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무림맹에서 (3)
두 부녀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아버지는 육안으로 딸을 바라보았고 딸은 심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륵.
당상아가 눈을 감은 채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푸스스스.
그녀가 내디딘 발밑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그것은 독이었다. 바닥에 스며든 독기를, 그녀가 걸음 한 번으로 해소해 버린 것이다.
무표정한 당관의 얼굴에서 은근한 대견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제대로 하는군.’
당상아가 증발시킨 것은 바로 귀선호(鬼仙呼)라는 극독이었다.
귀선호. 귀신 붙은 신선이 불어넣은 독이라는 뜻이다.
휘발성이 강하고 흩어지는 순간 독기(毒氣)를 잃기에, 독정(毒精)의 내공으로 침투시켜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루기가 지극히 힘들고, 그만큼 강하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당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극독이었다.
그런 독을, 중독도 되지 않은 채 일 보(一步)만으로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자칫 잘못 흐트러트렸다간 순식간에 다리가 썩어 들어갔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웅.
당상아의 손짓에 따라 한여름의 뜨거운 바람이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바람이 향하는 곳에는 당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실린 것은, 대체 언제 하독(下毒)했는지 모를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이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스르르륵.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칠보단혼산을 모조리 흡입한 당관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낯빛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칠보단혼산은 당가에서 유명한 극독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독술사라 해도 그 많은 양을 한 번에 흡입하고도 살아남긴 어렵다.
독인(毒人)으로서의 당관이 얼마나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상아의 두 손이 또 한 번 부드럽게 움직였다.
스르르륵. 스르르르륵.
순식간에 공기가 텁텁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하독했는지, 어지간한 고수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은밀하고 자연스러웠다.
‘좋군.’
다섯 가지의 독을, 그것도 정확한 양으로 하독하여 서로 맞물리게 하였다. 하나하나가 독력이 대단한 독들은 아니었지만, 합쳐지는 순간 치명적인 독기로 상대를 마비시키는 술수였다.
당관이 처음으로 손을 휘저었다.
사아아악!
일순 한 줄기 강풍이 불어오며 무형의 독 덩어리가 당상아에게로 날아갔다. 살포한 독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당상아의 몸에서 은은한 녹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녹빛. 독 구름은 그 녹빛에 닿자마자 허연 연기를 내며 스러졌다.
당관의 입이 열렸다.
“거기까지.”
침묵의 독전(毒戰)이 끝났다.
당상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한 차례 녹광(綠光)이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붕정승제(崩頂昇帝)의 경지에 도달했구나.”
당상아의 얼굴에 솔직한 기쁨이 떠올랐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물론 내 덕분이다. 제왕독경(帝王毒經)을 전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경지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어.”
자존심 강한 당관이었지만, 지금의 말은 단순한 생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붕정승제의 경지는 누가 도와준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과 끊임없는 수복이 반복되어야만 이를 수 있는 경지이니, 지금의 넌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
“고생했다.”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뭔지 모를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온다.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는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 깃든 대견함을 읽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그리고 사천당가의 가주에게 진심 어린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다. 그녀에게는 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 하겠다.
“붕정승제의 경지는, 강호 무림에서 말하는 무종지벽에 닿아 있다. 아직 초입이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이른 시기에 무종지벽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독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당관이 품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성인 남성의 팔뚝 길이 정도 되는 비수였다. 얼핏 보아도 보통 비수는 아닌 듯했다.
당관이 칼날을 감싼 칼집을 벗겨 냈다.
번쩍!
마침내 드러나는 화려한 칼날.
칼날 위를 흐르는 불그스름한 기색이 인상적이다. 내공을 싣지 않아도 바위를 가를 만큼 날카로워 보였다.
당상아의 눈이 빛났다.
‘염왕비(閻王匕).’
당가의 보물 중 하나였다. 가히 신병이기(神兵利器)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물건이었다.
“받아라.”
당관이 염왕비를 던졌다.
위험천만한 칼날이었지만, 당상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비수를 낚아챘다.
당관이 다시 허리춤에서 비수 하나를 뽑아 들었다. 염왕비보다 조금 짧은 그 비수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다.
당관이 비수를 역수(逆手)로 쥐었다.
동시에 당상아 역시 염왕비를 역수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진정한 당가인(唐家人)은 독과 암기, 두 가지를 전부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다룰 줄 아는 것과 제대로 익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당관이 눈을 빛냈다.
“나는 그 둘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하고자 한다. 가주란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필연코 둘 중 하나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섣불리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간 둘 다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는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을 잃는 비정한 세계다.
수련도 일단 살아 있어야 진행할 수 있는 법.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에 힘을 쏟아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독보다 암기술에 능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독에 더 신경을 쓴다. 지금의 나는 장점을 극대화하기보단 단점을 보완해야 할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
“보아하니 너 또한 나와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아직 내 경지에 이르지 못했어. 단점을 지우기 전, 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우선이란 말이다.”
“네.”
“본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기가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암기의 근본은 비수이다. 그리고 비수는, 단순히 던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비수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암기 투척에도 날카로움이 산다.”
