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밑 준비 (2)
“으하아아암!”
늘어지는 하품에 봄날도 아닌데 아지랑이가 다 피어오를 것 같다.
“어, 나른하다.”
얼큰하기 그지없는 말투다.
숙취로 머리가 아플 때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 어제 제법 과음을 한 팽운(彭雲)은 하늘 같은 가주님의 하품을 들으며 쓰린 속을 달랬다.
가슴을 벅벅 긁던 팽무강(彭武岡)이 입을 열었다.
“운아.”
“예, 가주님.”
“쟤 깨워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어디선가 물 한 바가지를 떠 온 팽운이 쓰러진 청년에게 물을 끼얹었다.
촤아아아악!
“크억!”
깜짝 놀란 청년이 후다닥 일어났다.
덩치가 굉장했지만, 전체적인 몸의 균형이 무척이나 잘 잡혀 있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신체라며 감탄을 터트릴 만한 몸이었다.
물론, 평상시의 몸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여기저기 베이고 피멍이 든 청년의 몸은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 핏물이 엉겨 굳어 버린 머리카락은 다 말라 버린 해초(海草)를 보는 것 같았다.
연무장 위, 의자에 앉아 팽대호를 내려다보던 팽무강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좀 늘긴 했다야.”
팽대호가 투덜거렸다.
“그 실력 알아보려고 아들을 이 모양으로 만드십니까?”
“연습은 실전처럼. 지금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실전에서 쏟을 피 한 바가지를 예방하는 법이다.”
“땀만 흘렸다면 말이지요.”
“한두 번도 아니잖아? 자꾸 땍땍거리지 마라. 옹졸해 뵌다.”
“아들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겉으로 보기에도 참혹했지만, 기실 속은 더 엉망이었다. 내상은 물론 골절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러고도 자리에 앉아 바락바락 대들 수 있는 팽대호의 인내심이 대단한 것이다. 기실 이 정도가 되면, 보통 사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다.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그 꼴이 뭐 어때서? 애먼 놈 칼에 모가지 날아가는 것보다 낫지.”
“너무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오늘은 좀 심하셨다고요. 이름 모를 놈 칼에 목이 달아나기 전에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그럼 더 열심히 수련하든가.”
팽대호가 버럭 소리쳤다.
“밤잠을 설쳐 가면서 하고 있다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무림맹에는 고수도 많고 천재도 많았다. 그들을 보며 자극을 받은 팽대호는 가문에 있을 때보다 수련 강도를 두 배 이상 늘렸다.
하루하루가 피를 토하는 수련의 연속. 어지간한 독종도 혀를 내두를 강도다.
“너 지금 애비한테 대드냐?”
“자식 죽이려 드는 부친한테 대들면 안 되는 겁니까?”
“세상 이런 불효자식이 없네. 나처럼 애정 듬뿍 실어서 수련시켜 주는 부모가 또 어디 있냐?”
씩씩거리며 팽무강을 노려보던 팽대호가 이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팽대호 역시 나름대로 강호 경험이 있고 꽤 독특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제법 만나 봤지만, 그 누구도 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독특한 성격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이건 수련을 빙자한 구타다!
정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랐다. 어지간한 고통도 웃으면서 참을 수 있는 자신인데, 아버지의 주먹질은 한 방, 한 방이 골절상 이상의 고통을 주었다.
수련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정신 차렸으면 운기나 해라.”
“정강이뼈가 부러졌는데요.”
“누가 가부좌 틀고 하래? 어렵사리 배운 입공(立功)은 개한테 던져 줬냐?”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니까요! 좌공은 물론 입공도 힘들어요!”
“그럼 누워서 해, 인마! 아, 그놈 새끼 더럽게 말 많아요. 덩치는 산만 한 게 누굴 닮아서 저런대?”
팽대호가 투덜거리며 벌러덩 누워 버렸다. 누우란다고 대놓고 눕는 그도 보통 성질머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새 팽대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순식간에 운공에 들어간 것이다.
험악하기 그지없었던 팽무강의 표정도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놈 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대견함이 가득 묻어 나온다.
팽운이 은근슬쩍 말했다.
“도법도 도법이지만, 육탄전의 능력이 정말 엄청나게 성장했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팽무강은 자신의 명치를 내려다보았다.
헐렁한 의복 안, 명치 부근에 작은 멍이 들었다. 막는다고 막았는데, 방어를 뚫고 들어온 파갑추(破鉀錘)의 경력이 타격을 가한 것이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것이다. 단순한 육체 훈련만이 아니라 진기와 발경법까지 뿌리 깊게 연마한 것이 분명했다.
“여러모로 자극이 됐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동생이 그렇게나 발전했으니.”
팽대호의 쌍둥이 동생, 팽만호는 현재 의정군 소속 멸사군의 군병으로 활동 중이었다.
군병으로서 훈련을 받으며, 군병으로서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한 사선을 넘나들며 성장한 팽만호의 전투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팽대호는 동생의 성장을 사심 없이 기뻐해 줄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 그는 소가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호전적이고 자존심 강한 하북팽가의 핏줄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유들유들한 팽만호의 성격이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시는 겁니까?”
“음?”
“소가주의 몸에 타격을 가하며 내공을 유연히 하고 탁기를 불살라 주지 않으셨습니까?”
팽무강의 주먹질이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이유였다. 파고드는 발경이 상처를 입힘과 동시에 탁기를 불살라 버리고 반죽하듯 내공을 풀어내니, 상대하는 팽대호로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팽무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해하지 말게. 대호나 만호나 나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자식들이야. 다만 가주로서, 내 뒤를 이을 녀석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줘야지. 그건 권리가 아니라 책임일세.”
