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무림맹에서 (2)
가부좌를 튼 연위의 모습은 몹시 편안해 보였다.
운공조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딱히 명상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 좋은 들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과 신선한 들판의 기운을 느끼는 듯한 모습. 딱 그 정도로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 계셨군요.”
연위가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제갈문호가 있었다. 언제나 보여 주던 여유로운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다소 경직된 표정이었다.
연위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시오. 한데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그간 수련에 바쁜 어떤 분 때문에 홀로 머리가 아파서 투정이나 부리려고 왔습니다.”
연위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오. 검에 정신이 팔려서…….”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것참, 이제 좀 편안해졌나 싶었더니만 그새 예전으로 돌아가신 겝니까?”
“군사 일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야지요. 정말 급했다면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 말을 하니 오히려 더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함과는 별개로, 연위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표정이 좋지 않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연 대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연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호정에게?”
“그렇습니다. 한데 서찰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직접 읽어 보십시오.”
“…….”
“아, 오해는 마십시오. 이 안건에 대해서는 한 시진 후 봉공회의에서도 말할 터이니.”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걱정되는 게 있소.”
“세작 말이로군요.”
“그렇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세작의 존재 가능성을 봉공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괜스레 정보를 통제했다가는 불만만 쌓일 겁니다. 알릴 것은 알려야지요.”
“하긴, 군사께서 오죽 알아서 하시겠소.”
연위는 제갈문호가 건넨 서찰을 읽었다.
잠시 후.
“양천이?!”
연위는 깜짝 놀랐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보타암을 뒤흔든 것까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설마하니 사음까지 건드리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타암을 중심으로 한 삼파전.
말이 좋아 삼파전이지,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무림맹과 묵룡부가 손을 잡고 사음교를 농락할 것이다. 사음교를 속이고, 그 내부로 침투하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모든 게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설령 성공한다 한들,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확실한 물증이 나오면 소림이 묵룡부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삼교 전체와 싸워야 하는 중원 무림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수가 어떻게든 그 일을 막았다는 것이겠지요.”
역시 연호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 자신이 하는 생각을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막으려 했을 것이고.
“문제는 사음교로 간 천이문입니다. 그쪽이 정말 사음교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보타암은 재기가 불가능할 겁니다.”
“음.”
연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대수에게 간 천안문의 대표는 범오의 설득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고, 연화문주는 족히 수년을 정양해야 나을 만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말하자면 보타의 세 지파 중 두 곳의 대표가 억압된 상황이지요.”
“후계자들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구려.”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듯합니다.”
“음.”
“일단은 천이문이 문제인데, 솔직히 그들이 사음교와 접촉했다면 막을 수도 없거니와, 굳이 막아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연위가 눈을 빛냈다.
“그 말씀은?”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타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적어도 ‘당대’ 보타는 그렇지요. 예전의 정기를 되찾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
“차라리 삼교가 아닌 무림맹이나 묵룡부였다면 모르겠지만…… 천이문이 사음의 도움을 받는 순간, 그들은 오염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오염이란 병이나 욕망 같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천이문이란 지파 자체가 사음에 장악당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음에게 당한 조직들은 만만해서 당한 게 아니었다. 천이문보다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암살자 세계마저도 제 것으로 만든 게 사음교의 저력이었다.
거기에 신화교나 광혈교까지 얽힌다면?
‘천이문은 끝났다.’
파멸이다.
그래서 양천은 천이문을 사음교로 보냈을 것이다. 확실하게 물들어 버리라고. 그리하여 천이문을 통해 중원에 기어들어 온 사음교의 고수들을 역추적하여 파고들기 위해.
양천은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무서운 남자다.’
양천이 위험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근래 들어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오히려 예전에는 그를 너무 낮잡아 본 감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비단 보타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전, 후개에게 서신을 받은 연후에 답장을 할 때, 그 서신을 두 군데로 보냈습니다. 하나는 후개에게, 다른 하나는 묵룡부의 정보망에 뿌렸지요.”
연위가 눈을 빛냈다.
“그들의 정보망이라 함은?”
“혼란을 조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용가주에게 허가를 받기 전이었지만, 실제로 모용가주 역시 제 결단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어떤 내용을 적으신 것이오?”
“모용세가가 묵룡부를 타격할 비밀 조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제갈문호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묵룡부가 대단한 조직이라 한들, 모용세가는 그들의 턱 밑에 존재하는 가시와도 같습니다. 가시도 보통 가시가 아니라, 한번 찔리면 다리 하나는 마비될 정도로 위험한 가시지요.”
