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무림맹에서 (8)
모용연화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오랜만이군.”
다시 만난 연호정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볼품이 없었다. 옷은 걸레처럼 찢겨 있었고 머리도 산발이었으니까.
하지만 특유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너무 깊고 맑아서 오히려 서늘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눈.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내가 낱낱이 들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용연화는 심경을 숨기며 포권을 취했다.
“의정군장 연 대수를 뵈어요.”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식사는 하였느냐?”
“네, 아버지.”
“귀한 손님이시다. 아랫것들에게 술상 좀 봐 오라고 전하거라.”
“네.”
“너도 한 자리 끼겠느냐?”
모용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 같은 송충이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 하도록 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모용연화가 방을 나갔다.
모용군이 피식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상당하군.”
“음? 뭐가 말인가?”
연호정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겸손해진 것 같진 않지만, 예전보다 훨씬 까다로운 사람이 된 것 같소.”
“딸내미?”
“그렇소.”
연호정의 맞은편에 앉은 모용군이 식은 차를 따랐다.
“세상을 알기 시작한 게지. 천재와 괴물이 많다는 걸 인지한 게야.”
“인지는 누구나 할 수 있소. 중요한 건, 내가 그들보다 나은 구석이 없다는 걸 인정하느냐인데.”
“그 또한 인정했지.”
“쉬운 일이 아니오.”
“쉽지 않은 일을 성공시킬 줄 알아야만 발전하는 법 아니겠나.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한 발을 내디뎠다는 게 중요하겠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새끼 여우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제법 송곳니도 감출 줄 알게 되었나.’
성장은 이쪽만 하는 게 아니다. 다만, 같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장의 폭이 결정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용연화 역시 지난 시간을 허투루 쓴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의 그러한 모습이 연호정에게는 썩 달갑지 않았지만.
잠시 후,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백주(白酒)로군.”
“자네가 좋아하는 술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 가주에겐 어떨는지 모르겠소.”
“자네가 그리 마셔 대기에 나도 손을 대어 봤지. 처음에는 마냥 독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나도 제법 즐긴다네.”
“그렇구려.”
“자, 한 잔 받게.”
두 사람이 서로의 잔을 채워 주었다.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로 건배 한번 할까?”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구려.”
쨍.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뭐가 말이오?”
“내가 술에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그리 넙죽넙죽 마시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만나자마자 해야 한단 말이오?”
“허허허.”
“그런 저급한 술수나 쓰는 사람들 아니잖소, 우리?”
“그리 말해 주니 참 고맙군.”
이 또한 진심이 아니었다.
정치 싸움에 정정당당이 없는 만큼, 술잔에 독을 바르는 것 역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모용군 역시 그렇게 해서 연호정을 죽일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발랐을 것이다. 그건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통하지 않는 수는 과감하게 배제한다. 오랫동안 부딪쳐 온 사이이니만큼, 둘은 서로를 잘 알았다.
적어도 바둑과는 다른 것이다.
“오자마자 비무라도 한 모양이군.”
“그렇소.”
“연가주와?”
“여전히 큰 벽이 되어 주시더이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역시 그런가.’
봉공회의 때 몇 번이고 만난 사이다. 대화가 많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모용군은 내심 연위에게 크게 놀랐다. 회의에서 만날 때마다 사람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보다는 아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놈보다 강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래는 아닐 것이다.
말인즉, 지금의 자신과도 차이가 없다는 뜻.
‘이놈이 맹을 비운 동안 군사와 힘을 합쳐 머리나 굴릴 거라 생각했거늘, 그게 아니었어.’
모용군은 알고 있었다. 자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성장을 위해서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
그야말로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시도 때도 없이 겪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수도 없이 이겨 낸 끝에 지금의 위치에 올랐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노력이 있다 한들, 성장은커녕 퇴보할 수도 있는 것이 그들의 영역이었다.
‘천부의 재능, 피땀 가득한 노력, 거기에 천운까지 있었을 것이다.’
모용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천재와 괴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라…… 그 말, 나 역시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
모용군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깨달음 외에 뇌정공과 무정천뢰식이라는 상고 무공 덕분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격렬하고 파괴적인 기(氣)가 바로 뇌기(雷氣)다. 그러한 뇌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내공을 불리는 그의 무공은 다른 무공과 발전의 방법이 달랐다.
깨달음을 얻어야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듯, 내공의 질과 양이 상승한다고 꼭 강해지는 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내공의 증대와 무학 자체의 성취만으로도 지고의 깨달음을 얻은 고수를 상대하거나 이길 수 있다.
모용군은 두 가지 발전 방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른 무인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달리 생각하면 더 편할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자네들 부자는 참으로 대단하이.”
“칭찬 고맙소.”
“뭐,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모용군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땠나? 광동에서의 일은.”
“회의에서 이미 보고를 받지 않으셨소?”
“나는 무림맹의 봉공이 아닌, 일시적 동맹을 체결한 전우(戰友)로서 묻고 있는 걸세.”
전우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삼교를 향한 모용군의 증오는 무서울 정도다. 어찌나 그들을 증오하는지, 맹주 선거를 뒤로 미뤄서라도 놈들을 척결하려 할 정도였다.
