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조각 (1)
후우우웅.
후덥지근한 여름이었지만, 대별산맥에 이는 바람은 몹시 선선했다.
하물며 밤이었다. 밝지 않은 초승달 주변에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며 묘한 운치를 자아내는 밤.
바람도 좋았고, 경치도 좋았다. 흔들거리는 나뭇잎들이 무희(舞姬)가 휘두르는 기다란 소맷자락처럼 보였다.
천강이 눈을 빛냈다.
숲의 공터 한가운데, 뒷짐을 진 채 등을 보이고 선 한 남자가 있었다.
천강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누구인지.
“번개?”
남자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번개라? 참으로 기가 막힌 호칭이었다.
남자가 등을 돌렸다. 그러자 모용군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난 널 뭐라고 부르면 되겠느냐? 불이라고 불러 주랴?”
“너였냐? 날 불러낸 놈이?”
꽤 과격한 말투였다.
본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천강은 모용군보다 한참 어렸다. 중원의 정서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어조였다.
물론 모용군은 상대의 말투나 목소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천강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살기를 다독이는 데에 제법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모용군이 툭 던지듯 물었다.
“뇌옥에서의 삶은 어떻던가? 살 만하던가?”
천강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따위 헛소리나 하려고 날 부른 거냐?”
다른 건 몰라도 천강의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가 없겠다.
단전이 반쯤 뭉개져서 내공이 몽땅 소실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랜 수감 생활로 빼빼 말랐으며, 내내 독방에 갇혀 있느라 정신적으로도 지극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다. 범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심호흡이라도 해 보지 그러나. 뇌옥 공기와는 질이 다르잖나.”
“이 새끼가……!”
“왜? 그쪽 공기가 좋으면 다시 보내 줄까?”
천강이 멈칫했다.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그라도, 다시 뇌옥으로 가서 썩으라는 말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습기 많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뇌옥이었다면 진작에 삶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무림맹은 뇌옥은, 미친 소리 같겠지만 지옥 같지는 않았다. 하루 두 번 음식이 제공되고, 그리 더럽지도 않았으며, 약물을 투여받고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어느새 공간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차라리 끔찍한 환경이었으면 모를까, 버틸 만하니까 더 미칠 지경이었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의 정신력은 그 정도 환경에 무너질 리 없었기에 천강을 더욱 괴롭게 했던 것이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 뇌옥을 시궁창으로 만들지 말자고 건의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느냐? 바로 나다.”
“……!”
“무림맹은 차후 강호의 안정과 평화를 이룩하는 구심점이야. 그런 중차대한 집단의 뇌옥이, 제아무리 죄수들이라고는 하나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대우로 뒷말이 나와서야 쓰겠느냐? 하여, 내 당원들과 합심하여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의 뇌옥이다.”
“…….”
“알겠느냐? 지금 네놈이 내 앞에서 그리 핏대 세워 가며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 것도, 다 내 덕분이라는 것이야.”
“궤변 늘어놓지 말고 목적이나 얘기해! 날 왜 불렀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모용군이 간수를 향해 턱짓했다.
간수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간수가 사라지자 모용군이 말했다.
“저 녀석에게 얘기는 들었지?”
천강이 입술을 깨물었다.
출옥할 수 있는 기회를 차 버리지 마라.
그 말인즉, 모용군의 부탁을 들어주면 이 지랄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있느냐?”
“확실한 약속을 받아 두지 않으면 난 네놈에게 농락당해 울분을 풀 곳이 없겠지. 뭐가 다르냐고? 다르지. 적어도 너 따위 빌어먹을 놈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거니까.”
독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천강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그럼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고 판단해도 되겠지?”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삼교 놈들은 다 너 같으냐? 앞뒤 분간할 줄 모르냐는 뜻이다.”
“앞뒤 분간할 줄 모르는 건 너야.”
천강이 손날을 펴 보였다.
깎지 않은 손톱에 때가 가득 끼어 있었다.
“내공을 잃고 몸도 이 모양이지만, 적어도 내 목을 찌를 정도의 힘은 있거든.”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죽겠다고?”
“뇌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 인정하겠어. 사흘을 살아도 바깥에서 살고 싶거든.”
천강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정말이지 독기만 가득 남은 짐승을 보는 듯했다.
“그러니까 엄한 개소리로 날 농락하려 들지 마라. 지금 죽어도 크게 아쉬울 것 없으니까.”
이건 진심이군.
모용군은 천강의 기세에서,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적어도 ‘지금은’ 진심이다. 섣불리 자극했다가는 진짜 죽어 버릴 것이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짜 죽을 것 같구만.”
“물론이지.”
“역시 만만한 놈들이 없어. 천한 오랑캐들이라도 그 정도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천강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썩어 빠진 혓바닥을 계속 놀려 봐라, 쓰레기. 오랑캐라고? 개소리 마. 너희야말로 서로를 물어뜯을 줄밖에 모르는 짐승들이야. 아니,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기라도 하지. 너희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모용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너 따위 놈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니, 개탄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닥치고 내 조건부터 들어라. 우선은 단전을 회복할 수 있는 극양의 영약을 준비해 둬. 그리고 인질로 삼을…….”
