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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75화 (474/963)

475화. 무림맹에서 (9)

두 사람의 술자리는 자정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연호정이 돌아가고, 모용군은 홀로 앉아 남은 술을 마셨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지만, 취기는 돌지 않았다. 전신에 뇌기가 돌아 순간순간 주기(酒氣)를 태우는지라 그조차 억누르며 마셨지만, 그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았다. 그간 정치와는 담을 쌓은 채 무공 수련에만 힘을 쏟아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냉정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화냐?”

“네, 아버지.”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모용연화가 들어왔다.

“술자리는 잘 끝나셨어요?”

“그래. 오랜만에 녀석 얼굴을 보니 아주 좋더구나.”

“호호, 그렇게 싫어하시면서도요?”

“싫지만, 또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아. 아닌 말로, 당대 연호정만큼 뛰어난 인재가 또 어디 있겠느냐? 몇 번 패배의 쓴맛을 보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좋은 승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알았기에 모용연화는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에게 몇 번을 졌는데도 저런 생각을 한다? 보통 그릇으로는 갖기 힘든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연호정과의 승부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만큼 약한 분이 아니었다.

“너도 한잔하겠느냐?”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좋지요.”

그녀가 빈 잔을 들어 보였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녀석이 마시던 잔 아니더냐? 새 잔으로…….”

“괜찮습니다.”

“음?”

모용연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연호정이 마시던 잔이면 어떻고, 묵룡부주가 마시던 잔이면 어때요? 거지가 마시던 잔이면 어떻고, 살수가 마시던 잔이면 또 어때요.”

“…….”

“잔은 잔일 뿐입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잔은 잔일 뿐이지.”

그렇게 부녀가 잔을 부딪쳤다.

“백주네요?”

“쓰지? 하지만 마시다 보니 나름의 매력이 있더구나. 물론 자주 찾진 않을 것 같다만.”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취하고 싶을 때 찾으면 될 것 같군요.”

“허허허.”

모용군이 물었다.

“이왕지사 자리가 이리되었으니 묻겠다.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냐?”

“글쎄요.”

모용연화가 빙긋 웃었다.

“이런저런 고민은 많았지만, 왠지 이제는 할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모용군이 제게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것이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정말 귀신이 다 됐구나.”

“아직 멀었지요.”

“광동에 가서 뭣 좀 알아보고 오거라.”

모용연화의 눈이 빛났다.

“연 대수와 관련된 일인가요?”

“그렇다.”

“어떤 일이지요?”

모용군은 연호정이 해 주었던 말을 그대로 모용연화에게 전했다.

모용연화의 눈이 깊어졌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지나가듯 말했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물론 지나가듯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굴었지. 하지만 이 애비가 보았을 때, 연호정의 얘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관리를 어찌 회유했는가이다.”

“연 대수의 성격상 그 부분을 빼놓고 얘기할 리가 없다는 것이군요.”

“잘 보았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연호정 홀로 관리들을 회유했을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뭔가가 있다면, 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모용연화가 눈을 빛냈다.

“집중하지 않을까요?”

“음?”

“당장은 아니더라도 제가 무림맹을 떠나면, 연 대수 역시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아니, 녀석이라면 분명 나름의 대응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하면…….”

“그래. 내가 진정 너에게 바라는 것은, 녀석의 대응 방안조차도 뚫고 들어가 정보를 얻어 오는 것이다.”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가능하겠느냐?”

모용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해 보겠습니다.”

“허허허!”

모용군이 품에서 작은 철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대군패다. 본가에도 따로 연락을 취해 놓으마. 이것이라면 본가의 주요 병력과 정보력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모용연화가 격동에 찬 눈으로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도 어려울 수 있는 일이다. 차라리 묵룡부주가 상대라면 더 쉬울 게야. 그이는 정치를 아니까. 하지만 연호정은 한계가 없는 놈이다. 이번 일, 정말 위험할 것이야.”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에요.”

“허허.”

모용군이 그녀의 잔을 채워 주었다.

“한잔하거라.”

시원하게 잔을 비운 모용연화가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움직여 보겠습니다.”

“벌써?”

“허를 찔러야지요. 연 대수가 모르도록, 알아도 나중에야 알 수 있도록이요.”

모용연화가 절을 올렸다.

“무사히 다녀올게요, 아버지.”

“오냐. 몸 성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네.”

“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모용군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자, 그 안에 작은 서신 하나가 꽂혀 있었다.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미리 적어 둔 것이다.”

“……?”

“이것을 우에게 전해 다오. 직접.”

모용연화의 눈이 빛났다.

“네!”

잠시 후, 모용연화가 방을 나섰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쉰 모용군이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낫지.”

광동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연호정이 관리를 설득한 방법은 무엇인가?

