가 한 달은 더 가겠지만, 이제 슬슬 여름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거처의 대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무림맹 의정군의 대수, 연호정이라 하오.”
잠시의 침묵.
그리고.
끼이이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마치 귀곡성처럼 들렸다. 뙤약볕에 달아오른 지열도 그 순간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듯했다.
문을 연 사람은 연호정보다 대여섯 살이 많아 보이는 장년의 검사였다. 등에 사선으로 매인 검이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장년인이 말했다.
“안으로 드시오.”
꽤 거만한 말투였다.
성격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그런 느낌을 준다. 혹독한 공동산에서 살아온 복마(伏魔)의 기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호정은 말없이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은 연무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거처가 다 비슷비슷하다지만, 공동파의 거처는 유독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예서 잠시 기다리시오. 장문인께 말씀을 드리러 가겠소.”
“그러시오.”
장년인은 연무장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계단으로 이어진 건물 바로 앞에서, 장년인이 무릎을 꿇었다.
“장문인. 의정군의 대수가 왔습니다.”
그러자 등천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식사 중이다. 기다리라 전하라.”
“예.”
장년인이 다시 연호정에게 다가와 말했다.
“장문인께서 오찬 중이시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시길 바라오.”
연호정이 힐끔 건물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뭘 먹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기감을 증폭하니 쩝쩝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께 전해 주시오. 허락한 걸로 알겠다고.”
“……?”
“그럼.”
연호정은 그대로 몸을 돌려 대문을 열었다.
장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다리시오.”
곧장 나가려던 연호정이 장년인을 보았다.
“하실 말이라도?”
“분명 장문인께서는 기다리라 말씀하셨소.”
“그래서 나는 허락한 걸로 알겠다고 말했소만.”
“…….”
“수고하시오.”
그때였다.
핑! 툭!
한 자루 단검이 대문에 박혔다. 연호정의 머리에서 한 자가 떨어진 거리였다.
“들어오시오. 그리고 장문인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
순간 연호정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억!
“컥!”
붕 떠오른 장년인이 연무장 한가운데에 털썩 쓰러졌다. 연호정의 주먹이 복부를 올려 친 것이다.
“쿨럭! 우웨에엑!”
그야말로 살벌한 일격이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힘을 빼지도 않았다.
장년인, 등천교의 제자 사인호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무림맹 유군 부대 수장에게 함부로 칼을 던져?”
“으으윽! 쿨럭!”
“형당으로 갈 것이다. 얌전히 따라오라.”
형당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분노에 찬 사인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연신 때리는 핏물에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때였다.
콰앙!
문이 박살 나며 등천교가 등장했다.
화아아아악!
방위를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가는 막강한 기파.
초절정 고수의 위용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그였다. 공동산 최강의 신공, 천뢰복마신공(天雷伏魔神功)의 기파가 무섭게 꿈틀대고 있었다.
등천교가 버럭 소리쳤다.
“네놈이 미친 것이냐!!”
“미친 건 이놈입니다.”
“뭐라?!”
연호정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감숙 공동산은 험산이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기질이 거칠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무림맹 안에서까지 그래선 안 되지요. 감히 유군 부대 수장에게 칼을 던져 위협하다니요?”
등천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찬을 즐기고 있었지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연호정이 문을 두들기기도 전에 그가 왔음을 기도로 읽고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연호정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런 직책이 없다지만 그 역시 무림맹 소속의 검사. 이 일은 형당에서 처리한 후,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뇌옥에 수감될 것입니다.”
뇌옥이란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구파의 일익, 감숙 공동산의 제자를 기습으로 거꾸러트리곤 형당이니 뇌옥이니 들먹이고 있었다.
등천교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구나.”
“대수라고 불러 주십시오, 봉공님.”
“어디서 감히 말대꾸냐!”
“자꾸 그렇게 나오시면, 나도 말이 험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소?”
상대가 강수로 나오면 이쪽은 초강수로 응수한다.
근래 들어 유해지고 사색도 많아졌지만, 연호정 특유의 거친 성격은 누구 못지않았다.
등천교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정말이지, 한낱 후기지수에게 이따위 모욕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놈!”
콰드드드드득!
등천교의 발에서 시작한 금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연무장까지 닿았다.
무시무시한 내공력이었다. 딱히 진각을 밟은 것도 아닌데, 내공 발출만으로 땅이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네놈이 감히 공동을 능멸해?!”
“적반하장이 따로 없군. 어쨌든 장문인께선 거기서 열을 내고 계시오. 저 작자는 내가 형당으로 데려갈 테니.”
“이……!”
“이놈에게 암살을 사주한 자도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겠소? 아, 방해는 마시오. 만약 방해하면, 의정군의 대수를 암살하라 사주한 사람이 공동파의 장문인인 걸로 알겠소이다.”
“뭐라? 암살!”
연호정은 대놓고 등천교를 자극했다.
과연 그 살벌한 자극은 제대로 통했다. 등천교의 얼굴은 귀신도 달아날 만큼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등천교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
콰아아앙!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신법의 유려함이 일품이었다.
공동산의 신법, 행운유수(行雲流水)였다. 극도로 화가 났음에도 극상의 요결대로 몸이 움직인다. 과연 구대문파의 일익, 감숙 최강의 세력인 공동파의 장문인다웠다.
연호정의 눈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했다.
콰아아앙!
‘……?!’
돌진한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간 등천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드르르르륵! 콰드득!
연무장 끝까지 밀려난 그의 두 발이 어느새 복숭아뼈 밑까지 땅을 파고들었다.
치이이이익!
등천교의 손에서 허연 연기가 일었다. 연호정의 권법을 막은 손이었다.
등천교의 눈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그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세를 풀었다. 등천교의 공격 순간을 읽고 백호공을 구사한 것이다.
“역시 그런 거요?”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당신, 삼교에서 보낸 세작이오? 자꾸 날 죽이려 드는 걸 보니 수상한데?”
“이, 이놈이?!”
“이거 안 되겠군. 살펴보는 건 내가 해야겠소이다.”
스르릉.
새카만 손도끼가 오른손에 잡힌다.
이내 도끼에 주작화기가 실리며 활화산 같은 기파가 더해졌다.
“당신, 세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