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79화 (478/963)

479화. 밑 준비 (4)

“그랬군.”

“어쩔 거요?”

“무엇을 말인가.”

“무엇이라니? 제갈문호, 그 여우 같은 놈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은 모른단 말이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압도적인 승리였소. 피 흘려 가며 싸워 이겨 봤자, 이 넓은 대륙을 온전히 다스릴 수 없을 테니까.”

“…….”

“그러기 위해서는 중원의 세력을 철저하게 분리시켜야만 하오. 말 그대로 각개 격파가 되어야 한단 말이오. 지금껏 그것을 위해 달려오지 않았소?”

“한데?”

“몰라서 그러는 거요? 놈은 선수를 쳤소! 이로써 놈이 여론을 장악하기 쉬워졌단 말이오!”

“여론과 민심이란 불과 같은 것이다. 더 큰 불을 내면, 자연스레 그 불과 합쳐지게 마련이지.”

“설마 맞불을 놓을 생각이오?”

“그래야만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맞불을 놓으면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소이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사항이 아니지 않나?”

“……!”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너를 귀히 대하고 있어. 무림맹에 세작을 심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든.”

“빌어먹을! 말만 귀하다고 하지 말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알려 주시오!”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러다 티라도 내면, 자네가 세작이란 사실을 눈치 빠른 군사가 알아챌지도 모르지 않나?”

“그 정도 믿음도 없으면서 날 세작으로 만든 거요?”

“믿음이 있으니 자네를 세작으로 만든 거지. 자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이고.”

“…….”

“초조해하지 말게. 자네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지금 이 모습, 보기 좋지 않군.”

“제길, 이렇게 갑작스레 선전 포고를 할 줄 몰랐단 말이오.”

“제갈문호 그놈, 한계가 없는 놈이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말고, 티도 내지 말게.”

“…….”

“당분간 정보 전달은 중단하도록 하게.”

“안 되오.”

“왜 안 되지?”

“습관처럼 하던 일을 갑자기 끊어 버리면, 날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상함을 느낄 거요. 그냥 하던 대로 하겠소.”

“음.”

“주의는 내가 아닌 연락책에게 주는 게 좋을 거요.”

“역시 자네는 믿음직한 사람이야.”

“됐소. 그런 말 들어 봤자 별 위안이 안 되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본교의 진군 시기를 결정해 줄 선봉 중 하나야. 그리고 우리는 그 역할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지.”

“답지 않게 오늘은 말이 많으시구려.”

“자네가 자네다움을 잃었으니까. 자네를 관리하는 것도 내 일이거든.”

“됐소. 이만 가 보시오. 충분히 진정되었으니까.”

“주변이 조용해지면 다시 오지.”

스르륵.

찾아올 때처럼 귀신같이 사라지는 사내.

언제 봐도 신기한 무공이었다. 아니, 무공인지 술법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참으로 배우고 싶은 공부였다.

“……어서 빨리 이 역겨운 진기를 토해 내고 싶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이 구대문파의 절학을 배우고자 한다. 설령 초식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 준다고 해도, 수만 명의 무림인이 몰릴 것이다.

사내는, 그런 구파의 절학을 누구 못지않게 연성한 초절정 고수였다. 그런데도 자신이 연성한 그 기운을 역겨워하며 토해 내고 싶다 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가면을 보았다.

가면은 환한 기운을 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다시 가면을 썼다.

* * *

“좀 다르게 보이긴 하더군.”

당관의 말에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오?”

“제갈가주 말이오.”

“아.”

회의 때 보여 준 제갈문호의 결단력과 당당함은 상당한 것이었다.

솔직히 당관은 내심 감탄했다.

그가 지금껏 봐 왔던 제갈문호는 소심하진 않지만 신중했고, 차갑진 못했으되 딱딱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군사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제갈문호는 달랐다.

차가운 나른함으로 포장된 제갈문호의 눈빛에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성한 무림맹에 적의 세작이 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런 기질도 있어야지. 그 양반도 조금은 성장한 건지도 모르겠소.”

연위가 피식 웃었다.

“성장이라니, 군사께서 들으면 섭섭해하실 거요.”

“섭섭? 칭찬인데?”

“군사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소. 다만, 그간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을 뿐.”

“그리 봤소?”

“나도 모르고 있었소. 그저 회의 때 모습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오. 군사의 마음속에도 누구 못지않은 열의가 득실거리고 있다는 걸.”

“뭐가 됐든 그런 기질은 나쁘지 않다고 보오.”

“동감이오.”

차를 한 모금 넘긴 당관이 조금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고생이 많으셨겠소?”

“음?”

“세작질 하느라 말이오.”

연위는 저도 모르게 하하 웃었다.

“나 같은 사람을 세작으로 쓰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연위는 세작으로 쓰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거친 강호에서 크나큰 단점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자신의 솔직함과 신념을 무기로 삼아 누구 못지않은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궁금하긴 하군. 그 시커먼 속내를 웃는 낯짝으로 가리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닐 텐데.”

“누가 되었든, 정말 무서운 일이오.”