‘궁금은 하다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분명 궁금한 사안이었다. 연호정은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해서 알아내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대국에 영향을 줄 정도의 비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용연화를 보낸 것이다.

‘세작 색출 과정에서 연화는 오히려 짐이다.’

천하의 무림맹 봉공을 세작으로 만들어 버린 놈들이다.

어떤 위험천만한 수법이라도 쓸 수 있다. 모용군은 그 불길한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니 연호정이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보고, 모용우와 관계를 개선토록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지금의 모용연화라면, 모용우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후우.”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간만에 심장이 뛰는구먼.”

* * *

“허억! 허억!”

파군각으로 돌아온 연호정은 꽤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왔느냐?”

연위는 담담한 얼굴로.

“헉헉, 오셨습니까?”

강량은 죽어 가는 얼굴로 물었다.

연호정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랍니까?”

“수, 수련이요.”

초주검이 다 됐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겠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부들거리는 무릎과 검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손을 보면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싶었다.

연위가 웃으며 납검했다.

“이 정도로 하자.”

“예, 수고하셨…….”

강량은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기절한 것이다.

연호정이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상대해 주신 겁니까?”

“그렇다.”

“독하지요?”

연위가 눈을 빛났다.

“굉장하더구나. 잘 단련되었다는 거야 한눈에 알아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心), 신(身), 기(氣) 어느 한 부분도 극에 이르지 않은 데가 없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균형을 무너트리는 행위인데, 그런 것을 겁내지 않아. 다소 위험할지언정 성장은 누구보다 빠를 것이다.”

쓰러진 강량을 보는 연위의 얼굴에 기특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장차 위대한 검호가 될 것이다. 이런 인재의 토양에 조금이나마 거름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지나치게 겸손하신 발언이군.

“그나저나, 너는 어떠했느냐?”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딱 기대했던 만큼의 술자리였습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고 좋던데요?”

연위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웃는 얼굴로 비수를 찌르는 사람이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절대 방심은 말아라.”

연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다. 그런 걸 보면 모용군도 참 대단한 인간이구나 싶었다.

“절대 방심하지 않지요. 방심하기에는 그 양반, 많이 발전했던데요?”

“그러냐?”

“예. 솔직히…… 아버지와 거의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씩 회의에서 볼 때마다 달라져 있더구나. 그이도 피를 토하는 노력의 연속이었을 것이야.”

“그랬을 겁니다. 충격을 많이 받았겠지요. 새외 무림을 증오하는 사람이야 많지만, 모용가주의 분노는 정도를 넘었습니다.”

“그래 보인다.”

“천하게 여겼던 자들이 자신보다 강한 무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모용군은 큰 모욕을 느꼈을 겁니다. 어쩌면 아버지만큼 노력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천하다…….”

그 말을 가만히 곱씹던 연위가 탄식을 토했다.

“그들이 어찌 천하다고 할 것이냐? 세상에 천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터전을 짓밟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고, 이념과 평화의 싸움이다. 그들의 침공으로 인해 불과 죽음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터전과 민중을 지키기 위해 칼을 뽑아야 마땅한 것.”

연위가 강인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이 애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싸움에서, 절대 그들을 천하다고 생각지는 말아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을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호정이 서슬 퍼런 웃음을 지었다.

“이 싸움은 신분이나 귀천의 문제가 아닙니다. 침략자와 지키는 자들 사이의 투쟁이지요. 그들의 이념과 광신은 눈 뜨고 봐 줄 수 없는 것이지만, 저는 그들을 다르다고 생각할 뿐 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이다.”

결국은 적일 뿐이다. 천하다고 여기면 어쩔 것이고, 바보라고 여기면 또 어쩔 것인가? 어차피 죽여 없애야 할 적이거늘.

하지만, 연위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천한 사람은 없다. 각자의 위치가 다르고 사상이 다를 뿐이다. 연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호정은 아버지의 저 마음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고 있었다.

‘정의(正義)다.’

정의란 진리에 맞는 도리를 뜻한다.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범죄를 저지른 자,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악인(惡人).

연호정은 그런 놈들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라고 생각할 뿐이다. 천하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미친놈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연위는 달랐다.

제아무리 죽을죄를 지었어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면 벌을 받아야 한다.

정의가 있으니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보며, 정의가 있으니 신상필벌도 확실하다.

연호정은, 그런 아버지의 신념이 진실로 자랑스러웠다.

“그나저나, 일단 이놈부터 옮겨야겠습니다.”

연위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어서 옮기자.”

“응차.”

강량을 들쳐 멘 연호정을 보며 연위가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무슨 준비 말씀이신지요?”

“네가 무림맹으로 온 이유가 있지 않느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마음의 준비는 됐고, 내일부터 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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