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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76화 (475/963)

476화. 밑 준비 (1)

제갈문호가 반가운 얼굴로 연호정을 맞았다.

“왔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살이 조금 빠지신 것 같습니다.”

“머리 쓰는 자들의 숙명이지. 보약을 그렇게 들이켰는데도 흰머리가 쑥쑥 늘고 있다네.”

껄껄껄 웃는 모습에서 군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정말 골치 아픈 자리지만, 그만큼의 보람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자네는 정말 대단하군. 예전에는 자네의 수준이 보였는데, 지금은 흐릿하기만 하네. 벌써 내가 볼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 겐가?”

제갈문호 역시 육대세가의 가주로서 부족하지 않은 무공의 소유자다.

특히나 안목에 있어선 누구보다도 날카롭다. 그런 그의 눈에도, 더는 연호정의 한계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수준 차이가 그렇게나 벌어져 버린 것이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안목으로도 그 경지의 끝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연호정이 성장한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안심하고 싸울 수가 없어요.”

제갈문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이제 자네는 나이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네. 백도를 대표하는 대문파의 수장들보다도 강한 무공이라면, 능히 천하를 논할 만한 무력이야.”

“천하를 논하려면 성천의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만…… 그건 과욕이라네. 자네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어. 그 연배에 그와 같은 무공이라면, 역사를 모조리 뒤져도 비교 대상이 없을 걸세.”

“군사님 말씀대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나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나 적의 전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지금으로선, 하루라도 빨리 적의 수괴와 정면으로 부딪쳐도 모자라지 않을 힘을 손에 넣어야만 합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저에 육박하는 고수가 한 명은 있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누구인가?”

“보타암의 검후 후보 중 하나입니다. 재능과 무력만 보면, 차기 검후에 가장 가까운 녀석이긴 합니다만.”

“허! 보타에 그 정도 인재가 있었단 말인가?!”

“아직은 반쪽짜리입니다. 그 좋은 무공을 제대로 살릴 만한 정신력이 아니에요. 뭐, 나중에 나아질지는 지켜봐야겠지요.”

어떤 부분에서 그런 것을 느꼈는지 궁금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조금 지겹더라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방금 자네가 말한 그 검후 후보에 관한 것까지 전부.”

연호정이 재차 미소를 지었다.

“지겨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모용군에게 했던 얘기를 제갈문호에게도 그대로 말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불산의 일을 고스란히 전한 것 정도였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를 받는 것과 직접 얘기를 듣는 것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들었던 얘기를 거의 똑같이 듣는 기분이구먼.”

“그만큼 후개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지요.”

제갈문호에게 전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가득상이었다.

보고서로 받은 내용과 현장에서 뛰는 실무진의 말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만큼 가득상이 상황을 잘 전달했다는 뜻이리라.

정보력으로 천하제일을 논한다는 개방의 후개다운 능력이었다.

“그나저나 보타라…….”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 말마따나, 묵룡부주의 욕심이 지나치게 과했네. 제아무리 사음교에 원한이 깊다지만, 이런 시국에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정확히는 수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봐 가면서 묵혀 둘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어떤가? 자네가 보는 묵룡부주는?”

“군사님이 보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들어야겠네.”

제갈문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현 무림맹의 핵심 고수 중 하나이자 유군 부대의 수장을 묵룡부로 파견 보내야 할 상황이야. 묵룡부주에 관해서만큼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알아 둬야 하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려서.”

“그래, 이번에는 자네가 좀 심했네.”

“쩝.”

“그래도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어쩌겠나. 그리고 솔직히, 그 일로 생길 이득보다 손해가 컸다면 내가 먼저 말렸을 걸세.”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지극히 위험하지만…… 묵룡부주가 자네를 괜찮게 보고 있다면, 삼교에 대한 대책으로 충분히 괜찮은 전략이라 생각하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해 주게. 자네가 보는 묵룡부주는 어떠한지.”

연호정은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전달했다.

제갈문호가 혀를 찼다.

“근래 들어 묵룡부주의 움직임이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달라지긴 한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알겠네. 자네에게 들은 얘기까지 총합하여, 내 나름대로 사람들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남았다.

“세작을 잡아야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 어떤 심각한 얘기를 나눌 때보다도 진지한 눈이었다.

“군사님 생각도 비슷하겠지만…… 이번 세작은 정말 보통 놈이 아닙니다.”

“보통 놈이 아닌 수준이 아니지. 맹의 봉공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안목과 경험을 지닌 노련한 이들이야. 그런 이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스스로를 숨길 줄 안다? 일류니, 특급이니 하는 수식어로 설명될 만한 놈이 아닐세.”

“군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작을 잡기 위해서, 시작을 어떻게 끊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제 생각 이전에 군사의 생각을 묻는다.

제갈문호는 연호정의 말에서, 그가 이미 어느 정도의 방안을 생각해 두었다는 걸 알아챘다.

“내 생각이라…….”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제갈문호는, 반 각 후에야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함세. 나는 세작을 잡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네.”

