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무림맹에서 (6)
오랜만에 돌아온 파군각 숙소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깔끔했다.
강량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정리가 잘 되어 있군요.”
“그렇군.”
“가주님께서 매일 청소하셨겠지요?”
“그러셨겠지.”
“가주님도 참, 이런 건 하인들에게 맡기시지.”
“정 바쁠 때면 모를까, 어지간해선 직접 하시는 분이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숙소에서 아버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나가신 모양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쉬어라.”
“형님은요?”
“상부에 보고해야지. 돌아왔다고.”
강량이 피식 웃었다.
“정말 체력도 좋으십니다. 그럼 저 먼저 쉽니다.”
“그래.”
다시 파군각에서 나온 연호정은 군사부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기세는?’
그가 고개를 돌렸다.
파군각에서 제법 떨어진 곳, 주변에 건물이 없는 벌판에서부터 쏘아진 기세가 연호정에게 닿고 있었다.
그 거리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굉장한 내공 조예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연호정조차도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훅!
힘차게 땅을 박찬 연호정이 기세가 부르는 곳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연호정, 마지막 한 걸음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그 들판 한가운데.
가부좌를 튼 한 명의 검사가 있었다.
휘리리릭!
땅으로 내려선 연호정이 검사와 삼 장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때, 눈을 감은 검사가 물었다.
“광룡은 두고 왔구나.”
“그렇습니다.”
“분신과도 같은 병기일진대, 어찌 그것을 수하들에게 맡겨 두고 왔느냐?”
“손이 가질 않아서요.”
“벌써부터 병기에 소홀하니, 참으로 걱정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처음엔 심검(心劍)에 오른 건 아닌가 기대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병기에 마음이 떴다고 꼭 심검에 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심검이 아니라 한들 가치 없는 깨달음도 아닐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깨달음의 실체를 보진 못한 것이냐?”
“예.”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나와 함께 확인해 보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번쩍! 콰아앙!
어느새 흑백쌍룡을 뽑아 든 연호정이 검사가 서 있던 곳을 후려쳤다.
어찌나 위력이 강했는지, 참격임에도 충격파 때문에 반경 일 장이 넘는 범위의 땅이 통째로 뒤집혔다.
“너답다.”
후우우웅.
하늘 높이 떠오른 검사, 연위의 맑은 눈이 연호정에게 닿았다.
“자, 그럼.”
차아아아앙!
힘차게 검을 뽑은 연위의 신형이 일순 벼락처럼 움직였다.
허공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발판을 딛고 무서운 속도로 쇄도한다.
그 속도는, 연호정조차 회귀한 이후 처음 봤을 만큼 빠르고 격렬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일호무장 번작이 떠오를 정도였다.
두 사람의 검과 도끼가 부딪쳤다.
쩌어어어엉!
무형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들판의 잡초들을 마구 찢어발겼다.
“역시나 힘이 좋구나.”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구 아들인데요.”
치리리링!
도끼를 십자(十字)로 교차하며 발경을 터트리니, 연위가 저 멀리 뒤로 물러났다.
발경 폭발, 폭경이다. 상대의 무기를 깨부술 수도 있는 위력이었지만 연위의 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연위가 힘차게 일 보를 내디뎠다.
쿠웅!
그답지 않은 강렬한 진각.
뒤이어 연위의 검이 화려한 광채를 뿜었다.
번쩍! 콰아앙!
오 장 거리를 격하고 뿜어진 검기가 연호정의 쌍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연호정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강하다!’
강검(强劍) 중의 강검이다. 아버지답지 않게 거칠고 파괴적인 위력의 검기였지만, 그 속에는 정통 검술의 정제된 진기와 발경 구결이 가득하다.
무서운 일검이었다. 연호정은 아버지의 검력에 깜짝 놀랐다.
‘성장하셨다. 예전보다 더!’
자신의 발전 속도가 빠른 건 당연했다. 이미 겪어 본 경지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발전 속도가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이미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룬 무인이, 고작 몇 개월 만에 이토록 수준 높은 경지를 개척하는 일은 정말 드물다.
