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71화 (470/963)

471화. 무림맹에서 (5)

“허억! 허억!”

“이제 왔냐?”

양손을 무릎에 대고 헉헉거리는 강량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심호흡해라. 심폐 능력을 극한까지 쥐어짰을 때는, 오히려 심법 호흡보다 크게 들이쉬고 크게 내뱉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강량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뭐라 말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힘들다고 앉거나 눕지 마라. 일단 호흡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야.”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강량은 연호정이 시킨 대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호흡이 빠르게 잠잠해졌다. 호흡(呼吸)이야말로 내가기공(內家氣功)의 핵심인 만큼, 내가고수들의 호흡 조절 능력은 일반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다.

그걸 감안해도 강량의 호흡 조절 실력은 굉장한 편이었다. 육체 훈련의 끝을 본 연호정조차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후, 지는 거야 당연했지만.”

강량이 다리를 두들겼다. 정말이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군요.”

“귀영신보는 초일류의 경신술이다. 너는 너의 경지에서 도달할 수 있는 끝을 보여 준 거야.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무종지벽을 넘지 못하면, 어떻게 해도 형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건 또 다른 문제지. 귀영신보는 빠르고 변화무쌍하지만, 오로지 달리는 데에 초점을 맞춘 무공은 아니잖느냐?”

귀영신보가 초일류로 평가받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보법이기 때문이다.

워낙 걸출한 보법이라 신법(身法)으로도 활용이 가능하고 천하 어떤 경신술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작정하고 빠르게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신법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직접 개조해 봐. 속도를 위해 무공을 개량하는 것, 그것 역시 큰 공부가 될 거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체력 단련 하나는 제대로 했구나.”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무공은 몸으로 구사하지 않습니까. 몸이 완성되지 않고서야 지닌 무공의 끝을 볼 수 없지요.”

“정확하다.”

연호정이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두 시진을 넘도록 달렸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였다.

“일각만 쉬었다가 가자. 물 마셔라.”

“예.”

탈진할 때까지 달렸음에도 일각만 쉬자고 한다.

그러나 강량은 불평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공을 연성한 무인의 몸은 범부의 몸과 다르다. 게다가 이 또한 수련의 일면이라고 생각하면, 반 각만 쉰다 해도 군말이 없어야 한다.

입공(立功)으로 호흡과 내기를 조절하는 강량.

그런 강량을 흐뭇하게 보던 연호정이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하남을 통과했군.’

저 멀리 대별산맥이 보인다.

산맥을 넘어가면 이제 정말 무림맹이 코앞이다. 실제로 저 아래 저잣거리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파가 오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았다. 무림맹이 세워지고 그 주변 경제가 활성화되자, 자연히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이제 무림맹의 기반도 확실히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잣거리에 적들의 세작이나 연락책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세작이 있다는 확신만으로 적의 끄나풀을 찾는 것은 고단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미뤄 둘 수는 없다. 무림맹 내부의 정보가 시시각각 적에게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세작을 잡아내야 했다.

물론 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유를 부려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급한 일 처리로 세작이 꼭꼭 숨어 버리면 큰일이다.

‘대체 누구일까.’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 많은 봉공 중 누가 삼교의 세작일까. 아니, 세작이 한 명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

누가 됐든,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봉공 중에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 많다. 그런 거인(巨人)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상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세작 활동을 한다는 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당장 연호정 자신조차도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무공 외적으로, 자신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한 놈이다. 암살자보다도 더.’

암살자라고 하니, 사마현이 떠올랐다.

‘그놈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나와 함께하고자 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것인가.’

전생에선 사마현과 손을 잡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손을 내밀기도 전에 사마현은 암살계의 초거물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긴 해.’

야율적을 혼자 힘으로 죽이고 차세대 음신이 되어 암살계를 평정한 것이다.

비록 지금의 사마현은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의 잠재력 하나만큼은 가히 초일류라 할 만했다.

‘세상엔 천재가 이렇게나 많다.’

당장 강량이나 연지평, 묵비나 정안 등도 흔치 않은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런 재인들을, 나는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형님.”

“음?”

“일각 지났습니다.”

“아, 그러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랜만에 무림맹에 오니 가슴이 벌렁벌렁합니까?”

“오냐, 가슴이 너무 뛰어서 혈압이 다 오를 지경이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세작 잡을 생각에 군침이 싹 도나 보죠?”

“양념 제대로 쳐서 요리해 볼 생각이다.”

연호정이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자, 출발하자.”

“근데 형님.”

“왜?”

“광룡부는 왜 안 들고 오신 겁니까? 뭐, 흑백쌍룡도 있고 교룡쇄도 있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씩 이런다. 손에 익은 병기가 사라지면 불안해야 마땅한데, 또 어떤 때는 왠지 손이 가질 않아.”

강량의 눈이 빛났다.

“병기에 손이 가지 않는다…… 새로운 깨달음이라도 얻으신 겁니까?”

“몰라, 인마.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니라도 어쩔 수 없지. 손이 안 가는 걸 어쩌겠어.”

