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78화 (477/963)

478화. 밑 준비 (3)

“다 모이셨군요.”

봉공들을 둘러보는 제갈문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당히 심각한 사안이라, 부득불 불참자가 없기를 바란다고 한 것,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

등천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식적인 인사는 됐으니, 바쁜 사람들 불러 모은 이유나 어서 말해 주시오.”

“등 봉공.”

공공대사의 나직한 목소리에 등천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제아무리 그라도 소림 방장이 주는 눈치를 무시할 순 없었다

공공대사가 제갈문호에게 눈짓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등 봉공님 말씀대로, 시간은 길게 끌지 않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처음 보여 주는 모습과 진지할 때 보여 주는 분위기의 편차가 실로 크다. 봉공들의 모든 눈이 제갈문호에게로 향했다.

좌중을 한 번 둘러본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예전 등 봉공님의 발언으로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새외에 삼교라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전력이 대단하며, 나아가 중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안 그래도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더욱더 무거워졌다.

“저는.”

구파의 봉공들, 그리고 육가의 봉공들.

한 명, 한 명의 눈을 직시하며,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봉공 중에 세작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쾅!

화산의 용화진인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 무슨 망발이시오!”

용화진인만이 아니었다. 몇몇 봉공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다들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군사는 설마하니, 정말 이곳에 적의 간세가 있을 거라 믿는 것이오?”

“전에 말씀드렸을 겁니다. 적의 세작이 있을지도 몰라 삼교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고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확신합니다. 한 명인지, 아니면 둘 이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 분명 세작이 있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용화진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내, 일전 방장대사와 군사의 말에도 보란 듯이 화를 내지 않은 것은, 두 분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특히 군사! 군사는 묵룡부에 관해서도 우리가 모르게 입을 닫고 있었소! 그때도 세작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지 않았소!”

“그랬었지요.”

“이곳에 있는 분들 모두가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분들이오! 기원도 모르는 외적 놈들의 세작 따위나 하고 있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외다!”

“예전 일을 기억하신다면, 그때 제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이 정도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제갈문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군사는 천하제일의 협객도 십 할 믿지 않는 존재입니다. 설령 무림맹주가 선출되어도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그게 군사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봉공님의 반응, 충분히 이해합니다. 위치가 달랐다면 저 역시 이 상황이 불편하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차가워졌다.

“하나 여쭙지요. 강호에서 명망 높은 봉공분들을 상대로, 제가 장난을 칠 것 같습니까?”

“……!!”

“제 말이 사실이라도, 세작을 잡지 못하면 그 역풍은 고스란히 제가 받을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군사직에서 물러나게 되거나, 심하면 뇌옥에 갇힐 수도 있지요.”

자신의 목을 걸고 하는 얘기다. 제갈문호의 말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아무리 화가 났다 한들, 제갈문호의 강경하기 그지없는 반응 앞에서까지 발작할 수는 없었다. 용화진인은 거칠어진 숨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십시오. 믿기지 않더라도, 상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 봉공 중에 세작이 있고, 지금 이 대화까지도 고스란히 적측에 전달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

시종 무겁던 분위기가 차갑게 굳어졌다.

정말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 그 세작이 그간 봉공회의에서 다뤘던 주요 사안들을 전부 삼교 측으로 보냈다?

이처럼 무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림맹의 극비 정보를 적에게 넘기고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저희는 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

“지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제라도 관계를 바꿔 봐야지요.”

등천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진심으로 그리 믿소?”

“그렇습니다.”

“다시 묻겠소이다. 군사께서는 진심으로 우리 봉공 중에 삼교란 족속들이 부리는 세작이 있다고 확신하시오?”

“그렇습니다.”

등천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으로 재미있구려. 그렇다면, 군사께서도 그 세작 중 하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않소?”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봉공분들께서 그리 보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많아야 할 거요. 군사가 세작이라면, 우리는 철저하게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되니까.”

그때, 팽무강이 입을 열었다.

“등 봉공.”

그간 회의에서 많아도 열 마디 이상 하지 않던 팽무강이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심각한 상황이잖소? 분위기를 흐리는 말씀은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리오.”

“뭐라?”

“적의 세작에 관해 논하고 있소이다. 군사가 세작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지혜를 모아 하루빨리 놈을 색출해도 모자랄 마당에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는 아니 될 것이오.”

등천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말 다 했소?”

“다 안 했으니 더 들으시오. 정말 세작이 있다면, 우리는 다툼이 아닌 화합을 통한 집중으로 적의 간세를 몰아내야 하오. 화가 나는 건 알겠지만, 사태를 더 냉정히 보시길 바라오.”

