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조각 (4)
“뭐, 뭐라?!”
의외로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승현진인이었다.
제갈문호가 승현진인을 보며 말했다.
“당혹스러우실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군사. 그것이 참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원했고, 저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간 그리 고생한 대수에게 또 무엇을 시킨단 말이오? 게다가 묵룡부라니? 대체 무슨 이유로 대수를 그곳에 보낸단 말이오?”
“싸우거나 반응을 보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하면?”
“오히려 본맹과 묵룡부 사이의 교각 역할을 위해서 보낼까 합니다.”
“……교각?”
“그렇습니다. 한시적으로, 연호정 대수를 묵룡부주의 곁으로 보내는 것이 어떤가 싶습니다.”
쾅!
등천교가 탁자를 내리쳤다.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연 대수를 묵룡부에 파견 보낼까 합니다.”
“파견?”
“그렇습니다.”
“파견이라 했소? 저 흑도 연맹인 묵룡부로, 침투도 아니고 파견이라고?”
“그렇습니다.”
“묵룡부 수뇌부의 목을 따기 위함도 아니고, 놈들을 교란시키는 목적도 아니고, 본맹과 놈들 사이의 교각을 만들기 위해 파견을 보낸단 말이오?”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등천교가 버럭 소리쳤다.
“당신 제정신인가!”
제갈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라실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반응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 이 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막 나가는군! 묵룡부가 어떤 조직인지 군사는 정녕 모른단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흑도 최강의 고수 투왕 양천이 잔망스럽게 흩어져 있던 흑도를 통합한 연맹체이지요.”
“그게 전부가 아니잖소!”
“그렇습니다. 위험한 조직이지요. 양천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위상과 절대적인 무력에 반해 모여든 고수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군사가 직접 묵룡부를 견제해야 한다고 했었지!”
“그랬었지요. 심지어 연 대수와 몇몇 고수들을 특작원으로 하여 세작으로 침투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묵룡부는 절대 우리와 양립할 수 없는 조직이오! 그런 조직에 세작을 심는 것도 아니고 파견을 보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갈문호는 굳이 등천교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 역시 등 봉공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봉공들 대다수가 불편한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건 지혜나 안목을 따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도와 흑도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제아무리 그들이 과거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백도 연맹인 무림맹과 흑도 연맹인 묵룡부가 서로 손을 잡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기엔 그간의 역사가 지나치게 살벌했다.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상대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백도의 인사라면 다들 그리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흑도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백도 무림인들을 음험하고 의리도 모르는 샌님들이라며 욕하기 바빴다.
그들은 그렇게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어도, 그 두뇌를 활용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복호사태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군사께서 생각이 있기야 할 겁니다.”
“생각 없이 회의를 소집해서는 안 되지요. 봉공분들 모두가 바쁘시단 걸 압니다.”
“하지만, 군사께서 입에 올리신 단어가 가슴에 턱 하고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파견, 그리고 교각이라면…… 마치 본맹과 묵룡부가 더 이상 적이 아닌 동맹이라도 된 것처럼 들립니다.”
용화진인이 날 선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절대 아니 될 말이오. 흑도 놈들과 동맹이라니? 군사께서도 아실 것이오. 의정군의 총수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묵룡부로 파견하다니? 세상 어떤 조직이 군단(軍團)급 인사를 적지로 파견한단 말이오?”
휘하 군병의 수는 오백이 조금 넘는 정도지만, 실제 연호정의 지위는 군단장(軍團長)에 필적했다.
말하자면 특수 부대를 거느린 군대의 사령관급이란 말이다. 유군 부대 의정군은 그 정도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용화진인의 말에 봉공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던졌다.
“틀린 말은 아니외다.”
“묵룡부와의 친분은 조심히 다뤄야 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놈들은 분명 뒤통수를 칠 거요!”
“군사의 능력은 잘 알고 있소만…… 다소 무리한 판단은 아닐는지 걱정이 되오.”
제갈문호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가 공공대사를 보며 물었다.
“방장 대사께서는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공공대사는 심유한 눈으로 제갈문호를 바라보았다.
속을 읽기 어려운 눈빛. 그러나 한없이 맑은 그 눈은 확실히 다른 봉공들과는 달랐다.
“군사의 생각을 알고 싶을 뿐이오.”
“알겠습니다. 하면, 말씀드리지요.”
제갈문호가 용화진인을 보며 물었다.
“묵룡부와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리 말씀하셨지요?”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소이까?”
“그렇습니다.”
“뭐, 뭐라?!”
“저희는 묵룡부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아니, 손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 당신!”
“저는 오히려, 봉공분들이 왜 이리 경악하는지가 의아할 따름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전에도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때에 따라서 묵룡부와 한시적인 우호 조약을 맺어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분명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봉공 중 절반 이상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백도와 흑도의 동맹이라니?