“죽어라.”
“뭐?”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죽으라 하였다.”
“……?”
“왜 내가 너 같은 놈 때문에 아쉬워해야 하는 거냐? 그냥 죽어라.”
천강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원하는 게 있어서 불렀을 텐데?”
“맞다. 너에게 확인해 볼 것이 있다. 하지만 굳이 너에게 묻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좀 더 빨리 아느냐, 늦게 아느냐의 차이일 뿐.”
스르르륵.
모용군의 몸에서 시커먼 살기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막는다고 막았지만, 천강과 말을 섞다 보니 살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해라.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직접 죽이진 못해. 흔적이 남으면 안 되거든.”
“…….”
“네 목숨이 온전히 내 손에 쥐어졌다면, 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무림맹 맹주전의 벽에 생생히 박제되었을 게야.”
오싹!
천강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용군이 뒷짐을 진 채 몸을 돌렸다.
“오늘 밤은 죽 쒔군. 너 같은 잡놈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거든. 그걸 감수하고 왔는데, 그냥 기분만 잡치고 끝났구먼.”
“…….”
“이만 꺼져라.”
냉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가만히 모용군을 노려보던 천강이 손을 내렸다.
“원하는 게 뭐지? 그것부터 듣도록 하지.”
“꺼지란 말 못 들었느냐?”
후우우우우웅.
뒷짐을 진 모용군의 손에 은은한 진기가 어렸다.
“기어이, 내가 손을 쓰기 바라나?”
천강의 눈이 흔들렸다.
원하는 게 뭐냐는 물음은, 말하자면 시험이었다. 못 이기는 척 용건을 줄줄 말하면 확실하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죽이려는 듯,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살기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저놈, 진짜 날 죽일 셈이다.’
물론 천강 역시 당장 죽어도 크게 아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더 낫다. 그건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천강으로서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이 말에도 죽인다고 하면, 진짜 죽는 것이다.
그리고 모용군의 반응은, 이전과 똑같았다.
파직!
모용군의 손에서 황금빛 뇌전 줄기가 번쩍였다.
끓어오르는 살심이 뇌정공을 자극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많이 과격해지셨소.”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천강은 깜짝 놀랐다.
스르륵.
어느새 모용군의 옆, 숲속에서 연호정이 등장했다.
“댁이 삼교를 증오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 조절이 안 될 줄은 몰랐소이다.”
파지지직!
“이만 진정하시오. 정말 죽여 버리면 안 되잖소.”
파직! 파지직!
모용군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연호정의 말을 무시하고 단숨에 목을 뜯어 버릴지, 참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잠시 후.
스르르륵.
뇌기를 잠재운 모용군은 담담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천강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토록 폭발적인 살기를 뿜어냈음에도, 지금의 표정은 여유 그 자체다. 마치 조금 전 살기를 뿜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 변덕스러운 변화가 기묘한 공포를 안겨 주었다.
모용군이 연호정에게 말했다.
“내가 처리하고 싶었는데, 잘 안되는구먼.”
“깨달음이 높은 자, 자신의 진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법이오. 다만 당신의 뇌기는 육십사괘 중 가장 파괴적인 진기요. 어쩌면 그 진기의 영향으로 성정이 그리 과격해진 건지도 모르겠소.”
“내 성정은 원래 과격했네. 저놈이 그 성정에 불을 붙였지.”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됐소. 내가 대화하겠소.”
천강을 힐끔 본 모용군이 재차 몸을 돌렸다.
“일각 안에 끝내게. 더 참다간 내가 저놈 살가죽을 싹 벗겨 버릴지도 모르니까.”
“알겠소.”
연호정이 천강을 향해 걸어갔다.
천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넌……!”
모용군만큼이나, 아니 모용군 이상으로 기억에 남은 사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용군과 생사전을 벌였지만, 자신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이 청년이었으니까.
스륵.
천강의 일 장 거리 앞에 선 연호정은 아무 말 없이 천강을 바라보았다.
천강의 몸이 또다시 움찔했다.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깎아 놓은 것처럼 무표정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은 가면보다도 더 딱딱해 보였다.
‘이……!’
모용군이나 연호정이나,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 사실이 천강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움찔!
천강은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는 연호정.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표정이나 눈빛을 보고 감정 상태라도 읽겠는데, 상대에겐 도통 그런 게 없었다.
눈은 유리알로 만든 것 같았고, 표정은 철 가면보다도 딱딱하여 미동이 없다.
“…….”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연호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천강의 눈과 볼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려 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강이 버럭 소리쳤다.
“대체 뭐 하자는……!”
순간 연호정의 손이 움직였다.
파악!
“허억!”
순식간에 멱살이 잡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내공을 소실해도 평생을 단련한 안법(眼法)은 그대로라 어지간한 속도는 다 잡아낼 텐데, 연호정의 손이 움직이는 건 보지 못했다.
턱!
천강이 양손으로 연호정의 손목을 잡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연호정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눈과 입가가 살짝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옳지. 그렇게 반응하는 거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더니, 천강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이 크게 휘둘러졌다.
부우우우우웅!
천강은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몸에 새겨진 신화교의 절정무공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