당관 역시 자세를 낮추었다.
왼손을 중단으로 올리고, 비수를 쥔 오른손은 왼손의 바로 아래에 두었다.
팔꿈치를 완전히 펴지도, 완전히 구부리지도 않은 채 양팔을 전면에 내세웠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함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비수는 빠르고 날카로우며 음험하다. 이번 비무에서 그 특성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반면, 당상아의 자세는 당관과 달랐다.
자세를 낮춘 와중에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은 하단을 방어하고, 비수를 쥔 오른손은 관자놀이 옆에 위치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찍어 죽일 기세. 자세의 살벌함만큼은 당관보다 더하다.
이것이 바로 당가 최고급 무공 중 하나인 사비무쌍세(死匕無雙勢)였다. 제왕독경과 함께 전수한 무공으로, 단순한 위력을 떠나 비수의 장점 자체를 극대화한 살벌한 무공이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파아아앙!
소리 없이 조용했던 독전과는 전혀 달랐다.
추뢰신법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당상아가 무서운 속도로 염왕비를 휘둘렀다.
번쩍! 번쩍! 번쩍!
불그스름한 비수 날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발했다.
놀라운 속도였다. 검보다 훨씬 가벼운 비수라지만, 맨손 육장으로 구사하는 권법이나 장법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당관은 여유로운 얼굴로 당상아의 비수를 피해 냈다.
던지지 않는 이상, 비수로 구사하는 무공은 필연코 근접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상아의 무공이 빨라질수록 당관의 회피 능력 역시 더욱 빛을 발했다.
삭! 사악! 사악!
내리찍고, 휘감아 베고, 사선으로 찌르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살기가 짙었다. 살기를 뿜어내지 않는데도, 무공 자체가 극에 이른 살법이라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수십 번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던 당관이 부지불식간 비수를 휘둘렀다.
쩌엉!
신병이기인 염왕비와 평범한 비수가 부딪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울림이었다.
당상아는 순간 비수를 쥔 팔 전체가 저려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나다!’
얇고 날카로운 비수에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내공을 싣다니!
붕정승제에 이르기 위해 온갖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번 부딪침으로 비수를 떨어트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파아아악!
당상아의 몸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당관의 측면으로 향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거기서 비수를 놓치지 않고, 도리어 충격을 분산하며 사각으로 파고드는 보법이 일품이었다.
당상아가 염왕비를 휘둘렀다.
팍! 파바박!
경동맥, 갈비뼈 사이, 허벅다리 대동맥 부분을 빠르게 찌르고 들어온다. 당관의 팔뚝이 당상아의 손목을 후려쳐 막지 않았다면 대출혈이 일어났을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염왕비가 갈 길을 잃자 자세를 낮춰 반격을 회피하고, 곧바로 목젖과 복부를 그으려 한다.
엄청나게 살벌한 공격이었다. 혈육 간의 비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공방이었다.
당관의 비수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쩌엉! 쩌엉! 쩌엉!
그 짧은 비수로 염왕비의 칼날을 정확하게 쳐 낸다.
속도와 섬세함이 극치에 달한 칼질이었다. 이 정도 속도로 요혈(要穴)을 노린다면, 어떤 백타술보다도 위험하겠구나 싶었다.
쩌어엉! 피슉! 파아아악! 퍼버벅!
장법이나 권법을 구사하진 않는다. 오로지 거꾸로 쥔 비수와 비수를 쥔 손목, 팔뚝만 이용하여 서로를 공격하고 방어한다.
무시무시한 비수의 공방전. 그 살벌함은 어떤 의미로는 독보다도 더 지독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파악!
거리를 벌린 당관이 손을 들었다.
“그만.”
재차 달려들려던 당상아가 멈칫했다.
“후우우.”
그제야 당상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이 긴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한 차례도 숨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무호흡의 살법이었다.
엄청난 심폐 능력. 내공 이전에 신체 능력이 극치에 달했다. 순수한 심폐 지구력만으론 이미 초절정 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만히 당상아를 보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비수의 본질은 일격필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비수의 본질은 일격필살이 아닌 연환살(連環殺)이다.
한 번 찔러 치명적인 결과를 낼 수 있지만, 동시에 즉사시키기 힘들기도 하다.
검기(劍氣)를 발현시키지 않는 이상 목을 벨 수 없다. 칼날의 길이 자체가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체의 급소들을 빠르게 찔러 점차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한 번 찔러서 죽일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온갖 요혈과 위험 부위를 찌르고 벤다. 필살의 한 방이 아닌 여러 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착실히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이 바로 비수로 근접전을 벌이는 무인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무공이다.
그리고 당상아는, 바로 그 비수의 본질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앞으로 사비무쌍세에 무게를 실어라. 성취가 오를수록 자연스레 암기술의 경지도 올라갈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만히 당상아를 보던 당관이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네 동생을 불렀다.”
“네?”
“조만간 맹으로 올 것이다.”
“……!”
당상아의 눈이 빛났다.
“양선이……!”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당관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양선이 가주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