“그렇군요.”
“하긴, 그것도 녀석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안 했겠지. 짧은 시간, 용케 이 영역까지 올라왔어.”
자식을 보는 팽무강의 얼굴에 기특함이 가득했다.
팽운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골절은 좀 심하셨습니다.”
“괜찮네. 철신공(鐵身功)도 건재하더구만. 얼추 엿새면 다 회복할 게야. 가끔은 이 정도로 타격을 가하는 것도 좋아. 그럴수록 철신공의 성취가 오를 테니까. 뼈와 근육이 더 유연해지고 단단해지지.”
거칠어 보이는 수련이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깃들어 있다.
팽무강이 다시 하품을 했다.
“어이쿠, 오늘은 좀 푹 쉬어 볼까? 내일 또 봉공회의라던데.”
“회의를 또 하십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회의가 잦아도 너무 잦아.”
어떤 조직이든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 번뜩이는 지혜, 시국을 읽는 안목 등이 필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팽무강은 훌륭한 가주였다.
하지만 그 역시 팽가의 남자다. 호탕하고, 복잡한 걸 싫어하는 성격.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머리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저놈 일어나면 잔소리 좀 해 주고 쉬어야겠군. 자네도 이만 들어가서 쉬게. 어제 술 많이 자셨잖나?”
“하하, 가주님도 많이 드셨잖습니까?”
“수장 위한다는 명목에 쓸데없이 시간 죽이지 말고 들어가게. 사람이 효율적으로 살 줄 알아야지.”
팽운이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하지만 팽운은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
팽운의 눈이 빛났다.
“가주님?”
“그래.”
팽무강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이거, 뜻밖의 손님이 오셨구만.”
기세를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부러 과장되게 뿜어내지도 않기에 더더욱 위엄 넘치는 기세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젊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계십니까?”
팽무강이 말했다.
“문 열려 있네. 들어오시게나.”
끼이익.
열린 대문으로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팽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연가의 연호정입니다.”
짧지만 사내다움이 팍팍 풍기는 인사였다.
팽무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정군의 대수께서 이 누추한 곳에 발걸음을 하셨구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인가?”
둘은 봉공회의 때 몇 번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공석이라 사담은 없었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더랬다.
“그렇습니다.”
“자식 놈을 맡겼는데 한번 찾아가지도 못했네. 뒷말 나오는 걸 썩 좋아하지 않거든.”
팽만호를 말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어떻던가? 녀석은 잘하고 있나?”
“충분히 제 몫을 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발전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팽무강이 씨익 웃었다.
“두들길수록 강해질 걸세. 녀석만이 아니라 우리 팽가 남자들은 다 그래. 잘 클 수 있도록 망치질에 정성 좀 담아 주게.”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 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반가운 소리로고.”
제삼자가 들으면 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팽무강은 연호정의 거침없는 발언에 만족했다. 숨김없이 호탕하게 자신을 보여 주는 것, 팽무강은 그런 사람을 아주 좋아했다.
연호정이 팽대호를 힐끔거렸다.
“그나저나, 팽 형도 열심히 수련 중이군요?”
“열심히 하고 있지. 제 동생 놈에게 지면 안 되잖나?”
“그렇지요.”
“하긴, 자네가 보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겠군. 어떤가? 제법 쓸 만한 것 같은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기(內氣)가 무척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체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련되었어요. 이 정도 노력, 어지간한 독종에게도 힘들지요.”
“크하하하!”
팽무강이 거침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한 점의 사심도 없다. 연호정을 건방지다거나 오만하다고 생각하질 않는 것이다.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보기에도 그럴 정도면, 적어도 저놈이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은 게로군.”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팽 형은 좋은 가주가 될 것입니다.”
“덕담 고맙네.”
“별말씀을.”
“그건 그렇고.”
팽무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찾아오셨나?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습니다.”
“술상이라도 봐 오라고 할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사실, 오기 전까지는 그러길 바랐습니다. 진득하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가주님을 알아보고 싶었지요.”
상당히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팽무강이 웃으며 물었다.
“지금은 아닌가?”
“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렵니다.”
“카핫! 단도직입 좋지. 뭔가?”
“삼교에서 파견한 세작이십니까?”
그야말로 당돌하기 그지없는 물음이었다.
당돌함을 떠나, 진짜 세작이라도 이 질문에 ‘맞소. 내가 세작이오.’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그리 묻고 있었다.
팽무강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런 귀찮기 짝이 없는 짓거리를 소일 삼을 만큼 똑똑한 사람으로 뵈나?”
“역시 아니시군요.”
“황제 자리를 줘도 안 해, 그런 거. 안 그래도 흰머리 신경 쓰여서 죽겠구만.”
세상은 모를 것이다. 팽무강의 성격이 이 모양이라는 걸.
하지만 연호정은, 그런 팽무강의 성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럼 아니시라고 믿겠습니다.”
팽무강의 눈이 빛났다.
“당연히 아니지. 아닌데…… 내 말을 믿나?”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죠.”
“크하하하하!!”
팽무강의 웃음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 친구 이거 걸작인데? 아주 마음에 들어. 둘째가 자네를 왜 그리 따르는지 알겠는걸?”
“과찬이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팽무강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내가 뭘 해 주면 되나?”
똑똑한 사람이야.
정말이지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다.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세작 색출하는 것 좀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