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무림맹에서 (7)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강량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연씨 부자를 보았다.
“바쁘신가 했더니, 두 분이서 어디 전쟁터라도 다녀오신 겁니까?”
연위와 연호정은 무척이나 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 여기저기가 터지고 찢어졌는데, 과장되게 말하면 저잣거리의 거지만도 못한 외양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지, 아직도 얼굴이 붉었다. 숨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초절정의 고수, 그것도 무신의 경지를 눈앞에 둔 진짜 고수들이 아직도 호흡을 고르지 못했다. 그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뜻이리라.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별 탈은 없었느냐?”
“덕분에요.”
“호정도 호정이지만, 너도 정말 많이 늘었구나. 예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아.”
백도 정파에서 연위만큼 정통적인 무도를 걷는 자는 많지 않다. 어중간한 단련으로는 받기 힘든 칭찬이었다.
강량이 묘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저야 형님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입니다. 그나저나, 승패는 어떻게 갈렸습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승패를 가르는 비무는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제대로 된 일격은 허용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단순히 아버지를 치켜세우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연위의 무공에서, 아버지가 그간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해 오셨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변화한 모습은 단순히 더 강해졌느냐, 경지를 올렸느냐 따위로 평가할 만한 게 아니었다.
‘정말이지 엄청났다.’
무공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변화의 폭이 연호정을 경악게 했다.
‘아버지는 중원의 정통 검술에 획을 그으실 분. 한데 지금은 달라. 더 깊어지는 것을 멈추고 더 방대해지는 길을 택하셨다.’
어느 길이 더 효율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틀을 깨 버렸다는 것에 있었다.
고지식함으로는 누구 못지않은 분이 아버지다. 한데 그런 아버지께서 연가의 무공을 몇 번이나 버려 가면서 검학의 한계를 넓혔다.
그 성격에 그러한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길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을 수도 없이 느끼셨을 것이다.
한번 빠지면 벗어날 수 없는 충격의 늪.
아버지는 그러한 늪에 몇 번이나 빠졌고, 몇 번이나 빠져나오셨다.
‘본가의 검법답지 않게 패도적인 검술, 거기에 전장의 검도(劍道)처럼 사나운 난검과 쾌검까지도 아우르셨다. 단순히 구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방면에서 달인이 될 정도로 연마하셨어.’
연가의 무공은 절제와 중도를 중시했다.
하지만 이번 대결에서, 아버지는 파격과 극단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고 연가의 무공을 버렸느냐? 그것도 아니다. 연가의 무공을 토대로, 강호의 닳고 닳은 낭인보다 독랄한 검술을 구현해 내신 것이다.
연가 무공의 화신(化身)이라 불리어도 무방할 한 명의 검사가, 이제는 검(劍)의 화신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부끄럽구나.’
창의적인 무공 구현, 극에 이른 실전 감각으로 사고의 확장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내심 자부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보니, 자신은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계 없이 달렸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는 과거에 이뤄 놓은 노력에 기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연호정이 웃으며 연위를 보았다.
“아버지 덕분에 나아갈 길이 보입니다. 적어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강량이 진저리를 쳤다.
“도대체 또 뭘 어쩌시려고요? 따라잡으려고 해도 너무 빨리 달려 나가시니 자꾸만 김이 새지 않습니까.”
“내 길은 내 길이고, 네 길은 네 길이다. 누구 하나 따라잡자고 연마하는 무공이 아니잖느냐?”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번씩 힘이 빠집니다.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강량의 반응과는 달리 연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나 역시 네게 배운 것이 적지 않다.”
“배우다니요. 이런 막무가내 무공에서 뭘 배우십니까.”
“넌 충분히 훌륭한 무인이다. 애비라고 아들에게 배우지 못할 까닭은 없다. 네가 나로 인해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너의 무공을 보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쑥스럽습니다. 다행이기도 하고요.”
“애비로서 아들의 성장이 기쁘기 그지없지만, 무인으로서 나는 아직 한창이다. 더 크게 성장하여 너를 가로막는 벽이 되어 줘야겠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부분은 정말 변함이 없으시다. 그런데도 구사하는 무공은 그렇게나 변했다. 그래서 더 대단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무공이 변하면 성격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여전히 중도를 지키는 아버지의 심공(心功)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합니다.’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목욕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두 분 다 씻으세요.”
“됐다. 직접 하면 되지 뭐 하러…….”
“됐으니까 기다리십시오. 저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량은 대답도 듣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연위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코앞에 도달했구나.”
“량이 말입니까?”
“그래. 기실, 지금 당장이라도 벽을 뚫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놈도 욕심쟁이라, 얻을 건 다 얻고 나서 다음으로 나아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경지에 연연하지 않는 것, 너보다 어린데도 여유를 아는구나. 저런 면은 배워야 한다.”
“예, 그러겠습니다.”
모든 것이 배움이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자신보다 어리다고 배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결국 인생이란 나 자신을 완성하는 여정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할 길에서,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훅.
멀리서부터 한 줄기 강렬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연호정이 담담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고 오겠습니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구나.”