수백 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전쟁을 거듭해 온 사이다. 물론 시대의 격동을 맞이하여 몇 차례 손을 잡은 적도 있지만, 그 동맹 중 대다수가 흑도 측의 계략으로 깨져 버렸다.
당연히 흑도를 믿을 수 없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봉공 모두가 젊을 적 강호행을 하며 흑도의 악인들과 싸워 온 사람들이었다.
거부감이 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합니다. 봉공분들의 마음이 심란하다는 걸.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비슷한 마음입니다. 하나…….”
제갈문호의 얼굴은 가면이라도 쓴 듯 딱딱했다.
“체면, 훗날의 위협, 분노, 혐오 등의 이유로 세상이 불에 타는 걸 좌시한다면, 저는 그것이야말로 협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이유인즉, 우리야 명예롭게 죽어도 상관없지만, 힘없는 민초들은 그래선 안 되니까요.”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언변이었다. 다혈질적인 등천교도, 목소리를 높이던 용화진인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태를 바르게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무림사(武林史)에 유례가 없는 집단들과 싸워야 합니다. 당장 그 집단 중 하나만 발호해도, 자칫하다간 무림맹이 괴멸될 수도 있는 판국이지요. 하물며 그런 집단이 셋입니다.”
“…….”
“묵룡부와의 한시적 동맹은 필연입니다.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아니, 그들의 목숨을 건 의지를 빌려도 쉽지 않은 싸움이지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당장 불에 타 사라질 힘없는 자들의 목숨을 생각해 주십시오. 껄끄럽고 화가 나시겠지만, 그래도 힘을 합쳐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적막이 일었다.
그간 조용했던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인이 물었다.
“군사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소. 다만, 짚고 가야 할 건 분명히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양천은 위험한 자요. 그자가 흑도 출신 중에서도 나름대로 호한(好漢)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으나, 결국 목이 보이면 살점을 물어뜯는 맹수임은 변함이 없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시적 우호 조약은 찬성하오. 적어도 나는 그렇소. 하나 투왕 양천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없다면, 우호 조약은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이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옳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즉, 내가 보기에는…….”
“그래서 연 대수를 파견 보내야 합니다.”
남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오?”
“투왕 양천, 묵룡부주가 연호정 대수를 좋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황당함 가득한 봉공들의 얼굴을 보며, 제갈문호는 비로소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간 자신과 연호정, 연위만 알고 있던 여러 비밀 중 하나를 풀 때가 왔음을.
“기실, 묵룡부주는 연호정 대수를 욕심내고 있습니다.”
제갈문호는 그간 연호정과 양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물론 봉공들의 감정은 절대 자극하지 않았다. 그간 숨겨 왔던 얘기지만, 또한 지극히 사소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걸 대단한 비밀이라도 된 듯 말해 봤자 봉공들의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즉.”
복호사태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세작으로 침투했을 때부터 양 부주는 연 대수를 총애했으며, 다시 만났을 때도 비무를 하는 등 수하로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봉공분들도 아시다시피 양 부주의 안목은 누구 못지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연 대수 정도의 인재를 탐내는 것은, 강호의 수장들에게 있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등천교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이니 오죽하겠소.”
“맞습니다.”
“군사께서는 이런 생각은 안 하시오? 그만한 인재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사실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미인은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아오. 천재는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지.”
등천교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연 대수가 정말 양 부주에게 넘어가 버리면, 그땐 어찌할 거냔 말이외다.”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야말로 민감하기 짝이 없는 말을 잘도 하는 등천교였다. 그간 표정 변화 없이 대화를 경청하던 연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질 정도였다.
승현진인이 말했다.
“등 봉공께서는 말씀이 심하셨소. 연호정 대수의 심성은 그 무공만큼이나 순후하고 깨끗하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아니겠소?”
“등 봉공.”
그때였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참에 시험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이오?”
“여기 계신 봉공분들 모두에게, 연 대수를 시간별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뭐, 뭐라고?!”
봉공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연 대수의 무공이 걱정되시는지요? 하면 시험해 보시지요. 연 대수의 사상이 의심스러우십니까? 대화를 나눠 보십시오.”
봉공들을 둘러보는 제갈문호의 눈빛은 속내와 다르게 북풍처럼 차가웠다.
“봉공분들께서 연 대수에게 받은 인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모든 의견을 취합하여 이번 작전을 승인할지 말지 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등천교가 서둘러 말했다.
“그게 무슨…….”
“시작은.”
제갈문호가 등천교를 보았다.
등천교는 무림맹 군사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공동파 장문인, 등천교 봉공님부터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