“한데?”
“묵룡부는 그 정보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정보력을 교란, 이후 정보원의 공백이 생길 때 세작을 침투시켜 천이문의 동태를 확인하려 했는데, 그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으음.”
“아시겠습니까? 과거의 양천이었다면 그 보고를 받고 눈이 뒤집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더군요.”
극약 처방을 했는데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 양천이 예전보다 성장했거나, 혹은 그 옆에 안목이 날카로운 모사(謀士)가 생겼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이제 묵룡부도 강해진 것입니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그렇기에 그들과 심각한 마찰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좋지만, 쓸데없는 분란으로 전력을 깎아 먹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제갈문호는 묵룡부를 위험 요소로 보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묵룡부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묵룡부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철저히 세력으로서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가주께 왔습니다. 부탁을 드리려고요.”
“어떤 부탁 말씀이오?”
“회의가 열리면, 봉공 중 많은 사람이 양천의 행보에 큰 반감을 표할 것입니다. 어쩌면 극단적인 의견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
“가주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가주의 발언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부디 일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소. 내 힘써 보리다.”
“감사합니다.”
연위가 가만히 제갈문호를 보았다.
“그것이 끝이오?”
“끝입니다.”
제갈문호의 반응은 담담하기만 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하면, 이따 회의 때 봅시다.”
“그럼.”
제갈문호가 등을 돌렸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연위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할 말이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지금 당장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놀랍게도 연위의 직감은 정확했다.
들판에서 한참 멀어진 제갈문호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날 욕하십시오.”
그가 품에서 또 다른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 역시 연호정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오직 제갈문호 자신만 보라고 비밀리 보낸.
그리고 그 서신에는, 연호정 자신이 묵룡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그리 위험한 생각을 하니 내 골치가 이리도 아프지 않은가.’
제갈문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연호정이 묵룡부로 들어가 흑도를 쥐고 흔드는 것이 몹시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연호정이 묵룡에 들어가서 흑백 연수의 교각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일은 굉장히 편해질 것이다.
‘연가주는 과연 반대할까? 아니면 찬성할까?’
알 수 없다. 평소 연위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버지로서는 반대하겠지만 무림맹의 봉공으로서는 찬성할 것 같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연호정과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연호정 역시 그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따로 서신을 보낸 것이리라.
대의(大義) 때문에 관계를 허투루 하지 않는 것. 연호정의 장점이었다.
중간에 낀 자신은 고역이지만.
제갈문호는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약한 소리 하지 말자, 이놈아. 아들뻘 되는 젊은이도 목숨을 걸고 활동하고 있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앓는 소리는 금물이지.”
* * *
사흘 뒤.
연호정이 양천에게 말했다.
“하면, 이만 가 보겠소.”
“몸 조심히 다녀오시게.”
“괜한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돌아올 때까지 사고는 그만 칩시다.”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이지, 내 앞에서 그따위 웃기지도 않는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천하에 자네 하나뿐일 걸세.”
“그렇다면 반성하셔야겠소. 부주의 지난날도, 이 정도 발언도 못 하는 지인만을 곁에 둔 편협한 관계도.”
“점점 못 하는 말이 없구먼, 이 사람.”
“미리 겪으라고 하는 거요. 내가 묵룡으로 파견 오는 순간, 좋은 일만 일어나진 않을 거요. 부주께서도 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겠지.”
양천이 피식 웃었다.
“하늘에서 천금이 떨어지면 그 돈을 잘 다루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안해서 꽁꽁 싸매다가 한 푼도 못 써 보고 죽는 머저리도 있는 법이지.”
“부주께선 후자요?”
“전자일세, 이 사람아.”
미소 짓던 연호정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오면, 이 친구도 파견원일 거요.”
양천이 강량을 보았다.
절대고수가 시선을 주는데도 강량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양천이 혀를 찼다.
“저런 위험천만한 칼을 곁에 두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텐데.”
“역시 후자였군.”
“……한 방 맞았구먼.”
“다시 돌아올 때까지 보타의 후예들을 잘 부탁하오. 사고는 치지 않을 것이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잘 다녀오기나 하시게. 그리고 연 대수.”
“말씀하시오.”
양천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 세작 놈, 반드시 잡아야 하네.”
연호정의 얼굴에도 비슷한 살기가 떠올랐다.
“반드시 그럴 것이오.”