“맹에 들어온 이상 자주 부딪쳐야 할 사람입니다. 인사 정도는 해 둬야지요.”
“량이에게는 말해 두겠다.”
“예. 저녁은 먼저 드십시오. 저 양반한테 좋은 거나 얻어먹어야겠습니다.”
연위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너는 참 속도 좋구나.”
“적이 차려 주는 만찬만큼 맛있는 게 없는 법입니다. 아버지도 나중에 시도해 보세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다녀오너라. 네 복귀는 따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연호정이 파군각을 나섰다.
잠시 후.
“후우, 목욕물 다 받아 놨…… 어? 형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잠깐 사람 좀 만나러 갔다.”
강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양반이…… 기껏 목욕물까지 데워 놨더니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예? 아,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필요는…….”
“이왕 목욕물을 받아 놨으니, 하나는 네가 쓰도록 해라.”
“저는 이미 씻었는데…….”
“그럼, 다시 씻어야 할 상황을 만들어 보도록 할까?”
연위가 검집을 톡톡 건드렸다.
“목욕물이야 조금 식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당황한 눈으로 연위를 보던 강량이 결국 못 말린다는 듯 웃어 버렸다.
“형님의 그 기질이 어디에서 이어졌는지, 오늘에서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어느새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붉은 하늘을 보며, 모용군은 생각했다.
‘참으로 아름답군.’
산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는 태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시뻘건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즈넉한 풍경이다. 빠져들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저 석양이라는 바닷가로 뛰어들어 헤엄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는데, 내 하루는 이제 시작이로고.’
모용군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새 그의 곁으로 온 연호정이 나란히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뭘 물은 건지 모르겠지만, 참 보기 좋은 풍경이외다.”
“정확하게 보았네. 저 석양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것을 묻고 싶었어.”
모용군이 고개를 돌려 연호정을 보았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네, 좀 컸나?”
“내 싸가지야 언제나 성천십삼좌급 아니오?”
“그 말이 아닐세. 키가 조금 큰 것 같은데?”
“그렇소? 난 잘 모르겠소.”
가만 보니, 키가 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덩치가 더 커진 것도 아니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강해졌다.’
존재감이다. 더 단단하고 풍성해진 존재감이 연호정을 커 보이게 하는 것이다.
‘성장해서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발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경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연호정이 출맹한 뒤, 모용군 역시 뼈를 깎는 수련을 지속했다.
아니, 신화교의 무장들과 싸운 이후 모용군은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쳤다. 변방의 천한 오랑캐 놈들의 무공이 자신을 앞선다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목숨을 내던진 수련. 극한에 이른 수련으로, 모용군 역시 예전보다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 폭만 따졌을 때는 연호정에 비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녕 승패를 논하기가 힘들겠군.”
“귀하와 말이오?”
“그렇다네.”
“예전에는 아니었소?”
“아니었지.”
진심이었다. 사투를 벌인다고 가정했을 때,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자신의 필승이라고 자신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자신과 연호정 간의 격차가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의 위력이나 속도를 넘어선, 찰나의 선택으로 승패가 갈릴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정말 무섭구나.’
연호정을 보는 모용군의 눈이 점점 차가워졌다.
이놈의 재능과 노력이라면 십 년 내에 천하를 논할 만한 고수가 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그 십 년이라는 세월조차도 너무 길게 본 것 같았다. 십 년이 아니라, 절반인 오 년 안에 천하에서 손에 꼽힐 기량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듯싶었다.
물론, 앞으로의 길은 지금까지의 고난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겠지만.
“벌써 시작이오?”
“음?”
“눈에서 고드름이라도 나오겠소. 그렇게나 날 잡아먹고 싶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후학들에게 큰 자랑이 되겠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잊지 마시오. 나나 당신이나, 아직은 서로를 잡아먹을 때가 아니오. 상대방한테 신경 쓰다가 들이닥치는 폭풍에 가산을 탕진하지 말란 말이오.”
삼교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는 따로 승부를 내야지. 그 승부처에 잡소리가 나는 건 별로야.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을 봐야겠지.”
“옳은 생각이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호정은 모용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정정당당이라는 네 글자가 어울리지 않는 싸움이었다. 자신이나 모용군이나, 깨끗한 싸움에 목숨 걸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또 시작이군.’
모용군을 보면 좋은 점 하나, 자연스레 긴장할 수 있다는 것.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저녁은 자셨소?”
“자네랑 먹으려고 군사와의 대담도 뿌리쳤다네.”
“군사님이 질투하시겠군.”
“자네를 질투할 정도면, 군사도 보통 사람은 아니야. 나 같으면 질투도 안 날 것 같거든.”
“오랜만에 봤다고 이런 덕담을 다 해 주시고, 참 많이 변하셨소.”
“신소리는 그만하고, 슬슬 자리를 옮길까? 회포는 술로 풀어야지 않겠나.”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 술로 풀어야지.”
혈육과는 검으로 풀고 적과는 술로 푼다.
그렇다. 그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