이 증오와 맹목적인 살의는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이 자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방패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예전보다 모용군을 신중하게 대하는 이유였다.
“일단 양천의 제자로 꾸민 홍관이라는 자는 사음교에서 보낸 세작으로, 이름은 야율적이었소.”
연호정은 광동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일 처리는 어떻게 했는지를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물론 광동 불산에 불문의 노승들이 기거한다는 사실은 빼 버렸다. 공공대사가 그에 관한 얘기를 이미 해 줬을지도 모르지만,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괜히 말해서 공공대사를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음, 그랬군.”
모용군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잘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네만, 정말 제대로 박살을 내 놨군. 잘했네.”
적어도 지금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진 않았소. 광동이 제대로 안정이 되어야 이 임무가 끝이 나는 거니까.”
“잘될 걸세.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는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용군.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의문에 휩싸였다.
‘다 털어놓지 않았어.’
모용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연호정이 광동에서 벌어진 일을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하긴,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자신이라도 그리했을 테니까.
다만, 개인사 외에 사건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얘기했어야 할 몇 군데가 비어 있음을 알아챘다.
예를 들자면, 광동의 고위 관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광동의 좌포정사는 무림 집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른 지역은 몰라도, 광동성의 승선포정사사 일을 처리하려면 절대적으로 능력이 필요하다. 뇌물을 바쳐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용군 역시 이번 출정 전에 광동성 좌포정사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했더랬다.
‘무력으로는 절대 회유할 수 없는 종자다. 무림인이라면 뇌물도 통하지 않아. 자존심이 강한 자가 분명해.’
그런 자를 어찌 회유했을까?
‘설마 이 녀석, 관부와 따로 연줄이 있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모용군은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다.
연호정이 제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삼교의 끄나풀을 처리하고 광동의 민심을 바로잡는 와중에 관부와 연줄까지 만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은 능력 이전에 시간의 문제였다. 천하의 연호정이라도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내서 관부에 줄을 댈 순 없을 테니까.
‘아니면, 그전에 관부와 연이 있었던 걸까?’
그 또한 회의적이다. 만약 그랬다면 신화교의 무장들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도지휘사를 만나는 일에 굳이 자신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 공과는 나름의 인연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모용군은 거의 확신을 내렸다.
‘관부 측과 연결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내게 말하지 않은 방법으로 좌포정사를 회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마음과 달리, 모용군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우는 어떤가?”
“탕마군장 말이오?”
“그렇다네.”
“건강하오. 누구와는 다르게 사람이 착하고 건실하더이다.”
“허허허, 녀석이 제법 수더분하지. 어느 자리에 앉아도 제 몫을 할 녀석이라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무림맹주 자리에 앉아도 제 몫을 하겠지.
“앞으로 탕마군장과는 여러 일을 하게 될 것 같소. 잘 부탁드리오.”
“허! 그런 말은 우에게 해야지, 어찌 내게 하는가?”
“당신 동생인데, 제아무리 건실한 사람이라도 형님의 말을 무시할 수 있겠소? 하물며 가주이기까지 한데.”
“허허허.”
괜스레 마음이 좋아졌다.
적어도 모용우를 향한 연호정의 평가는 진심이었다. 모용군 역시 그것을 읽었기에 사심 없이 웃어 줄 수 있었다.
“자, 한 잔 더 하세.”
“그럽시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잔을 비웠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제법 불콰해진 얼굴로, 모용군이 물었다.
“생각해 본 바가 있는가?”
“무엇을 말이오?”
“사람 참. 자네가 광동의 일을 우에게 맡겨 두고 먼저 맹으로 온 이유가 달리 있는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세작 말이로군.”
“그렇다네.”
음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세작이라는 단어가 입에 오른 순간 모용군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벌레 같은 놈이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놈이야. 한 문파의 문주들이 그리 많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 그건 정말 쉽지 않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그 압박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정신력 하나만큼은 누구 못지않을 것이다.
“벌레 같은 놈이 될지, 놈들이 될지는 아직 모르잖소?”
모용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한 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가능성은 열어 둬야 한다고 생각하오. 다만, 둘 이상일 확률은 낮다고 보고 있소.”
“그렇겠지.”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모용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떻게 잡을 생각인가?”
이번 세작 축출 작전에 주역은 없다. 모두가 뛰어들어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연호정의 지혜는 다른 사람과 궤를 달리했다. 들어서 나쁠 게 없는 것이다.
연호정이 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잡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석하기에 앞서 어디부터 접근해야 할지는 생각했소.”
“말씀하시게.”
“과거를 캐내야지.”
모용군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그건 당연하지 않나? 실제로 등천교, 그 머저리가 폭탄 발언을 터트리기 전까지 제갈 군사가 봉공들의 뒷조사를 감행했네.”
“그런 수준이 아니오.”
“하면?”
“입문 시기 전까지.”
“……?!”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턱을 괸 연호정의 눈이 유독 투명해 보였다.
“언제 입문해서, 어떤 무공을 익혀 왔고, 누구와 만났으며, 어떻게 장문인이 되었는지. 그 모든 내력을 샅샅이 파악해야 할 것 같소.”
“그 말은?”
“그렇소. 문파에 입문하기 전,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삼교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