“화합? 집중? 지금 그것을 깨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껏 군사가 우리 몰래 비밀리 저질렀던 일을 눈감아 주었소! 제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들, 그건 명백한 월권이었소!”

풍벽자가 슬쩍 끼어들었다.

“등 봉공.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외다.”

아미의 복호사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합니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인 것 같군요.”

등천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들 이럴 거요?! 이럴 거면 봉공회의를 왜 여는 것이오! 군사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거면, 이런 회의가 다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오!”

그가 공공대사에게 눈을 돌렸다.

“대사께서도 한 말씀 하시오! 그래, 전에 대사께서 이리 말씀하셨지? 군사가 하는 일을 뒤에서 봐주었다고 말이오!”

공공대사는 말없이 등천교를 보았다.

등천교의 두 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책임진다고 하셨으니, 어디 책임자답게 말을 해 보시오! 이 상황이 정녕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때, 승현진인이 말했다.

“당연한 것이오.”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등천교를 시작으로 모두가 승현진인을 보았다.

승현진인은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 반응은 당연한 것이외다. 등 봉공께서 저리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그렇지 않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또한, 비록 과격하기는 하나 등 봉공의 말씀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외다. 물론 군사의 능력과 인품이 원체 뛰어나고, 여기 계시는 대사의 불심(佛心)도 의심할 나위가 없소. 하나, 그간의 일을 돌아보면 분명 두 분께서 선을 넘기도 하셨소.”

“송구할 따름입니다.”

“무림맹은 거대한 조직이오. 적이 많을 수밖에 없지. 하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서는 곤란하오. 아직 맹주위가 공석인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런 비밀스럽고 급진적인 일 처리는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오.”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기야 할 것이오. 하나, 앞으로는 이러한 일 처리에 주의해 주시길 바라오. 등 봉공이나 군사나, 결국은 같이 하얀 길을 걷는 사람들 아니겠소?”

승현진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차분하여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 하물며 제갈문호만이 아니라 공공대사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실을 사실로, 분위기를 격렬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인지시키는 화법을 구사하니, 어느새 활화산처럼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식어 갔다.

쿵!

등천교가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이런데, 언제까지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팽무강이 말했다.

“이 사람도 답답하여 언사가 다소 공격적이었소. 사과드리오.”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팽가의 호탕한 기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이다. 팽 봉공 역시 모두를 위해 나선 것이 아니오? 그리 사과하실 필요는 없소.”

“민망할 따름이오.”

분위기가 진정되자 제갈문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사태는 예상했습니다만, 막상 이러한 상황을 겪게 되니 생각보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군사로서 독단적인 일 처리를 감행한 것,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심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진심 어린 사죄를 하는 듯하다. 등천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허리를 편 제갈문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의 전에 단독으로 결정 내린 사항이 있습니다. 마지막 이 부분까지만, 봉공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용화진인의 볼이 씰룩거렸다.

“또 뭐요?”

“지금쯤이면 장강 이북 곳곳에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을 겁니다. 아마 사흘 안에, 중원 전체가 한 가지 소문으로 홍역을 앓게 될 테지요.”

“소문?”

“미지의 세력이 중원을 넘보고 있다는 소문, 그리고 그 세력이, 무림맹에 세작을 심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

“……!!”

봉공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등천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신 미쳤소?!”

그런 말이 나올 만한 일이었다.

이건 사고를 쳐도 너무 크게 쳤다. 제갈문호를 보는 봉공들의 눈초리가 대번에 살벌해졌다.

“한 번 더 두고 보려 했더니만, 세상에 이런 대형 사고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전쟁이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등천교의 눈이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봉공들 대다수가 깜짝 놀라서 제갈문호를 보았다.

“우리가 세작을 잡으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치명적인 공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작을 잡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림맹의 전력을 상회하는 적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쥐새끼 하나 때문에 다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

“말이 나온 김에, 그 쥐새끼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지독하게 차가운 그 미소는 남다른 성질머리의 소유자인 등천교의 등골조차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함부로 날뛰지 마라.”

제갈문호의 어조는 나른했다.

“삼교라는 미지의 공포를 알게 된 중원인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 봤자, 너희는 상처뿐인 영광만 얻게 될 거다. 지금까지처럼 그 자리 그대로 있도록 해. 전장은 이곳에서 만들어 주지.”

“…….”

“조만간 잡으러 갈 테니 얌전히 오랏줄이나 준비해 놓도록. 만에 하나 자수한다면, 봉공분들을 설득하여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도록 힘써 주겠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이상입니다. 회의하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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