의외의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봉공 중 하나가 세작이라네. 그 사실은 곧, 설령 세작을 잡는다고 해도 비밀 유지가 힘들 거란 뜻이야. 정확히는, 비밀 유지가 될지 안 될지의 확률조차 추산할 수 없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삼교가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니까.”

“……!”

“무림맹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 무서운 일이지. 하루빨리 세작을 잡아야만 해. 한데 자네 그거 아시는가? 세작이 숨어 있다는 건 삼교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무림맹의 무능을 인정하는 꼴이 되네.”

“감안해야지요.”

“감안해야지.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무림맹이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사실을 대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한 세기의 평화를 바란다면 꼭꼭 숨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더 멀리 본다면, 잘못을 묻어 둬서는 안 될 일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시국일세. 무림맹의 역사 자체는 유구하나, 기실 당대 무림맹은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연합체라네. 묵룡부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거기에 있지.”

“그렇지요.”

“만약 우리가 세작을 잡는다면? 그리고 그 세작이 있었다는 걸, 우리가 아닌 삼교가 터트린다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삼교가 무림맹에 세작을 심어 두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린다면 무림인들이 무림맹에 실망하는 건 둘째 치고, 중원의 전력이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제아무리 삼교의 전력이 막강해도 그런 무리수를 둘 리는 없다.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전면전.

중원의 힘이 모이기도 전에 선공을 가하는 것.

즉, 애초에 삼교는 무림맹에 세작을 심어 두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이유가 없다. 진짜 전면전을 바랐다면, 비밀을 알리지 않고 단숨에 남하할 테니까.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네. 놈들이 그리할 이유가 없지. 그럴 바에야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전면전을 감행하는 게 나을 테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네. 그 이유는 무엇이지?”

연호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삼교는 무림맹 외에, 다른 지역이나 문파에도 세작을 심어 두었을 겁니다.”

“그럴 확률이 지극히 높지.”

“여론전에서의 승패는 대개 선수(先手) 측이 결정합니다. 만약 삼교가 세작의 존재를 알림과 동시에 먼저 여론을 장악한다면, 중원은 힘을 모으기도 전에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네는 똑똑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일세.”

미소로 가득하던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률을 점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 내가 왜 이런 불길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든지도, 자네라면 알 거야.”

“황궁.”

“정확하네.”

무림맹에 세작을 심었다?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놈들은 황궁에도 무수히 많은 세작을 파견했다. 삼교의 잔당이 황궁을 어느 정도 장악했는지는 당장에 알 길이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무림맹이라도 황궁의 일에는 끼어들 수 없다. 상황을 알아보려 사람을 보내는 것조차도 막막할 지경이었다.

“이번 싸움, 단순히 무림 대 무림의 전쟁이 아니야. 이번 전쟁의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바로 황궁일세.”

무림의 여론전을 우위로 이끌어 봤자, 황궁이 삼교 편에서 고개를 쳐들면 그간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황궁을 파고들지 않았는가?

‘말도 안 되지.’

그들은 무림인이다. 관림불침조약이 체결된 상황에서 섣불리 황궁에서 싸움을 벌였다간 나라 전체가 무림맹을 적으로 규정할 것이다.

삼교가 단숨에 황궁을 장악하지 않고 오랜 시간 암약하며 영향력을 키운 건 정통성이 주는 압도적인 힘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삼교가 무력으로 황궁을 점거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압승은 물 건너가게 된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궁의 존재 때문에 세작을 잡지 않고 허위 정보를 뿌리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자네 말이 맞네. 맹주가 있다면 또 모르되, 지금으로서는 무리야. 아니, 맹주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어도 그런 방법은 안 되지.”

“그러니 잡아야 합니다.”

“잡아야 하네. 다만 걱정이 될 뿐이야.”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잡긴 잡아야 하는데, 후폭풍이 어떻게 불어닥칠지를 모르니 고민이라는 것이지.”

고작 세작 하나 잡는데도 전면전을 상정해야 한다.

이 싸움은 그런 싸움이었다. 신화교의 무장들을 남몰래 몰살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인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어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군사님.”

“말씀하시게.”

“세작은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요.”

“자네 말이 맞네. 맞는데…….”

“나중이 걱정이라는 군사님의 말씀 또한 충분히 이해합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선공을 가할 수밖에요.”

“음? 무슨 말인가?”

“조금 전, 제가 말씀드렸지요? 여론전의 승패는 대개 누가 선수를 치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그랬지.”

“…….”

“자네 설마?!”

“예.”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고작 세작 하나 잡는다고 거기까지 고민하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 일 아닙니까?”

“……!!”

“나중에 대마 싸움을 벌이든 말든, 일단은 귀퉁이의 몇 집부터 얻어 두고 시작하시지요.”

“그건 너무 위험해!”

“위험하고 말고요.”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해도 위험하고 안 해도 위험하다면,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조성해서 뒤통수를 갈겨 버려야지요. 그래야 다른 생각을 못 할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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