연위가 잔을 만지작거렸다.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다…… 세상에 그런 조직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설마하니 무림맹 봉공 중에 세작을 심어 두었을 줄이야.”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소? 여유를 부릴 필요는 없지만, 쓸데없이 어깨에 힘주고 다닐 필요도 없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종류의 경험이 많은 모양이오.”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는데, 뜻밖에도 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있었지.”

연위의 얼굴에 솔직한 놀라움이 떠올랐다.

“당가에 세작이 활동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허어.”

사천당가의 악명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집단에 세작을 보내다니? 그런 간 큰 조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공포를 벽돌 삼아 둘러쳤기에 더더욱 세작 침투 사건이 많았소. 아무도 뚫어 보지 못한 철옹성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는 머저리들이 많았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세작을 보낸다라…….”

“호기심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

“호기심보다는 걱정이 앞설 듯한데.”

“시작은 다들 이렇소. 자신 있게 세작을 보내지만, 막상 보내 놓고는 과연 침투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그래도 기대하면서 지켜보다가, 그 일이 실패하면 설마 싶은 마음으로 또 세작을 기른다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놈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보내는 세작은 죄다 꼬리에 불과하오. 끊어졌다고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하지.”

“…….”

“그렇게 스무 곳이 넘는 조직을 불살라 버렸소, 내 대에서만.”

연위의 얼굴에 또다시 놀라움이 어렸다.

“그, 그렇게 많이?”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해 드리자면, 그중 무림 문파는 절반도 되지 않았소.”

“……?!”

당관이 다리를 꼬며 창가를 보았다.

오만 사건을 겪어 본, 익숙하다 못해 피로감을 느끼는 경험자의 얼굴이었다.

“무림 문파에 세작을 보낸다? 대다수는 적당히 무공을 익히고 은신술에 능한 자들을 보낸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소. 진짜 무서운 세작은, 육신의 능력이 아닌 정신력이 뛰어난 세작이오.”

“정신력…….”

“사람 관계를 고작 말 몇 마디로 뒤흔들어 버릴 수 있는 자.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조직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읽을 수 있는 자. 옥죄어 오는 현실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면서 웃을 수 있는 자.”

“……!”

“그런 세작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것이오. 같은 맥락에서,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면 그자는 정말 대단한 자일 거요.”

“무공을 익혔는데도 말이오?”

“문제는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겠지.”

창밖을 보는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창밖, 연무장에선 당상아가 사비무쌍세를 수련하고 있었다.

당관의 눈이 조금, 아주 조금 인자해졌다.

“육가의 가주 중에 존재한다면, 그자는 혈육지정(血肉之情)조차 단숨에 끊어 낼 수 있을 만큼 지독한 목적의식을 가진 자요.”

“어찌 그렇소? 그 가문 전체가 삼교와 손을 잡았을 수도…….”

“그럴 수 없소. 가주 정도의 위치에 있는 세작은 오히려 제 세력을 건드리지 않을 거요.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적어도 진짜 세작이라면 말이오.”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그 말인즉, 세작이 훗날 계책이 성공할 시에 자신을 따르지 않는 피붙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하다는 뜻이니까.

“비슷한 이유로, 구파에 세작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엄청난 거요. 구대문파의 무공들은 불가와 도가의 공부를 이었소. 와중에 맛이 가 버린 놈들도 많지만, 장문인 정도의 무공을 연성했다면 드높은 깨달음으로 누군가를 속이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진기를 그 정도로 연마하기도 어려울 것이오.”

“하면……?!”

“장문인 중 하나라면, 그자는 불가나 도가의 심공에도 꺾이지 않는 이중인격에 가까운 독심과, 심중에 그런 독심을 숨기고도 초절정의 영역에 오를 만큼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요.”

당상아의 수련을 지켜보던 당관이 다시 자신의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쪽이든 정신력 하나만큼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놈이 분명하오.”

연위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었다.

그 역시 세작을 잡은 적이 있었다. 그 정체는 바로 총관 태경으로, 연호정의 기지가 없었다면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데 당관의 말을 들어 보니, 태경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지 않은가.

당관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난 모용군이 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왜 그렇소?”

“세작이라고 하기에는 욕망이 지나친 데다가 그만큼의 정신력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오. 가주도 보셨잖소? 그놈이 싸가지의 기습 공격에 몇 번씩이나 놀라는 꼴을.”

싸가지는 바로 연호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시시때때로 보여 주던 그 놀라움은 진짜였소. 연기일 수가 없지, 그런 건.”

“그것조차 연기라면?”

“그럼 눈 뜨고 당하는 셈이겠지.”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군은 아닐 것이다.’

아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모용군은, 과거 아들이 흑암제라 불리던 시절에 연합하여 사음교와 싸운 정파 무림의 최고수였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이라고 놈들의 세작일 리는 없었다. 애초에 자존심도 워낙 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군.’

연위의 눈이 빛났다.

‘호정이 말하기를, 분명 모용군은 마지막 순간 당가주의 손을 빌려 자신을 죽였다고 했다.’

삼교 중 고작 사음교 하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중원은 여전히 위기에 휩싸인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몇 안 되는 절대고수를 죽였다고?

아무리 모용군이 탐심이 많고 질투심이 많다지만, 제 사람만큼은 챙길 줄 아는 이였다. 굳이 흑도의 제왕을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일까? 모용군은 그때, 왜 호정을 죽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연위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가라앉았다.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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