‘느껴져. 아버지의 노력이.’
엄청난 검기 일격에서 느껴지는 노력의 역사.
이 정도 경지에 오르시기까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적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파아악!
무섭게 거리를 좁힌 연위가 벼락처럼 삼검(三劍)을 휘둘렀다.
평범한 철검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장인의 심혼(心魂)이 깃들지 않은 철검인데도, 그와 같은 속도와 내력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흑백쌍룡부가 바쁘게 움직였다.
쩌저저정! 쩌저저저정!
삼검에서 끝이 아니었다. 삼검은 하나의 술식일 뿐, 그 식이 끝나니 사검(四劍)이 몰아치고, 사검이 끝나면 오검(五劍)이 뒤따랐다.
초반 검기가 강검의 절정이었다면, 지금의 연환검은 쾌검(快劍)의 정수였다. 이처럼 빠르게 휘두르면서도 정확한 위치에, 흔들리지 않는 검력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강하고 빠르다. 연가 정통검법의 틀을 깨부수는 아버지의 새로운 힘이 거기에 있었다.
후우우우웅!
아버지께서 이룩한 경지가 놀라웠지만, 연호정이라고 그저 놀라고만 있진 않았다.
치리리링! 치리리리링!
검을 쳐 내는 흑백쌍룡의 움직임도 연위의 쾌검과 어우러지며 점점 빨라졌다.
광룡부로는 구현할 수 없는 속도였다. 광룡부보다 훨씬 가볍고 짧은 손도끼이기 때문에 연위의 속도에 대응할 수 있는 것, 쌍룡부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몸을 빼고 허점을 노렸을 것이다.
파아아악!
연호정의 다리가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휘어 감아 으스러트리는 채찍 같은 각법이 연위의 왼팔을 노렸다.
찰나의 순간, 검을 회수한 연위가 왼팔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휘리리리릭!
다리를 휘감은 경력이 연호정의 몸을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단순한 금나수(擒拿手)를 내공을 이용,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의 기예로 승화시켰다. 초절정고수라도 입이 떡 벌어질 상상력이요, 기술이었다.
회전하던 연호정의 발이 공격적으로 뻗어 나갔다.
콰앙!
검배에 왼팔을 대고 막았지만, 그럼에도 충격이 다 해소되지 않는다. 연위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강하구나.’
대포알처럼 날아와 꽂히는 각법이었다.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신체의 중심을 틀어 온전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당황할 법도 한데 최선의 몸놀림으로 최상의 일격을 가해 온다.
아들의 실전 능력은 전혀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감각적으로 발전한 것 같았다.
파아아악!
자세를 바로 한 연호정이 즉각 공격에 들어갔다.
거리를 좁혀 야수의 송곳니와 같은 부법을 펼치니, 이것이 바로 백호공의 호왕구벽세(虎王九霹勢)다.
광룡부로 펼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똑같은 초식이지만, 더 빠르고 날카롭다. 심지어 두 자루를 다루는데도 초식에 파탄이 나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압감. 연위의 검이 절도 있게 움직였다.
쩌저저저저정!
도끼가 단호하게 움직였다면, 검은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철검대연삼십육식(鐵劍大衍三十六式), 연가의 비전 검법이자 연가검학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경전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그 검법이 사나운 호왕의 무공을 차근차근 무너트리고 있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감행해도 그에 맞는 대응을 선보일 수 있는 신기(神技)의 검법이었다.
‘안 되는군.’
호왕구벽세의 마지막 초식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섬세함을 잃고 있다.
완벽한 대응, 무공 구현을 근본부터 저지하는 군자의 검학이다.
이것을 모르고 계속 펼치다간 그대로 패배하게 된다.
연호정의 발이 힘차게 땅을 밟았다.
콰아아앙!
지진이라도 날 듯 울림 넘치는 진각은 연위의 그것보다 더 둔중했다.