“저도 언젠가 검에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올까요?”

“모르지. 너와 난 익힌 무공도,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다르니까.”

연호정이 강량의 어깨를 두들겼다.

“광룡부가 있든 없든, 나는 내 무공의 십 할을 선보일 수 있다. 그거면 된 거야.”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작 잡는 데에 광룡부가 필요하진 않겠지요.”

“잡담은 그만. 출발하자.”

“좋습니다.”

파아아앙!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처음 달렸을 때처럼, 속도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신법으로.

‘손이 가지 않는다…….’

연호정의 등을 보며, 강량은 생각했다.

‘형님은 위대한 무인이다. 그런 무인이 분신과도 같은 병장기에 손이 안 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는 게 정상인데.’

그런데도 연호정은 광룡부에 손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만지기 싫다는 게 아니었다. 무인이 병장기에 손이 가지 않는다는 건,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는 과도기일 확률이 높다.

강량은 예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검사는 죽어도 검을 놓지 말라고들 한다. 그것은 일견 맞는 말이다. 검과 하나가 되어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사가, 검을 손에서 놓아서야 쓰겠느냐? 하지만 말이다, 언제고 깨달음이 깊어지면 검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도 온다고 한다.’

‘필요하지 않다고요?’

‘검을 쥐지 않아도 검법을 펼칠 수 있는 경지.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상대를 벨 수 있는 경지.’

‘……!’

‘그러한 경지가 고개를 쳐들 때, 그토록 위대한 경지를 맞이했을 때 병기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한다고 들었다.’

‘…….’

‘물론, 이 애비에게는 너무나도 먼 경지지만 말이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심검(心劍)……!’

연호정이 진정 심검지경에 진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이나 경지를 떠나, 연호정조차 확답을 못 하는 상황이니 심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길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그렇다면, 정말이지 연호정의 성장은 폭발적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한 것이리라.

‘형님, 어지간해선 이런 생각 잘 안 하는데…… 조금만 천천히 달리십시오. 지금도 쫓아가기 버겁습니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뭐 해? 자세 흐트러진다. 집중해서 붙어.”

강량이 피식 웃었다.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제가 따라붙어야지요.”

“뭐래.”

“걱정하지 말라고요.”

* * *

“흐음.”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묘수(妙手)로구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실 것 같았어요.”

“허허, 그럴 것 같았다? 네가 애비의 마음을 읽기 시작하는구나.”

모용연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많이 부딪쳐 본 적은 친구와 같다고 하였지요. 아버지의 습관을 살피기 시작하니, 나중에는 생각도 읽히더랍니다.”

“멋지다. 네가 애비보다 낫다. 나는 아직 너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데.”

모용연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왜 자신의 습관과 생각을 읽지 못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으시는 거지.’

모용군에게 있어 바둑은 생각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굳이 상대를 이기려 들지 않는다. 그날의 기분, 그날의 걱정에 따라 행마(行馬)를 다르게 두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 바둑판 위에서 아버지의 적은 자신이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 그 자신이 적이었다.

바둑판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모용군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졌다. 다음 수가 생각나질 않는구나.”

“제가 이겼군요.”

“그래, 네가 이겼다. 한데 이게 몇 집 차이냐?”

“여섯 집 차이입니다.”

“크구먼. 나도 나지만, 네 실력이 무섭게 늘었다.”

모용군이 돌을 치우며 물었다.

“어떠냐? 바둑을 두면서 느낀 바가 있느냐?”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지요. 바둑판 위에 세상이 있다고.”

모용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말 인생이 바둑과 같다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항상 적이 있어야 하니까요.”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바둑은 상대가 있어야만 둘 수 있지. 하지만 인생은 달라. 혼자서도 얼마든지 꾸려 갈 수 있다.”

“그래도 배운 건 많아요.”

“어떤 영역에서든 배우고자 한다면 못 배울 게 없는 법이다. 근래 네 무공이 크게 성장했던데, 바둑이 좋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구나.”

돌을 다 치운 모용군이 물었다.

“저녁에는 무엇을 하느냐? 시간이 있으면 간만에 애비와 밥이나…….”

그때였다.

“가주님.”

모용군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제갈 군사에게서 기별이 왔습니다.”

“만나자고?”

“예. 저녁 초대인 것 같습니다.”

모용군이 투덜거렸다.

“사람 참.”

모용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저는 혼자 먹어도 됩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그때, 문밖에서 다시 한번 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주님.”

“또 보고할 것이 남았는가?”

“……그가 왔다고 합니다.”

“음?”

“의정군의 대수, 연가의 장남이 방금 귀맹했다고 합니다.”

순간 모용연화의 눈이 차가워졌다.

모용군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드디어 왔구만.”

“따로 기별을 넣을까요?”

“되었다. 그이도 가족과 회포부터 풀어야 할 테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군의 눈빛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왔나?’

그와는 할 얘기가 많다. 여러 가지로.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 아니면 저녁 식사는 물러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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