번쩍! 쩌어어엉!
십자로 후려치는 쌍도끼의 참격이 연위의 검법을 잠시 봉쇄했다.
촤르르르르륵!
그 짧은 순간, 허공섭물의 기예로 상반신을 휘감은 교룡쇄를 움직인다.
철컥! 철컥!
흑백쌍룡의 손잡이 끝에 달린 고리에 엮인 교룡쇄.
연호정이 두 손을 크게 휘둘렀다.
쩌어어엉! 쩌어어엉!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기다랗게 늘어나는 철쇄, 그 철쇄에 연결된 흑룡과 백룡의 도끼날은 놀랍도록 넓은 공격권을 자랑했다.
그리고 강했다. 단순히 채찍처럼 쓰는 게 아니라, 휘둘러 내리치는 참격의 위력이 손으로 휘두르는 것보다 더 강했다.
‘속도는 더 느리다. 하지만 그것을 변화로 받쳐 주고 있어.’
쩌엉! 쩌어어엉!
어느새 아들과 거리가 벌어졌다. 검으로 흑백쌍룡을 차례로 후려쳤지만, 어느새 뱀처럼 구불거리며 다가온 도끼가 또다시 몸을 휘감으려 한다.
놀라운 수법, 창의적인 병기 운용이었다. 관계와 경지를 떠나, 연위는 연호정의 무공 구현에 경외감을 느꼈다.
‘더 넓은 시각, 더 창의적으로 무공을 구현하는구나. 참으로 대단하다.’
번쩍!
연위가 거리를 좁혔다.
거리를 좁혀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몸을 회전하며 철쇄와 쌍도끼의 폭풍을 일으킨다. 일정 이상으론 거리를 좁힐 수 없도록 만드는 과격한 몸놀림이었다.
연위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도끼와 철쇄를 후려치는 검이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가히 철옹성과 같다. 뚫고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연위는 어지간한 무인이 아니었다.
퍼어어어엉!
회전하는 방향으로 반룡장을 후려치니, 연호정의 회전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이것은 연호정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회전하는 힘을 더해 스스로 무너지게끔 만드는 기예, 사량발천근의 기예로 승화시킨 금나수만큼이나 인상적인 수법이었다.
연호정의 발이 땅에 박혔다.
콰콰콰쾅!
땅이 뒤집히며 회전이 늦춰지고, 그 틈을 노린 연위의 검이 연호정의 중단을 노렸다.
시기적절한 공격이었다. 어지간한 무인은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연호정 역시 어지간하지 않았다.
훅!
폭발하는 주작화기로 신체 반응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연호정, 순간적으로 상체를 눕히니 중단을 노린 검이 허공을 찌른다.
퍼어엉!
동시에 내뻗은 각법이 연위의 몸통 앞에서 발경을 터트렸다. 반격을 예상하고 반룡장으로 막지 않았다면 꽤 심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 사선을 걷는 무인으로서 연호정만큼 뛰어난 실전무도가(實戰武道家)는 달리 없을 것이다.
치리리리리링!
재차 거리를 벌린 연호정이 교룡쇄를 회수하고 다시 흑백쌍룡을 쥐었다.
연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들의 변칙적이고도 위력적인 무공에 그 역시 기세가 한껏 달아오른 것이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성장했구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영광입니다.”
언제 들어도 아버지의 칭찬은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누구에게도 인정받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인정은 아들을 들뜨게 하는 법이다.
후우우우우웅!
타오르는 투지가 부자의 기세에 더해지니,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상상을 초월했다.
연위의 눈빛이 바뀌었다.
“제대로 가겠다.”
연호정의 눈빛 역시 연위의 그것과 비슷해졌다.
“저도요.”
번쩍!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벼락처럼 움직였다.
참으로 무인다운 해후, 두 사람은 혈육이면서도 무인이었다. 서로를 인정하는 무가의 부자지간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비무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어떤 인사보다도 서로의 지난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연가 남자들만의 회포 푸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